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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경주평야에 있던 6개 씨족집단의 연합으로 발족된 신라는 주위의 여러 소국들을 망라하여 연맹왕국을 형성했다. 법흥왕 때부터 태종무열왕의 즉위 때까지 신라는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완성하고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장했다. 이때 국호를 신라로 정했으며, 마립간 대신 중국식 왕호가 사용되었고 중국과의 교섭이 다시 회복되었다. 법흥왕은 불교를 공인하여 통일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이후 건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신라는 진흥왕 때 정복사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했으나, 고구려와 백제는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신라는 삼국통일 뒤 한반도의 주인공으로 군림하다가 935년 고려에 스스로 항복했다.
고구려·백제를 멸망시켜 삼국을 통일한 뒤 한반도의 주인공으로 군림하다가 935년 고려에 스스로 항복했다. 국호는 503년(지증마립간 4)에 신라로 확정될 때까지 '사로'·'사라'·'서라벌'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었는데, 이는 새로운 땅, 해 뜨는 동쪽 나라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삼국통일 이전의 신라
개요
신라의 역사는 크게 삼국통일 이전과 이후로 구분된다.
〈삼국사기〉는 신라의 전(全)역사를 3시기로 구분하여 통일 이전을 상대(上代), 통일기는 중대(中代)와 하대(下代)로 나누었다. 반면 〈삼국유사〉는 통일 이전을 상고(上古)와 중고(中古)로 나누고 통일기를 하고(下古)로 잡았는데, 이는 왕실 혈통상의 변화 또는 불교의 공인과 같은 특정한 사실을 기준으로 구분한 데 불과하다. 신라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한국사의 발전단계에 맞추어 시기를 구분한다면 통일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통일 이전의 신라는 진한 12개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의 탄생부터 7세기 중엽까지의 장구한 기간인데, 이는 편의상 3시기로 나누어 파악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성읍국가에서 연맹왕국으로
신라도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성읍국가로 출발했다.
역사서에는 건국 연대를 BC 57년이라 했으나, 경주 일대의 여러 가지 고고학적 자료로 미루어볼 때 성읍국가로서의 출발은 이보다 조금 빨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는 경주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6개 씨족집단의 연합에 의해서 발족되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혁거세(赫居世)가 최초의 지배자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신라는 연합 형식에 의해서 또는 군사적인 정복을 통해서 차츰 주위의 여러 소국들을 망라하여 연맹왕국을 형성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몇 차례 지배층이 바뀐 듯하다.
또한 신라가 비록 연맹왕국의 맹주가 되었다고 해도 주변의 소국들에 대한 지배·복속의 정도는 매우 미약했다. 각 성읍국가들은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신라는 중국 군현 당국과의 정치적 교섭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이같은 상태는 적어도 3세기말경까지는 지속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4세기에 들어와 신라를 포함한 낙동강 동쪽의 진한사회는 새로운 국제관계의 변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고구려가 낙랑·대방 2군을 멸망시키면서 한반도 중부지역으로 세력을 뻗치게 됨에 따라 이에 위협을 느낀 마한의 여러 나라가 백제를 중심으로 하여 활발하게 통합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신라는 소백산맥 너머의 이러한 정세 변화에 적극 대응하면서 선두에 서서 진한 사회를 통합해나갔다.
연맹왕국에서 중앙집권국가로
4세기 중엽에 이르면 신라는 종래의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우선 박·석·김 3성에 의해서 교체되어온 왕위가 김씨에 의해서 독점적으로 세습되기 시작했으며 왕위의 부자(父子) 상속제도가 확립되었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안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또한 내물(356~402 재위)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왕호로서의 '마립간'(麻立干) 칭호는 정청(政廳)의 지배자 또는 으뜸 가는 지배자의 뜻으로 해석되어 왕권이 크게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는 내물마립간 때인 377, 382년 2차례에 걸쳐서 중국 북조의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냈는데, 특히 382년 사신으로 간 위두(衛頭)와 전진왕 간의 문답에서 이미 종전의 신라가 아님을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신라를 둘러싼 국제관계는 매우 복잡했다. 초기에는 백제의 군사적 압력이 격심하여 고구려의 군사원조를 받아 백제군을 격퇴했다. 이 사실은 유명한 광개토왕릉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 고구려의 군사원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라의 자주적 발전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했다. 특히 427년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남하정책을 노골적으로 추진하자 신라는 적대관계를 지속해왔던 백제와 손잡고 고구려에 대항했다.
이같은 백제와의 동맹관계는 550년대까지 120여 년 간 계속되었다. 이 시기에 신라는 줄곧 내부체제 정비에 힘을 쏟았다. 5세기에 신라가 꾸준히 국력을 강화해간 것은 현재 남아 있는 이 시기의 대형 고분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최근 경주 북방 영일군 신광면 냉수리(冷水里)에서 발견된 503년(지증마립간 4)의 비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신라 국왕은 결코 여러 부족장 위에 군림하는 초월적인 존재는 아니었으며, 다만 5부 귀족집단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다.
중앙집권국가의 완성
법흥왕(514~540 재위) 때부터 태종무열왕이 즉위(654)하게 될 때까지의 기간은 〈삼국유사〉의 저자가 '중고'(中古)라는 하나의 독자적인 시대로 설정하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신라사에서 볼 때 매우 특징 있는 시대였다.
신라는 이 시기에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를 완성하는 한편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장했다.
이 새로운 시대의 단서를 연 것은 법흥왕의 부왕인 지증왕(500~514 재위)이었다. 이때 국호가 신라로 확정되었으며, 마립간 대신 중국식의 왕호(王號)가 사용되었고, 지방통치제도로 주군(州郡)이 채택되었다. 또한 502, 508년 2차례에 걸쳐 중국 북조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어 120년간 끊어졌던 중국과의 교섭이 다시 회복되었다. 법흥왕 때는 이처럼 다져진 토대 위에서 율령을 반포하고(520), 병부 등 주요관청을 설치하며(516~517), 상대등(上大等)으로 대표되는 귀족회의를 제도화하는(513) 등 전반적으로 국가체제를 법제화·조직화했다.
또한 이때 불교를 공인하여 국가의 통일을 위한 사상적 뒷받침을 얻게 되었다. 이같은 일련의 획기적인 조처가 있은 뒤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는데(536), 이는 대외적으로 중국과 대등한 나라라는 자각을 나타낸 것으로 주목된다. 이처럼 국가토대가 다져진 기반 위에서 진흥왕(540~576 재위) 때부터 정복전쟁을 활발히 추진해나갔다.
이미 법흥왕 때 신라는 김해에 위치한 본가야(本加耶 : 금관가야)를 정복하여(532) 가야연맹을 위협하고 있었는데, 진흥왕 때에 이르러서 가야 여러 나라를 잇달아 정복하여 마침내 가야세력의 맹주인 고령의 대가야를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562). 이로써 신라는 낙동강유역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신라는 가야 정복과 병행하여 한강유역에도 손을 뻗쳤다. 즉 진흥왕은 백제와 공동작전을 펴서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 상류지방을 점령(551)했다가 다시 백제군이 수복한 지 얼마 안 되는 한강 하류지역을 기습 공격하여 결국 한강유역 전부를 독차지했다(553). 신라의 한강유역 점령은 이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을 얻은 것 외에도 서해를 거쳐 직접 중국과 통할 수 있는 발판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뜻 깊은 것이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한편으로는 대중국 외교의 성공에 크게 힘입었던 것을 생각할 때 한강유역 점령이야말로 통일사업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흥왕 때의 눈부신 정복사업은 현재 각지에 남아 있는 4개의 순수비가 말해주고 있다. 진흥왕 이후 신라는 삼국통일을 달성할 때까지 이처럼 확대된 영토를 지키는 데 모든 국력을 쏟았다.
진평왕(579~632 재위) 때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끈질긴 국경 침범에 성공적으로 대처하면서 국내의 지배체제를 견고하게 다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은 선덕왕(632~647) 때는 위기상황의 연속이었다. 특히 642년에 신라의 위기는 최고조에 달해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으로 한강유역 방면의 일대 거점인 당항성(黨項城:지금의 경기 화성시 남양)이 함락 직전의 위기에 놓였으며, 낙동강 방면의 요새인 대야성(大耶城:지금의 경남 합천)은 백제군에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신라는 당(唐)과의 외교를 강화함으로써 위기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이러한 국난기에 신라의 지배층은 한때 분열하여 상대등 비담(毗曇) 일파의 반란이 일어나기까지 했다(647). 하지만 이 반란은 김춘추와 김유신의 연합세력에 의해 진압되었고, 이들에 의해서 옹립된 진덕왕(647~654 재위) 때 야심적인 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김춘추는 654년 진덕왕이 죽자 즉위하여 태종무열왕이 되었는데, 이때부터 신라는 삼국통일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제도
골품제도
골품제도는 신라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병합된 여러 성읍국가의 지배층을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 속에 편입하여 정비할 때 그 등급을 매기기 위한 하나의 원리로서 제정된 것이다. 골품제도는 처음에 왕족을 대상으로 하는 골제와 수도 안의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가 별개의 체제를 이루고 있었는데, 법흥왕 때 하나의 체계로 통합되었다. 그결과 골품제도는 성골과 진골이라는 2개의 골(骨)과 6두품으로부터 1두품에 이르는 6개의 두품을 합쳐 모두 8개의 신분계층으로 나누어졌다. 이 가운데 성골은 김씨 왕족 가운데에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소멸되었고, 태종무열왕 이후에는 진골 출신이 왕위에 올랐다. 골품제도는 개인의 정치적인 출세, 혼인, 가옥의 크기, 의복의 색깔, 우마차의 장식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이 가해지는 세습적인 신분제도였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규정은 정치적 진출에 대한 것으로, 중앙의 중요관청의 장관직이나 주요군부대의 장군직은 진골이 아니면 취임할 수 없었다.
골품 | 관등 (경위) | 관등(외위) | |||||
진골 | 6두품 | 5두품 | 4두품 | 등급 | 명칭 | 등급 | 명칭 |
1 | 이벌찬 | ||||||
2 | 이척찬 | ||||||
3 | 잡찬 | ||||||
4 | 파진찬 | ||||||
5 | 대아찬 | ||||||
6 | 아찬 | ||||||
7 | 일길찬 | 1 | 악간 | ||||
8 | 사찬 | 2 | 술간 | ||||
9 | 급벌찬 | 3 | 고간 | ||||
10 | 대나마 | 4 | 귀간 | ||||
11 | 나마 | 5 | 찬간 | ||||
12 | 대사 | 6 | 상간 | ||||
13 | 사지 | 7 | 간 | ||||
14 | 길사 | 8 | 일벌 | ||||
15 | 대오 | 9 | 일척 | ||||
16 | 소오 | 10 | 피일 | ||||
17 | 조위 | 11 | 아척 |
정치제도
신라의 정치제도는 삼국통일 직후인 신문왕 때 최종적인 완성을 보이지만, 그 연원은 연맹왕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의 관직제도는 관등의 규제를 받았는데, 관등제의 원류는 이미 연맹왕국시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법흥왕 때에 이르러 율령공포와 관등제도가 정비되면서 병부 등 주요관청들이 설치되기 시작했다. 그뒤 진흥왕 때를 거쳐 진평왕 때 거의 모든 관청이 설치되면서 관직제도가 일단 완비되었다. 그런데 통일 이전 신라의 정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진골귀족에 의한 합의제적 정치가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이 회의는 화백회의라고 불렸는데, 상대등에 의해서 주재되었고 중대한 국사는 모두 이 회의에서 결정되었다. 다만 651년(진덕여왕 5) 김춘추 일파에 의해 국왕 직속의 관청인 집사부가 설치되면서 화백회의는 지난날의 권위를 계속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지방의 통치조직은 영토확장 과정에서 점령지역의 확보책으로 마련되었다. 505년(지증마립간 6)에 실시된 주군제도는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서 때때로 행정기관의 소재지를 이동할 수 있는 군정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큰 성에 설치한 주의 장관을 군주, 보다 규모가 작은 성에 설치한 군의 장관을 당주라고 했는데, 이는 모두 군대지휘관을 나타내는 명칭이었다. 한편 주군과는 별도로 소경을 설치했는데, 이는 수도를 모방한 특수행정구역으로 그 자체가 정치적·문화적 성격이 강했다.
군사제도
신라 군사제도의 원류는 연맹왕국시대에서 찾을 수 있다. 처음에는 수도에 거주하는 6부의 소속원을 징발하여 군대로 편성했으나, 6세기에 들어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 발전함에 따라서 국왕의 지휘 아래에 전국적인 군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이같은 군사제도는 544년(진흥왕 5)의 대당 편성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하여 삼국통일 전에 신라 군사력의 기본이 되는 6정 군단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군사제도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화랑도라고 할 수 있다. 화랑도는 최초로 정규부대의 보충을 위한 목적에서 제정되었으나, 단순한 군사조직은 아니었으며 뒷날 신라 무사도의 귀감으로서 시대정신을 이끌어간 독특한 청소년 수련단체였다.
경제제도와 수공업·상업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경제제도에 대해서는 기록이 매우 불충분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먼저 토지제도를 보면, 6세기 이래 중앙집권국가의 성장에 따라서 왕토사상이 대두하여 모든 토지와 국민이 국왕에게 예속되었다(→ 왕토왕신사상). 하지만 모든 토지가 한결같이 국왕에 의해 독점된 것은 아니었으며, 자영농민들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특히 귀족관료들은 그 지위에 따라서 식읍·녹읍 등의 명목으로 많은 토지를 지급받아 이를 지역 주민들에게 경작하게 했다. 또한 국가는 농민들에게 조세와 공부 및 역역을 부과했다. 6세기경에는 이미 품주가 설치되어 농민들로부터 조세를 받아 국가재정을 관리하게 했고, 584년(진평왕 6)에는 공부를 담당하는 조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토지에 대한 지배 이상으로 농민의 노동력에 대한 지배에 더 관심이 컸었다. 대체로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일정한 기간 방수나 축성 등의 역역에 동원했는데, 경상북도 영천에서 발견된 청제비나 경주 남산에서 발견된 신성비를 보면 당시 노동력의 동원 및 편성 방식의 한 면을 짐작할 수 있다. 통일 이전에는 수공업·상업도 발달했다. 수공업은 최초로 농민들이 자신에게 필요한 각종 물품을 생산하기 위해 가내수공업의 형태를 띠고 발달했는데, 뒤에는 왕실에서 경영하는 관영공장에서 필요한 물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하게 되었다. 한편 수공업의 발달에 따라 공영시장이 출현했다. 490년 서울에 시장이 설치되어 사방의 물자가 유통되기 시작했는데, 509년(지증마립간 10) 시장을 관리·감독하는 관청으로 동시전이 설치된 것을 보면 상업도 국가의 통제하에서 차츰 발달하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학문과 종교
한문학과 유교
신라의 문화는 고유한 전통문화의 바탕 위에 중국 문화를 가미한 점이 특색이었다.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한 6세기 이래 지배층은 중국 문화를 환영하여 받아들였으나, 외래문화를 그대로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자신들의 생활과 기호에 알맞는 것으로 만들어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는 특히 한자의 사용에서 잘 나타나고 있는데, 이두[吏讀]라는 독특한 차자(借字) 표기법을 창안한 것만 보더라도 잘 알 수 있다.
한문이 사용됨에 따라서 자연히 한문학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진흥왕 순수비문은 6세기 중엽 신라의 한문 수준을 대표하고 있다. 또한 한자의 사용과 더불어 545년(진흥왕 6)에는 이사부(伊斯夫)와 거칠부가 중심이 되어 국사를 편찬했는데, 이는 유교적인 정치이상에 입각하여 왕자(王者)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미 6세기경부터 유교는 귀족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사회도덕으로서 중시되었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유교교육을 담당하는 학교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으나, 화랑도가 청소년층의 도덕교육에 큰 구실을 담당했다.
불교와 도가사상
이 시기 신라의 국가 이데올로기의 구실을 담당한 것은 불교였다. 불교는 5세기 전반경 고구려를 통해서 민간에 전해졌으나, 법흥왕 때에 공인을 받을 때까지 박해가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불교는 일단 공인을 받게 되자 호국신앙으로서 크게 유행했다.
호국의 도량으로서 황룡사 같은 큰 사찰이 만들어졌고, 이곳에서 백좌강회(百座講會)나 팔관회 등 호국적인 행사가 베풀어졌다. 당시 유명한 승려들 중에는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원광이나 자장 등이 있었다. 한편 민간에서는 도가사상이 장생불사(長生不死)의 신선사상의 형태를 띠고서 발달했다. 산악숭배사상은 이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경주 서악(西嶽)의 선도산 성모(聖母) 전설은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과학기술
과학기술 분야에서는 농업과 정치의 두 부분에 관련이 깊은 천문학이 발달했다.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경주 첨성대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천문대로서 천체 관측에 대한 관심과 아울러 당시 과학기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주로 5세기경의 왕릉급 고분에서 나오고 있는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은(金銀) 세공품은 신라가 금속·야금 및 세공 방면에서 성취한 높은 기술수준을 말해주며, 유리구슬과 유리그릇이 나오는 것으로 미루어 독자적으로 유리를 만들어 썼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삼국통일 이전 신라의 문학과 예술
시가와 음악·무용
신라시대의 문학은 크게 설화문학과 시가문학으로 나누어진다. 설화문학에는 왕자 우로나 박제상 등과 관련되는 사화들이 유명하며, 시가문학에는 민요·향가 등 다양한 편이다.
민요풍을 띠는 시가로서는 서동요와 풍요가 있다. 이같은 시가문학은 불교의 영향을 받아 향가로 발전했는데, 통일기에 들어가면 이는 크게 융성했다. 시가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음악은 종교적 성격이 농후했다.
6세기 중엽 대가야 출신의 우륵에 의해 가야금이 전래되면서 신라의 음악은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우륵은 신라에서 몇몇 제자를 양성했는데, 총 185개의 가야금 악곡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백결선생은 방아타령[碓樂] 지었다고 하는데, 이는 가야금 계통일 것으로 짐작된다. 춤은 음악과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신라시대의 음악은 악기와 노래에 춤이 가미된 일종의 종합예술이었다. 초기에는 풍작을 기원하는 축제 때에 징과 북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추는 요란스러운 군무가 성했는데, 가야금이 전래됨에 따라 한층 더 세련되어갔다.
미술
삼국시대 신라의 미술은 크게 건축·조각·공예·회화 등 몇 분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그 중 건축에 속하는 것으로는 왕릉과 사찰·탑파 등이 있는데, 통일 이전 왕릉은 대개 평지에 구덩식 돌무지덧널무덤[竪穴式積石木槨墳]을 만들었다. 통일 이전에도 적지 않은 사찰이 건립되었으나, 현재에는 모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최근 본격적으로 행해진 황룡사 터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통일 이전 사찰의 가람 배치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탑파 역시 통일 이전의 것은 남아 있지 않으나, 선덕여왕 때의 황룡사 9층탑에서 볼 수 있듯이 목탑이 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각분야에서는 불상과 각종 석조물이 있다. 통일 이전의 불상으로는 분황사탑에 조각된 인왕상을 비롯한 몇몇 석불이 주목된다. 또한 국보로 지정된 보관을 쓴 각기 2점의 금동미륵반가상은 국적이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조각가로는 승려 양지가 유명한데, 그는 많은 불상과 기와를 만들었다.
공예작품은 크게 금속공예품·도기·토기로 나누어진다. 연맹왕국시대의 왕릉에서 많은 공예품이 나왔는데, 이들 가운데 금관을 비롯한 각종 순금제품·은제품·구리제품 등은 탁월한 솜씨를 보여준다. 또한 도기 및 토기제품도 기종·기형 등이 모두 다양하며 우수한 편이다.
회화에 있어서는 왕릉의 구조상 널방[玄室]을 갖고 있지 않으므로 고구려나 백제에서처럼 벽화를 남길 수 없었다. 다만 천마총에서 마구의 다래[障泥]에 그려진 천마도가 출토되었고, 그밖에 기마인물도와 서조도가 발견되어 통일 이전 신라의 그림이 패기에 찬 수준 높은 것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통일기
통일기의 신라
신라는 진흥왕 때 정복사업을 성공적으로 달성하여 560년대에는 신라 역사상 최대의 판도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구려와 백제는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서 신라에 대한 보복 공격을 강화하여 신라는 이후 100년 동안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국난기를 겪었다. 그동안 신라는 국가적인 위기에 놓인 적이 여러 차례 있었으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654~661 재위)과 문무왕(文武王:661~681 재위) 때에 이르면서 수세(守勢)에서 공세(攻勢)로 전환하여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했다.
신라는 당(唐)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각기 멸망시켰다.
그러나 두 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해서 삼국통일이 달성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동맹국가였던 당이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한반도 전체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이에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각오하고 당군이 점령하고 있던 옛 백제지역으로 쳐들어가는 한편 고구려 부흥운동군을 포섭하여 당군에 대항하도록 했다. 그결과 신라와 당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결국 신라는 6~7년간에 걸친 당군과의 힘겨운 싸움에서 잇달아 승리하여 마침내 당은 676년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랴오둥[遼東] 지방으로 옮겨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신라는 대체로 대동강 방면에서부터 동해안의 원산만을 연결하는 선 이남의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국경선은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아무런 변동이 없었다.
통일신라시대는 780년을 경계로 하여 크게 2시기로 나누어진다.
즉 〈삼국사기〉에서 말하는 중대(中代)와 하대(下代)가 바로 그것이다. 중대는 태종무열왕이 즉위하여 삼국통일전쟁을 시작하고, 나아가 이를 달성한 때로부터 780년까지를 가리키는데, 신라 역사상 최대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에는 태종무열왕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무열왕계통 시대라고 부르며, 한편 권력구조상으로 보면 그 이전 시기와는 달리 왕권이 크게 강화된 시대였으므로 전제왕권시대라고도 불린다.
특히 문화적으로 볼 때 이 시기는 황금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하대는 780년 혜공왕(惠恭王)이 반란군에 의해 죽은 뒤로부터 신라가 멸망한 935년까지인데, 그동안 20명의 국왕이 바뀌는 등 정치상의 혼란기였다. 이 시기에는 원성왕(元聖王)의 후손들이 왕위를 이어갔으므로 원성왕계통 시대라고도 하며, 한편 원성왕 자신이 내물이사금의 먼 후예임을 표방한 데서 부활 내물왕계통 시대라고도 일컬어진다. 또한 권력구조상으로 보면 진골귀족들이 왕실에 대항하여 서로 연합의 형세를 띠면서도 실제로는 각기 독자적인 사병(私兵) 세력을 거느리고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귀족연립 또는 귀족분열의 시기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시야를 수도에 국한하지 않고 전국적으로 확대해서 본다면, 이 시기는 지방의 호족세력이 크게 대두하고 있던 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신라는 889년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난 뒤 곧이어 호족의 대동란기로 접어들게 되어 50년간에 걸쳐서 극심한 내란기를 겪었다. 이를 후삼국시대라고 부르고 있다. 결국 신라는 935년에 반란국가의 하나인 고려에 스스로 항복함으로써 1,000년 왕국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렇게 본다면 통일신라시대는 오히려 3시기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즉 삼국통일 이후부터 780년까지를 제1기, 780년 이후부터 889년 농민반란 직전까지를 제2기, 889년 이후부터 신라의 멸망시기까지를 제3기로 나누어 검토하는 것이 시대의 특성에 알맞다고 여겨진다.
제1기
이 시기의 특징이라면 왕권이 크게 강화되어 일종의 전제왕권을 구축한 데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는데, 첫째, 태종무열왕과 그 아들 문무왕의 강한 집념에 의해서 삼국통일이 성취됨으로써 왕실의 권위가 크게 높아진 점, 둘째,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광범위하게 중앙귀족들을 제거한 점, 셋째, 중앙정부가 지방 촌주(村主)세력과의 연계를 강화한 점, 넷째, 유교적 정치이념을 도입함으로써 관료제가 발달한 점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 왕권 강화작업을 정력적으로 추진한 것은 신문왕(神文王:681~692 재위)이었다.
그는 상대등(上大等)으로 대표되는 귀족세력을 철저하게 탄압했을 뿐 아니라, 삼국통일에 따라 재편성이 불가피해진 행정·군사 제도를 완성했다. 그리하여 그뒤 성덕왕(聖德王:702~737 재위) 때에는 전제왕권의 극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제왕권에 수반하여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차츰 누적되어갔다.
경덕왕(景德王:742~765 재위) 때는 전제왕권이 갈림길에 선 때였다.
경덕왕은 이른바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통해서 집권체제를 유지하려고 했으나, 이에 대한 진골귀족들의 반발도 만만하지 않아 경덕왕 말년에는 귀족세력에 대한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혜공왕(765~780 재위) 때는 전제왕권의 몰락기였다. 이때 친왕파와 반왕파 사이에 6차례에 걸쳐서 반란과 친위 쿠데타가 일어났다. 특히 768년에 일어난 반란은 전국의 많은 귀족들이 서로 뒤얽혀 싸운 대반란이었다.
결국 780년에 이르러 혜공왕은 김양상(金良相)·김경신(金敬信) 일파에 의해 죽음을 당하여 태종무열왕 계통은 끊어지고 말았다.
제2기
혜공왕이 죽은 뒤 김양상이 즉위하여 선덕왕(宣德王:780~785)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변혁기의 혼란을 진정시킬 겨를도 없이 재위 5년 만에 죽었기 때문에 상대등직에 있던 김경신이 즉위하여 원성왕(元聖王:785~798 재위)이 되었다. 그는 788년 관리등용제도로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제정하는 등 정치개혁에 의욕을 보이기도 했으나, 왕실가족 중심으로 권력을 독점한 결과 진골귀족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그리하여 822년(헌덕왕 14)에는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김헌창(金憲昌)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뒤 흥덕왕(興德王:826~836 재위) 때는 진골귀족의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이를 규제하는 정치개혁이 추진되기도 했다. 그러나 왕이 죽은 뒤 근친왕족들 사이에 왕위계승 쟁탈전이 벌어져 2년 남짓한 기간중에 2명의 국왕과 1명의 국왕 후보자가 희생되었다. 이처럼 진골귀족들이 중앙에서 정쟁에 몰두해 있는 틈을 타서 지방의 호족세력들은 꾸준히 성장하여 차츰 중앙정부를 압도할 만한 역량을 갖추게 되었다.
청해진을 근거로 한 장보고(張保皐)와 같은 해상세력가는 특히 두드러진 존재였다. 그뒤 경문왕(景文王:861~875 재위)·헌강왕(憲康王:875~886 재위) 때는 땅에 떨어진 왕권을 회복하기 위한 줄기찬 노력이 기울여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대세를 만회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결국 889년(진성왕 3) 농민들에게 조세 독촉을 강화한 데 반발하여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제3기
신라정부는 농민반란에 직면하여 이를 진압할 힘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마침내 농민반란이 전개되는 가운데 곳곳에 군웅(群雄)들이 대두하여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는 마비상태에 빠져버렸다. 사실 수도 자체가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하여 896년에는 이른바 적고적(赤袴賊)이 수도의 서부 모량리까지 쳐들어와 약탈을 자행할 정도였다. 그리고 927년에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군대를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와 경애왕(景哀王)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주역은 신라의 중앙정부가 아니라 각 지에 성을 쌓고 사병을 거느리고 있던 군웅들이며, 그중에서도 각기 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부르짖으며 궐기한 견훤과 궁예(弓裔)였다. 신라는 이 두 사람이 서로 필사적인 대결을 벌이고 있는 동안 그 여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918년 궁예를 쓰러뜨린 뒤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이 신라에 대한 친선정책을 꾀하게 됨에 따라 한동안 국가를 연장시킬 수가 있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고려가 후백제에 대하여 군사적인 우위를 확보하게 되자 신라의 경순왕은 더이상 버틸 수 없음을 깨닫고 935년 11월 고려에 자진 항복하여 그 막을 내리고 말았다.
통일기 신라의 정치와 사회
통일신라시대의 정치와 사회를 보면, 통일 이전 시기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골품제도는 전과 다름없이 정치와 사회를 규제하는 대본으로서 작용했다. 정치운영에 있어서도 진골귀족에 의한 합의제도의 전통이 뿌리깊게 남아 있었다. 그러나 행정 및 군사제도만은 통일에 수반하여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즉 중앙의 제1급 행정기관은 중국의 제도를 모방하여 종전의 4단계에서 5단계로 관원조직을 정비했다.
지방행정에 있어서는 전국을 9개의 주(州)로 나눈 다음 그 아래 군(郡)과 현(縣)을 두었고, 특히 지방의 요지에는 5개의 소경(小京)을 설치했다. 또한 군사제도에 있어서는 서울에 9개의 서당(誓幢)을, 지방에는 주마다에 1개의 정(停)을 두었다. 다만 일선지방인 한산주(漢山州)에는 2개의 정을 두어 정은 모두 10개였다. 이 정은 국방의 임무 외에도 지방치안을 담당했다.
이 시기 경제제도에 있어서는 큰 변화가 있었다. 정부는 687년(신문왕 7)에 관료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2년 뒤에는 세조(歲租)를 주는 대신 녹읍을 폐지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이 컸으므로 757년(경덕왕 16)에 녹읍을 부활시켰다. 귀족관료들은 녹읍 경영을 토대로 하여 그 세력을 확대해갔다.
한편 722년(성덕왕 21)에 조정에서는 농민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 정(丁)을 기준으로 하여 나누어준 토지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 나라[奈良]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 촌락문서에 보이는 연수유답(烟受有沓)이 바로 이 정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 경제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수공업과 상업, 그리고 대외무역이다. 수공업은 왕실 및 관청, 귀족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해내는 관영수공업 부문이 특히 발달했다. 수공업의 발달은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켜 695년(효소왕 4)에는 수도에 종전의 동시 외에 서시(西市)와 남시(南市)가 설치되기도 했다. 또한 귀족사회가 번영함에 따라 대외무역도 활발해졌다. 신라와 당 사이에는 공무역 외에도 민간의 사무역이 크게 행해졌는데, 9세기 전반기에는 신라인의 왕래가 잦은 산둥[山東)반도 등지에 신라인의 집단 거주지가 생겨날 정도였다. 또한 이 시기 아라비아의 상인들까지 신라에 와서 교역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통일기 신라의 학문과 종교
통일신라시대의 문화는 삼국시대 문화를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종합하여 민족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데 그 특색이 있다. 한문학 분야에서는 통일신라 초기에 강수와 설총이 활약했는데, 그뒤 김대문(金大問)·최치원(崔致遠)과 같은 대학자가 나타나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국학이 설치된 후 유학에 대한 이해도 한결 깊어졌다. 불교분야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불교의 대중화가 크게 진척되었으며, 불교 교리에 대한 연구도 본궤도에 올라 화엄종·법상종 등의 종파가 성립되기도 했다. 통일신라 초기의 원효는 불교의 대중화와 교학불교의 성장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다만 9세기에 들어와 중국으로부터 선종이 수용되면서 불교계는 큰 변혁을 체험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대에는 도교와 풍수지리설도 유행했다. 신라말의 승려 도선은 풍수지리설의 대가로 알려져 있다. 그밖에 천문학·수학·의학 분야에서도 발전이 있었으며, 특히 인쇄술과 제지술이 발달했다.
통일기 신라의 예술
통일신라시대에는 시가와 음악도 발달했다. 통일 이전에 발생한 향가는 통일기에 들어와 한층 더 발전하여 신라말에 〈삼대목 三代目〉이라는 가요집이 편찬되었다. 음악에 있어서는 고구려 유민들에 의해서 거문고가 전해져서 종래의 가야금과 함께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춤은 중국을 통해서 서역계통의 가면무용이 전해져서 신라 오기가 성립하게 되었다.
미술분야에 있어서도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경덕왕 때 국가적 사업으로 이루어진 불국사는 이 시대 사찰건축을 대표하고 있으며,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 감은사3층석탑, 화엄사사자탑은 당시의 대표적인 석탑들이다. 또한 성덕대왕신종(봉덕사종)은 이 시기 금속공예를 대표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석불사(석굴암)의 불상조각은 이 시기 불교미술을 대표하는 명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조각작품으로는 불상 이외에도 석등·석조·당간지주·비석·호석 등 매우 다양하다.
이 시기 화가로는 황룡사 노송도를 그린 솔거를 비롯하여 김충의(金忠義)·정화·홍계 등 몇 사람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나, 그들의 작품은 하나도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것으로는 755년(경덕왕 14)에 완성된 〈화엄경〉 사경의 불보살상도가 있을 뿐이다. 끝으로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중국으로부터 왕희지체가 전해지면서 서예도 수준이 높아졌는데, 최고의 명필은 8세기에 활약한 김생(金生)이었다. 그의 글씨는 현재 낭공대사비나 글씨첩인 〈전유암첩 田遊巖帖〉을 통해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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