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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구

다른 표기 언어 jewelry

요약 몸치장을 위해 금과 같은 귀금속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장식적 물건.

금령총 출토 목걸이

수정 목걸이(신라), 길이 21cm, 경북 경주시 노동동 금령총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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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기를 통하여 여러 문화에서 다양하게 제작되었으며 개인의 치장물이 많고 예술적인 가치와 역사적인 상징을 의미하는 것도 있다.

재료

개요

독특한 예술 장르로 자리잡은 장신구의 재료는 조개껍질과 동물의 뼈에서 나무·보석·준보석·진주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가장 전통적으로 많이 쓰이는 재료로는 장신구 제작에 적합한 특성을 지닌 금·은·백금을 들 수 있다.

금속재료

은 BC 3000년경에 발견되면서 계속적으로 사용되어온 것으로, 찬란한 황색빛에 공기나 물 속에서 산화되지 않는 특성까지 있어서 권위나 신분표시를 하는 데 최적의 재료로 인정되었다. 또한 금의 연성(延性)과 전성(展性)으로 인해 1g의 순금으로 3km의 금선을 뽑을 수 있으며 가장 얇게 0.0025㎜까지의 금박으로 늘일 수 있어 더욱 널리 활용된다.

1742년 코발트·니켈과 함께 발견된 백금은 남아메리카 인디언이 이미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에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비산화성·비부식성·비수화성·탈수화성 등의 특성을 지녀 산업분야에 폭넓게 쓰이고 있으며 현재 백금의 최고 수요국인 일본에서는 70%가 장신구 제작에 쓰여진다.

은 금과 더불어 장신구 제작에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재료이며, 전성과 연성이 금 다음으로 좋고 가공하기 쉬울 뿐 아니라 아름다운 은백색을 발하기 때문에 널리 애용되고 있다.

그러나 대기 중에서 가열해도 산소를 흡수하거나 산화되지 않는 성질을 갖고 있는 반면 공기 속의 수분과 아황산가스 또는 황화수소에 의해 검게 되는 단점이 있어 사용할 때 조심해야 한다. 이밖에도 유선칠보·조금칠보·채유칠보 등의 기법을 사용한 칠보 금속물이 있다.

보석

장신구 재료로 금속 못지 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보석의 형성은 인간발생 이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는 지구 지각구조의 생성이라는 자연법칙에 의해 탄생된 것이다. 인간에 의해 발견·채취·연마되면서 지구상에 약 3,000여 종의 광물이 존재함을 알았고 이중 약 20여 종의 광물이 보석으로 쓰여져왔다. 이 광물은 보석의 자격요건 중 가장 중요한 아름다움과 퇴색·변질·부식 등이 생기지 않는 불변성을 의미하는 내구성, 또한 사람들의 소유욕을 유발시키고 가치상승을 기대하게 되는 희소성과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변의 가치로 통용될 수 있는 특징을 가진 것이라야 한다.

이것을 좀더 높은 가치를 가진 귀석과 그보다 낮은 가격의 반귀석 또는 준보석으로 대별하기도 한다. 종류로는 보석 중의 보석으로 알려진 다이아몬드를 비롯해 루비·진주·산호·호박·에메랄드 등의 천연보석과 채색유리로 모방한 인공보석, 그리고 여러 광물의 원소화합을 결합한 합성보석 등이 있다.

보석가공 기법

보석 가공에서는 특히 커팅(cutting) 기법이 대표적인데, 크게 각면(facet)깎기와 둥근면(cabochon)깎기로 분류된다(→ 보석연마). 이중 각면깎기는 보석이 투명한 경우 들어오는 빛을 최대로 분산시키기 위해 표면을 다면체로 깍는 것을 말하며, 둥근면깎기는 보통 불투명의 보석에 적합하며 비교적 경도가 낮은 보석에 사용되는 기법이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일정한 형식 없이 돌의 성격에 맞게 자유롭게 깍는 판타지 커팅(fantasy cutting) 기법이 개발되었다.

종류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했던 시기부터 착용한 것으로 보이는 목걸이는 주술적인 상징으로 몸에 지니게 되었고, 처음에는 조개, 동물의 뼈·어금니 등 자연물을 그대로 사용한 형태에서 서서히 금·은·보석·유리 등을 정교하게 사용한 것으로 변모했다.

브로치는 옛날 스칸디나비아인이 동물의 가죽이나 털을 몸에 감고 다니면서 벗겨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슴부분에 동물의 뼈로 고리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시작되었으며, 그것이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뼈 대신 청동으로, 청동에서 다시 새로운 물체로 대체되었고 용도도 장식적인 대상으로 바뀌었다.

또한 이집트 시대에는 호신용으로 불멸의 상징인 딱정벌레를 세공해 악귀를 쫓아내는 브로치가 만들어졌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4각형의 조각을 어깨부분에 붙이고 다니는 풍습이 있었는데 여기에 브로치가 사용되면서 장식적인 용도에서 기능적인 용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석기시대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진 귀걸이는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각지의 유물에서 돌을 바퀴모양으로 가공하여 귀걸이로 사용했음을 찾아볼 수 있다. 반지는 약 5,0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8왕조 때 호신용 장신구 중의 하나로 제작된 것이 기원이 되었으며 여러 디자인이 유행·발전되었다.

19세기 중반부터 넥타이핀과 커프스 버튼(cuffs button)이 사용되었으며 커프스 버튼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부터 18세기까지 남성 외투에 사용된 장식물이 실용과 장식을 겸한 커프링(cuffring)으로 발전되어 사용되고 있다.

넥타이핀

ⓒ Marshmallowbunnywabbit/wikipedia | Public Domain

서양의 장신구

개요

장신구의 역사는 고분 발굴을 통해 끝없이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데, 지금까지의 기록에 의하면, 대부분 신분·계층의 표현이나 주술적인 상징으로 쓰이다가 프랑스 혁명 이후부터 치장과 순수 장식적인 용도로 쓰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난다(디자인, 사회적 지위).

인간이 옷을 만들기 전부터 조개껍질이나 생선뼈, 나뭇잎 등의 자연물을 몸에 부착하는 것이 최초의 장신구인데 이는 오래된 동굴벽화에 나타난 여인의 모습이 옷을 입지 않은 알몸에 모자, 긴 목걸이, 팔찌 등을 달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선사시대인). 또한 장신구는 다양한 형태로 머리·허리·팔꿈치·귀·코·입술·목·가슴·배·팔·종아리·다리·발 등 몸의 곳곳을 장식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BC 3000년으로 추정되는 수메르우르에 있는 푸아비(Pu-abi) 왕비무덤에서 나온 장신구들이 고대 중동과 서부의 가장 오래된 장신구들이다.

금잎사귀 모티프로 만들어진 3개의 왕관을 비롯하여 왕비는 금·은·청금석(靑金石)·홍옥수(紅玉髓)·아게이트[瑪瑙]로 장식된 옷을 입고 있고, 귀에는 커다란 금귀걸이가 달려 있으며 준보석이 3줄로 엮어진 목걸이 및 손가락에 끼워진 수많은 반지와 허리·가슴·어깨 부분이 장신구들로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현대 장신구에 비해 원시시대에 장신구의 의미는 대단한 것이었으며, 각 신체부위마다 종류가 상당히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속세공기술도 높은 수준에 이르러 땜기법·합금법·선세공(filigree)·돌가공·칠보기법까지도 쓰여진 것을 볼 수 있다.

이집트의 장신구는 투탕카멘(18왕조:BC 1567~1320)의 분묘가 발굴됨으로써 당시의 금세공술이 세계에 알려져 전형적인 이집트 장신구의 특징을 볼 수 있게 되었다.

특유의 주술적·종교적인 믿음 속에서 성장한 순수한 상징성을 지니고 있는 이집트 장신구는 좌우대칭 속에서 형태와 색채로 율동감 있게 반복시켜 다양한 구성을 만들어냈다(→ 색인:도상학). 또한 기본적인 기하학적 구조 안에서 다양한 색채의 재료를 일렬 배치하거나 다른 재료와 엇갈리게 사용하여 대비효과를 얻는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즉 원통·원·원추·원반 형태의 목걸이 구슬들에 금, 홍옥수, 터키석, 청금석, 접착제로 부착된 도자파편 등이 색채별로 나열되어 있다.

18왕조에 들어서면서 이집트 양식은 수입된 외국의 장신구에서 영향받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마지막 왕조에 이르러 위대한 기념비적인 이집트 문화는 점점 사라져가고 점차 그리스 문화로 흡수되어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지중해의 크레타 섬은 동양·서양·아프리카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 중심지로서 BC 2000년부터 풍요함을 축적하고 있었고, 이에 비례하여 높은 수준의 예술적 감각을 표현한 섬세한 금세공도 발달했다.

금세공(goldwork)

15세기 금세공 마스터의 작업 모습을 표현한 그림.

ⓒ Goodness Shamrock / wikipedia | Public Domain

이러한 크레타 섬의 문화적 부(富)는 인근 섬들과 그리스 본토에 퍼졌고, 특히 미케네 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당시의 괄목할 만한 세공기법은 그래뉼레이션(Granulation)과 누금세공이였고 가장 보편적인 기법은 한 가지 문양의 패턴을 반복하여 장신구나 의상에 장식하는 스탬핑 기법이며, 둥근 것, 타원, 리본형 등 기하학적인 것과 꽃·나무·동물·나비 등 자연물의 모티프를 사용했다.

장신구 교역의 중심지였던 페니키아는 그 지역 특유의 장신구는 개발하지 못했지만 지중해 연안의 북부 아프리카, 사르데냐, 스페인, 이탈리아 등 여러 지역의 양식을 다양하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BC 8~7세기에는 중동지방에서 건너온 동물을 주제로 한 문양이 퍼져나갔고, 지중해 연안국들을 통해 동양양식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유행되었다(→ 색인:동방화기). 에트루리아는 페니키아를 통해 들어온 동양적 모티프와 기술, 양식을 점차 더 발전시키면서 세계 장신구 역사에 중요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선세공과 그래뉼레이션이 다양하게 사용되고 브로치 제작에도 종래의 한 금속판만을 사용하던 것을 지양하고 길게 늘어뜨렸으며, 동물주제의 장식은 누금기법이나 금가루 뿌리는 기법으로 평면판 위에서 좀더 부각시키는 양식이 많이 쓰여졌다.

브로치 (brooch)

3세기 헬레니즘 예술, 그리스 장인이 만든 브로 간자 브로치

ⓒ Manuel de Corselas / wikipedia | Public Domain

그리스는 BC 7~6세기에 걸쳐 동양의 모티프와 기법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전쟁하는 장면, 동물형태 등 사실적인 형태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색인:그리스 예술). 그러나 점차 반지 등에서 복잡한 전쟁 장면이 사라지고 단순한 인물상으로 바뀌면서 그리스 양식이 개발되는 시점이 되어 절제된 형태의 고전적 아름다움을 지닌 그리스 양식의 특징이 나타난다(→ 색인:고전기). 따라서 축소된 인물조각, 종교적·미신적·영웅적 인물을 주제로 한 조각이 널리 발달하게 되었다.

헬레니즘 문화의 시대는 대략 BC 325~27년 로마 제국이 성립되기까지 지속되어온 그리스 문화가 발칸 반도로 확대되어가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후 장신구의 번성기를 맞이한다.

특히 이시기는 금채광작업이 활발해지고 정복한 페르시아로부터 약탈한 보물 때문에 양과 질이 뛰어난 금세공이 발달되었다.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이 발달되면서 일반화된 장신구는 섬세함과 대비된 장식으로 조화를 이루었으며 리듬 있게 배열된 양식이 두드러졌다. 그중에서도 고대로부터 마력의 매듭으로 알려진 헤라클레스 매듭이 장신구 중에서도 호신의 상징으로 팔찌·허리띠·반지 등에 쓰였다.

특히 BC 3세기에 뱀 모양의 팔찌가 혁신적인 양식으로 처음 등장하면서 반지에까지 응용되었고 이 모티프가 로마 시대까지 사용되었다.

고대 로마와 르네상스 시대에 널리 퍼졌던 로마의 장신구는 로마 제국 시대에 들어 금속세공의 중심지가 되자 더욱 활발한 장신구 양식이 발달되었다. 특히 금세공 가운데 귀족계급의 신분표시를 했었던 금반지가 차츰 평민과 군인까지도 끼는 장신구로 유행되었고, 초기의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양식에서 벗어나 로마 특유의 양식이 만들어졌다(오푸스 인테라실레). 그리스 양식에서 넘어온 뱀 모양의 장신구를 비롯하여 귀걸이·밴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제작되었고, 모티프도 기하학적인 것, 식물 모양, 개 모양, 나선 모양, 둥근 모양 등으로 다양해졌다.

오푸스 인테라실레 (opus interassile)

고대 로마 시대, 오푸스 인테라실레 기법으로 만들어진 금팔찌

ⓒ FAE / wikipedia | CC의 BY-SA 3.0

그외에 지금까지는 없었던 반달과 4개의 살이 있는 바퀴 등 새로운 주술적인 자연물이 나타났고, 토파즈·에메랄드·루비·사파이어·진주 같은 유색 보석이 널리 사용되었다. 기법은 금속망과 사슬을 이용해 거기에 반구의 진주나 보석을 알물림하고 잎사귀를 매달기도 했다. 후기에 들어서는 펜던트 형태도 생겨났고 AD 3~4세기에 와서는 목걸이에 황제의 초상화가 있는 메달이나 금화가 매달렸다.

중세

유럽 전역에 위세를 떨쳤던 로마의 문화가 AD 4세기에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그 위력을 이어받은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왕국은 중동과 가까운 관계를 맺으며 새로운 동방문화를 건설했다.

동양의 영향과 종교적 필요성이 통합되면서 새롭고 독특한 비잔틴 양식이 만들어진 것이다(→ 색인:비잔틴 예술). 즉 자연물을 모티프로 양식화된 패턴이 만들어졌고 금속세공인 필리그리와 칠보, 보석과 진주의 사용이 보편화되었다. 특히 비잔틴 장신구의 전형적인 형태인 반달 모양의 귀걸이는 12세기에 널리 퍼져나갔다.

일반적으로 사용된 장식기법은 아라베스크 문양과 복잡한 모티프를 선세공으로 만들었고 꽃, 새 모양 등은 칠보기법을 사용했다.

아랍이 이란을 점령한 후 이슬람 공동체에는 동물 형상을 나타내는 이란의 전통이 지켜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모티프가 변형·양식화되어 12세기에 만들어진 금 목걸이 등에서는 상당히 양식화된 그래뉼레이션의 장식을 볼 수 있게 된다(→ 색인:이슬람 예술). 이슬람의 유행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터키의 장신구는 남녀가 모두 치장했는데 반지·귀걸이·팔찌와 더불어 터번 장신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으며 옥·경석 등에 금으로 나선형 꽃 모양을 한 장식 모티프들을 장식했다(→ 색인:오스만 제국).

르네상스에서 현대까지

15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는 많은 분야에서 문명의 발전을 일으켰고 장신구에서도 보석장식세공과 귀금속 연마 기술에 큰 진전을 가져왔다.

이에 따라 금과 은은 단순히 보석을 아름답게 하는 부속물로 격하되었고 보석은 그 가치가 상승되었다. 그중 다이아몬드, 루비의 적색, 사파이어의 청색, 에메랄드의 녹색같이 화려한 색채의 보석을 이용하여 새로운 디자인과 조형미를 추구했으며 당시의 유명한 기베르티·브루넬레스키·폴라이우올로·보티첼리 등의 화가들이 장신구를 직접 디자인하고 세공기법을 완벽히 구사하여 훌륭한 장신구와 금속공예품을 제작했다. 장신구의 기능도 지금까지 교회와 교황을 위한 종교적 상징성을 띤 것에서 인간의 치장을 위한 장식적 역할로 바뀌어갔음을 목과 어깨가 노출된 의상을 입은 여인이 보석 달린 목걸이를 화려하게 걸고있는 이탈리아 화가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보석 애호가 극치에 달하면서 기술 발달도 절정에 이르러 기본적인 보석세공인 각면깎이와 둥근면깎기로부터 16개의 면을 가진 연마기술이 개발되어 그때까지 볼 수 없었던 보석의 광채와 미를 발휘하게 되었다. 또한 돌을 깎아 사실적인 형태를 새겨넣는 인탈리오(Intaglio) 기법을 많이 사용했으며, 여기서 배경을 깎아버리는 돋을새김을 아게이트를 사용해서 하는 카메오(Cameo) 기법 등이 널리 쓰였다.

17세기에 이르러 그때까지 종교적인 권위의 상징으로 교황이나 사제만이 끼었던 반지가 귀족사회에서 약혼반지·결혼반지로 교환되는 새로운 기능이 생기게 되었다.

이 반지는 바로크·로코코 양식의 식물 잎사귀, 리본, 꽃 등 아름답고 우아한 선을 이용한 모티프를 주로 사용했다(→ 색인:꽃과 잎장식).

루이 14세헨리 8세 시대에는 보석과 장신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여 당시의 초상화에서 보듯이 전신이 보석으로 치장되었으며, 귀족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더 많은 장신구를 착용했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에 이르기까지 값비싸고 화려한 색채의 디자인이 주를 이루었으며, 왕족이나 귀족에 의해 독점되어온 보석 장신구가 일반 시민에게 넘어오게 된 것은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이다.

19세기초 장신구 양식의 특징은 고딕·르네상스·그리스·로코코·스페인·인도풍 등 각 양식이 혼합된 것이며 이러한 특성을 가미한 러시아 작가의 〈부활절 계란〉은 후세에 남겨질 걸작이다.

1847년 프랑스 파리에서 상점을 연 알프레드 카르티에와 아들 루아는 당시 상류계층에서 유행하던 칠보와 조금칠보 기법, 그리고 보석을 잘 조화시킨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냈고, 1851년부터 미국 뉴욕에서는 문방구류를 취급하던 티파니가 실용성 있는 금속공예품과 장신구·보석 등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티퍼니 (Charles Lewis Tiffany)

미국의 보석상

ⓒ Gryffindor / wikipedia | Public Domain

특히 다이아몬드를 사용하여 제작된 독특한 형태의 포크가 특징적이다. 19세기의 장신구는 대량생산체제가 이루어져 급성장하는 중산층을 겨냥하여 새로운 디자인 시대가 열리게 되나,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기계화와 구식의 아카데미즘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은 보다 자유롭고 부드러우며 아름다움을 겸비한 조형적인 장신구를 요구했으며 이에 부응하여 아르 누보(Art Nouveau) 양식이 탄생되었다(→ 색인:아르 누보). 우아한 여성의 몸매, 몽상적인 얼굴, 백합꽃, 자연의 풍경 등을 모티프로 한 것이 이 양식의 특징이며 연속적인 곡선이 비대칭적으로 사용되어 마치 넝쿨식물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느낌이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상아, 오팔, 바로크 진주를 즐겨 썼으며 이와 더불어 금의 합금이 다양하게 쓰였다(→ 색인:현대미술).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현대 장식미술전에서 유래된 아르 데코(Art Deco) 양식은 동시대의 큐비즘이나 바우하우스 등의 영향으로 좌우대칭의 간결한 형태, 직선적인 문양의 반복이 특징이다.

여성의 사회진출과 평등사상에 따라 여성들의 의상이 활동적으로 변하게 되자 장신구의 형태 또한 간결하고 대담하며 화려해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50년대에 생활이 안정권에 들어서면서 모든 예술분야가 다양하게 개인의 감성을 표출하는 시대를 맞이했고 젊은 장신구 작가들은 장신구를 자신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매개체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것이 곧 독특한 예술의 한 장르로 탈바꿈했고, 이어서 유럽·미국·일본 등의 선진국에서 미술대학에 장신구학과를 개설하고 시대감각에 맞추어 활동할 수 있는 인재들을 양성하게 되었다.

1960년대는 새로운 세대의 장신구 예술가들에게 희망과 이상주의의 시기였다. 그들은 신선한 아이디어를 장신구라는 매체로 표현하면서 그룹을 형성하고 전시회를 갖기 시작했다.

1970년대초부터 장신구 예술을 위한 국가간의 교류증대 및 국고지원이 있는 대규모 워크숍과 국제전시회 등이 열렸다. 1989년에는 오나멘트 1이라는 국제적인 장신구 전시회가 열리는 등 다양한 장신구 연구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타지역의 장신구

아프리카

북부 아프리카는 이슬람의 영향으로 문양이 화려한 장신구들이 은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에티오피아와 수단에서는 이집트와 아랍의 영향으로 금 장신구가 그들의 족장을 위해서 또는 종교적 이유로 만들어졌다. 가나의 아샨티(Ashanti) 문명에서는 족장의 거주지역에 개인적인 금세공 공방을 둘 정도로 많은 장신구들이 만들어졌다.

아메리카 인디언

아메리카 인디언의 귀금속 장신구는 고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금세공기술이 크게 발달하게 된 것은 AD 5세기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지역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남아메리카의 안데스 지역(페루·콜롬비아·에콰도르)과 중앙 아메리카(멕시코·과테말라·엘살바도르)에서, 또한 그 중간지역인 파나마·코스타리카 등지에서 예술성 높은 금속세공이 성취되고 있었다. 페루의 차빈 문명(BC 1000~400경)에서는 금판의 돋을새김 기법이 나타나는데, 이는 가장 역사 깊은 금판 세공술로 인정받고 있다.

차빈 (Chavin)

차빈 문화의 금세공기법으로 만들어진 금 목걸이

ⓒ Lombards Museum / wikipedia | 3.0 BY CC

차빈 문명 후기에는 상당한 수준의 금세공술로 발전하며, 이어지는 모치카 문명(BC 400~AD 500)에서는 필리그리와 더불어 보석들이 쓰였다. 풍부한 금과 보석이 콜롬비아에서 생산됨으로써 재료의 풍요로움은 그들의 금세공술에 많은 영향을 주어 금 마스크, 금관, 팔찌, 발걸이, 목걸이 등의 장신구들이 대량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부족 사이에서 귀족계급의 지위를 황금판에 표현하게 되어 다양한 돋을새김 기법과 주조기법이 함께 발달했다. 동물과 사람의 형태가 복합된 높낮이가 많은 돋을새김 기법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며 금과 더불어 수정·청동석·에메랄드·터키석·산호·진주 등이 널리 사용되었다.

인도

아잔타 동굴 벽화(AD 4~5세기)나 부처상들이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인도에서의 장신구 예술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발가락부터 온 몸에 장신구로만 휘감았던 것이 인도 여성이다. 많은 양의 다양한 장신구 종류들은 인더스 문명의 독특함을 잘 보여준다. 특히 다색의 보석과 준보석을 많이 썼는데, 그것은 인도와 스리랑카·타이·미얀마 등지에서 진주를 비롯한 보석들이 많이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색인:색채장식).

스키타이

스키타이는 금세공술이 탁월하여 동물양식으로 분리되어질 만큼 금판이나 은판을 돋을새김하여, 달리거나 싸우고 있는 동물상을 주제로 한 조형감각과 자유로운 형태가 특징적이다.

스키타이의 금 세공술과 동물양식은 BC 7세기 동안 서아시아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이란의 위예(Ziwiye) 보물에서 발견된 장신구에 나타나듯이 동물의 형태를 수준 높은 조형감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스키타이 미술 (Scythian art)

4세기 스키타이의 금세공술로 만들어진 금으로 된 빗

ⓒ ImageObserver / wikipedia | Public Domain

스키타이 미술 (Scythian art)

스키타이의 금세공술로 만들어진 동물 모양 상패

ⓒ I, Sailko / wikipedia | CC의 BY-SA 3.0

중국

BC 5000년경 동물뼈를 갈아 만든 작은 펜던트가 샹시 지방 근처 신석기인들의 거주지역에서 발견되었고, 후기 신석기시대인 BC 2000년경 왕조에서는 상아나 뼈로 된 새나 추상적 형태가 끝 부분에 조각된 머리핀 등이 발견되고 있다.

옥이 많이 나타나며 금·은·청동으로 된 금속장신구들은 조금 늦게 등장하고, BC 4세기에 들어서는 무기의 부분 장식품 등이 금으로 제작되었다. 그이후 청동 주조된 허리띠 고리가 많이 나오는데, 무사들이 허리띠에 칼 같은 무기를 고정시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나라 후기에 그래뉼레이션이 중동에서 들어와 이후 10세기까지 계속되어 머리장식, 빗, 귀걸이, 옷 장식품의 제작기법으로 쓰였다.

·나라 때는 금과 은에 돋을새김 기법이 많이 쓰이고 나라 이후 많은 양의 장신구들이 생기면서 높낮이가 뚜렷한 돋을새김 기법으로 ·준보석을 써서 과장된 동물형태나 꽃무늬 등을 표현한 장신구가 많이 제작되었다.

현대 중국에서도 둥근면깎기로 된 보석들은 숭배되며 의상장식에 자주 쓰인다.

중국 장신구의 특징은 머리장식이 주종을 이루며 장신구 자체보다는 의상의 부속장식물로 쓰이는데, 이는 그들의 의상이 긴 소매, 높은 깃으로 신체 전체를 감싸고 있어 신체 자체에 장식할 부분이 머리장식으로 제한되는 것에 그 원인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

BC 2~AD 6세기 고대 일본에서 출토되는 장신구들은 거의 없으며 푸른 옥이나 유리로 깎은 곱은옥(曲玉)이 약간 나타나는데, 가야나 신라에서 흘러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은 여자나 남자들의 귀금속 장신구 착용이 금지되어 있어서 남아 있는 장신구들이 거의 없으며 에도 시대[江戶時代:1603~1867] 이후에 귀족여성들과 기생들에게만 머리장식이 허용되었다.

한국의 장신구

개요

우리나라의 선사시대 장신구는 구조와 형식 면에서 한반도 고유의 문화적 기반 위에 시베리아, 중앙 아시아 등지의 북방 아시아적인 요소가 혼합되었다.

삼국시대의 장신구는 중국의 문화와 불교적인 요소가 곁들여졌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중앙정부 및 사회의 혼란으로 삼국시대와 비교하여 발전하지 못했다. 고려시대에는 송(宋)·원(元)나라의 영향을 받아 왕실 귀족층의 복식이 대단히 화려해지고 발달했으며 조선시대에는 유교가 사회의 기본이념이 되면서 불로장생(不老長生)·부귀다남(富貴多男)·제액구복(除厄求福) 등을 기원한 장신구가 크게 유행했다.

우리나라의 고대 장신구는 주거지에서 발견된 것보다 각종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것이 많아 실제로 생활에서 사용한 예에 대한 연구는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따라서 무덤에서는 권위의 상징인 금관에서부터 장의용(葬儀用)·신발[飾履]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의 장식용품이 발견되었지만 실제로 사용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신석기시대

서포항(西浦項) 유적에서는 짐승뼈를 갈아 만든 목걸이, 궁산리(弓山里) 유적에서는 옥으로 만든 작은 도끼, 미송리(美松里) 유적에서는 벽옥제곱은옥[碧玉製曲玉], 금탄리(金灘里) 유적에서는 곱돌제 팔찌, 농포동(農圃洞) 유적에서는 사슴뿔로 만든 비녀 등이 발견되었다.

청동기시대

영천(永川) 어은동(漁隱洞) 유적에서 출토된 주조(鑄造) 마형패식(馬形佩飾)과 청동제 사슴머리, 말 모양 띠고리, 호랑이 모양 띠고리, 여주(驪州) 흔암리(欣巖里)에서 출토된 푸른 돌을 갈아서 만든 대롱옥[管玉], 태안(泰安) 고남리(古南里) 조개더미유적에서 출토된 비취로 만든 곱은옥형 장신구 등이 알려져 있다.

철기시대

태성리(台城里) 4호 움무덤[土壙墓]에서는 물소뿔로 만든 비녀, 세죽리(細竹里)에서는 곡옥, 운성리(雲城里) 6호 움무덤에서는 장고형(長鼓形) 귀걸이, 무산(茂山) 호곡(虎谷) 유적에서는 청동제 팔찌, 태성리 4호 널무덤[木棺墓]에서는 은제반지 등이 출토되었다.

삼국 및 가야시대
금제태환이식

금제태환이식(신라), 국보 제90호, 길이 8.7cm, 경북 경주시 보문동 부부총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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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장신구는 그들의 생활풍습과 어우러져 간결하고 건실한 것이 많은데, 관모(冠帽)는 모두 금동제로서 형태는 불꽃무늬를 도안한 것 같다.

평양 부근 고분 출토의 투각초화무늬금동관[透刻草花紋金銅冠]과 평양 청암동(淸岩洞) 토성(土城) 출토의 투각화염무늬금동관[透刻火焰紋金銅冠], 지안 현[輯安縣] 고구려 돌방무덤[石室墳] 출토의 금동관장식[金銅冠飾], 진파리(眞坡里) 7호분의 금동용봉무늬관형장식구[金銅龍鳳紋冠形裝飾具]와 대동(大同) 도화성리(都和盛里) 고분의 금동관장식이 있다.

귀걸이는 강원도 고성군 봉화리 1호 돌덧널무덤[石槨墓]에서 금귀걸이 1쌍, 평양 역전 2실분(二室墳)에서 금동제 귀걸이 등이 발견되었다. 반지는 약수리(藥水里) 벽화고분에서 금반지, 평양 역전 2실분에서 청동반지가 발견되었다. 팔찌는 〈삼국사기〉 온달전(溫達傳)에 공주가 팔찌 10개를 가졌다는 기록이 보이며, 용강군 후산리 내동 4호분에서 발견된 은팔찌와 봉화군 1호분에서 발견된 청동팔찌가 있다. 허리띠[銙帶 : 銙板·鉸具]는 대성산(大聖山) 식물원구역 15호분에서 띠고리[鉸具]가, 지안 토성산(土聖山) 96호분에서 과판이 발견되었다.

이밖에 강서군 보림리 대동 5호분에서 은동곳과 비녀가 출토되었다.

백제의 시조는 고구려 왕족에서 파생되었고 〈양서 梁書〉 제이전(諸夷傳) 백제조(百濟條)에 복장이 고구려와 같다는 기록이 있듯이 백제의 장신구류는 고구려와 유사하지만 실제로 현존하는 장신구류는 많지 않았다. 관모로는 나주(羅州) 반남면 신촌리(新村里) 9호분 을관(乙棺)과 익산(益山) 입점리(笠店里)에서는 금동관이, 무령왕릉(武寧王陵)에서는 순금제 관장식이 왕과 왕비의 머리 부근에서 1쌍씩 발견되었으며, 남원(南原) 이백면(二白面) 척문리(尺門里), 나주 덕전리(德典里), 부여(扶餘) 하황리(下黃里), 논산(論山) 육곡리(六谷里) 고분에서 은제관장식이 발견되었는데 그 도안은 매우 간결하다.

또한 무령왕릉에서는 순금제 뒤꽂이가, 부여군 규암면 함양리에서는 은제 비녀가 발견되었다.

귀걸이는 고리 하나로 이루어진 소환식(素環式) 귀걸이가 송산리(宋山里) 8호분과 우금리(牛禁里) 1호분 등에서 발견되었다. 고리·중간식(中間飾)·수하식(垂下飾)의 3부분으로 된 것은 송산리 고분과 무령왕릉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으나 신라와 가야의 귀걸이에 비해 매우 간결하다.

목걸이는 무령왕릉에서 금제봉절쇄상(金製棒節鎖狀) 목걸이 2개,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는 옥류를 연결한 목걸이 이외에 동·금동·비취·수정·유리·호박·옥 등의 재료를 연결하여 만든 것도 있다. 팔찌는 무령왕릉에서 금은제 팔찌, 대안리 9호분 경관(庚棺)에서 구리팔찌가 나왔다. 반지패용은 유행하지 않았는지 유물의 종류와 양이 매우 많은 무령왕릉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으며, 공주 금학리(金鶴里) 고분에서 구리 반지가 출토되었을 뿐이다. 띠고리는 가죽이나 천으로 된 허리띠에 붙인 장식품으로 무령왕릉, 송산리 2호분, 대안리 9호분 기경관(己庚棺) 등에서 출토되었다.

신은 장식적인 의미보다 주술적인 면이 강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무령왕릉, 신촌리 9호분 을광 등에서 발견되었다.

신라의 장신구류는 매우 화려하고 섬세하며 순금의 누금세공(鏤金細工) 기법이 뛰어났다. 관모 가운데 금관은 위엄과 조화미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공예적인 기술, 내면적인 의장(意匠)의 깊이를 느끼게 해준다. 시원적인 형태인 경주 교동(校洞) 금관(金冠)을 비롯하여 녹각형(鹿角形)과 수지형(樹枝形) 입식(立飾)을 배치하고 달개[瓔珞] 또는 곱은옥을 달거나 관의 둘레 양쪽에 수식을 늘어뜨린 천마총 금관과 황남대총(皇南大塚) 북분의 금관 등이 있고, 형태는 유사하나 재료가 금동인 황남대총 남분 금동관 등이 있다.

천마총 출토 금모와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은관은 양 측면의 입식이 가위로 오려 찢어진 새의 깃털 모양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식은 가야의 의성(義城) 탑리(塔里) 고분에서도 출토되어 양국간의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새의 깃을 날려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낸다고 되어 있으므로 시베리아와 대륙지방의 샤머니즘적 조류숭배사상과도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 남분 등에서 출토된 금제새날개모양관장식[金製鳥翼形冠飾]이나 황남대총 북분의 금제관장식에 안상(眼象)을 타출(打出)시킨 것은 고대인들의 주술적인 사시(邪視)와도 깊은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귀걸이는 소환식·세환식(細環式)·태환식(太環式) 등이 있는데 경주 보문동 부부총(夫婦塚)에서 출토된 금제태환식은 세공기술을 가장 잘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목걸이는 백옥·청옥·적옥·수정·비취·유리·마노(瑪瑙:석영의 한 가지) 등과 금·은을 연결한 것이 있는데, 특히 황남대총 북분의 곱은옥장식 유리구슬 목걸이와 남분의 금제 곱은옥장식 목걸이가 대표적인 예이다. 팔찌는 천마총의 금팔찌, 경주 노서동(路西洞) 고분의 금제 용무늬 팔찌, 서봉총(瑞鳳塚)의 유리팔찌를 들 수 있다.

반지는 금령총(金鈴塚)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출토되었다. 대금구(帶金具)는 황남대총 북분과 서봉총·금관총·천마총의 허리띠와 띠드리개가 유명하다. 신발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었으나 식리총(飾履塚) 금동신은 밑판과 옆판에 구갑상(龜甲狀)의 연속 구획 안에 불꽃무늬·창룡(蒼龍)·괴수(怪獸)·조신(鳥身)·봉황(鳳凰)·인면(人面) 등을 시문하여 현존하는 신발 가운데 도안이나 세공기법이 가장 우수하다.

가야의 장신구는 신라와 유사하며 제작기법도 신라에 버금갔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도 금관부터 신발까지 많은 유물이 알려지고 있는데, 관의 형태는 신라관과 유사한 것도 있지만 입식의 형태를 간소화하거나 변형시킨 듯하다. 고령(高靈)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금관에는 4개의 초화형(草花形) 입식만이 있다. 지산동(池山洞) 32호분 금동관, 부산 복천동(福泉洞) 11호분 금동관, 의성 탑리고분 금동관 등은 전혀 형태가 다른 가야의 독특한 형식을 보여준다. 귀걸이는 수하식이 신라의 심엽형(心葉形)과 비슷한 것도 있으나 펜촉형 등 특이한 것도 있다.

이밖에 목걸이·반지·팔찌·띠장식·신발 등은 신라의 것과 거의 비슷하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신라의 복식제도를 답습한 숭불(崇佛)사회였으나 송과의 사신왕래에 의한 영향, 거란과의 50여 년 간 국교유지, 특히 약 30년간의 몽골 침략으로 충렬·충선·충숙·충혜·공민왕 등이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궁중에서는 몽골의 복식의관을 착용하게 되었고, 장신구류들도 그들의 영향을 받았다.

따라서 금·은·동·철 등과 같은 재료로 대금구·팔찌·비녀 등을 만들었고, 투각기법으로 동물·식물의 도안과 길상무늬를 정교하게 만드는 세공술이 발달했다. 그러나 현존 유품은 많지 않은 편이다.

조선시대

유교적인 관료사회로 양반계급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장신구를 했으나 신분에 따라 장신구의 재료가 달랐다(사회적 지위). 이 시대에는 여인들이 길상무늬를 수(繡)로 놓는 것이 유행했다.

여성은 신분에 따라 금·은·백동·놋·진주·비취·산호·옥·뿔·뼈·나무·대나무로 된 각종 비녀·첩지·떨잠·뒤꽂이를 사용했으나 귀걸이는 흔히 사용하지 않았다. 반지는 보편화되어 각종 재료로 만들어 끼었고 다양한 재료로 패물(佩物)을 만들어 사용했는데, 여러 가지 색실을 연결한 노리개[單作:三作]와 향낭(香囊)·향갑(香匣)·주머니·장도(粧刀)와 다종다양(多種多樣)한 단추가 있었다.

남자용으로는 관자(貫子)·풍잠(風簪)·동곳·다회대(多繪帶)·단추·향낭·선추(扇錘)·안경주머니 같은 것이 널리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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