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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9세(1846~78 재위)의 치세
19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사의 많은 부분은 두 교황의 교황직 재위 기간과 일치한다.
그들은 재위 기간이 한 세기의 1/3에 달했던 교황 비오 9세와 그의 계승자로 1/4세기 동안 재위했던 교황 레오 13세이다. 비오 9세만큼 중요한 결정을 내리고 활동을 주관한 교황도 드물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교황의 절대 무류성(無謬性)에 대한 교의가 반포됨으로써 근대 교황권의 발전은 절정에 달했다(교황무류성). '진리의 기둥이자 성채'로서 교회는 신적 계시의 진리로부터 멀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결함이 없고' 심지어 '오류가 없다'는 교리를 가톨릭 교회는 오랫동안 가르쳐왔고, 또한 교회의 가시적인 수장이며 권한을 부여받은 성서의 수호자인 교황은 신앙과 도덕에 대해 오류없이 말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부여받았다고 가르쳐왔다.
이 교의가 반포되기 이전에도 교황 비오는 자신이 부여받은 이 권위를 행사했었다. 1854년 그는 자신의 특권을 행사하여 공의회를 거치지 않고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리를 교회의 공식적 가르침으로 규정했다. 또한 1864년 12월 8일 여러 면에서 논란의 여지가 많은 '오류에 대한 교서요목'(Syllabus of Errors)을 발표했다. 이 교서요목에서 교황은 범신론, 사회주의, 교회를 통하지 않은 결혼, 세속 교육, 종교적 자유주의를 포함한 현대의 다양한 '오류들'을 단죄했다.
따라서 이 교서요목의 반포로 인해 가톨릭교회는 마치 자유주의 물결을 거스르고 현대 세계의 조류에서 퇴각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교서요목은 당시 여러 방면에서 위협을 받고 있던 교회의 입장에서 교회 가르침의 정체를 분명히 하기 위한 하나의 시도였다.
레오 13세(1878~1903 재위)의 치세
레오 13세는 보수적인 신학 성향에서 전임 교황보다 결코 뒤지지 않았지만, 현대사회에서 교회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점이 비오 교황과 다르다.
교리와 가르침에 대한 그의 방침은 엄격했다. 그의 명확한 신학적 관점은 1879년 8월 4일에 반포한 회칙 '영원하신 아버지'(Aeterni Patris)에 드러나 있는데, 이 회칙은 다른 어떤 자료보다도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철학 및 신학 체계로서의 토마스주의(토마스 아퀴나스 사상에 기초한 중세 신학체계)의 부활을 위한 장전(章典)이었다( 〈아이테르니 파트리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교황'이라는 별명을 얻었을 정도로 레오 13세의 정치·사회 사상은 잘 알려져 있다.
교회와 현대 문화의 관계에 대한 레오 교황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회칙들이었다. 이 회칙들은 '오류에 관한 교서요목'의 신학적 전제하에 방어적인 사회철학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사회철학을 명확하게 제시했다. 1888년 6월 20일에 공포된 회칙 '자유'(Libertas)에서 그는 정치적 자유주의, 민주주의, 양심의 자유와 관련해서 무엇이 선인가를 단언하고자 했다.
특히 1891년에 반포된 사회노동문제에 관한 회칙인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에서는 교회가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19세기의 사회주의 정강(政綱)을 거부한 동시에 착취적인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가혹한 비난을 하면서, 국가는 모든 시민의 복지를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했다.
레오 13세의 이러한 사회사상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그리스도교 사회운동' 같은 구체적인 사회활동을 하도록 자극하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19세기가 끝난 직후 레오 교황이 죽었을 때 교회는 여러 방면에서 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자 전쟁·불황·혁명의 소용돌이가 이를 방해했다.
20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 발전은 교회 안팎에서 일어난 2개의 역사적 사건에 의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외적으로는 정치·경제·사회의 대변동을 수반한 2차례의 세계대전(1914~18, 1939~45)이며, 내적으로는 교회의 생활과 가르침에 대변화를 가져온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였다.
세계대전 시기
흔히 19세기를 사실상 마감한 제1차 세계대전은 현대 로마 가톨릭 교회사에서도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전쟁과 이에 따른 혁명으로 인해 호헨졸렌(독일)·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로마노프(러시아) 왕조가 몰락했으며, 교회는 민주주의·공산주의·파시스트 정권이라는 새로운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파시스트인 베니토 무솔리니와 맺은 일련의 협정은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1929년 가톨릭 교회와 이탈리아 정부는 라테란 조약을 맺어 마침내 양측의 관계를 정상화시켰으며, 바티칸 시는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되었다.
1933년 가톨릭 교회는 교회와 소수민족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 강화조약을 체결하려고 시도했으나 성사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교회와 히틀러 정권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비오 11세(1922~39 재위)와 비오 12세(1939~58 재위)는 몇 차례에 걸쳐 히틀러 정권의 부당성을 공박했으나 이를 저지하기 위해 한 일은 별로 없었다. 더욱이 스페인 내란(1936~39) 기간에 교황청은 더욱 격렬하게 공산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비난했다.
폴란드와 헝가리를 비롯해 로마 가톨릭 교회가 깊이 뿌리내린 국가들이 공산화되자 20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많은 관측통은 로마 가톨릭 교회가 20세기 후반에 현대 세계와의 관계에서 본질적으로 방어적 태도를 취할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 요한 23세(1958~63 재위)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는 이러한 결론을 수정하게 만들었다. 교황 요한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몇 건의 중요한 회칙을 공포했다. 그중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1961년에 반포한 회칙 '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인데, 이 회칙은 사회적 행위의 규범으로서 정의와 공동선을 주창한 점에서 레오 13세의 '새로운 사태'라는 회칙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2년 후에 나온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라는 회칙은 교인들뿐 아니라 '선한 의지를 지닌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한 회칙이었다. 이 회칙에서 교황은 다른 어느 역대 교황보다 더욱 체계적으로 인간들 사이의 평화와 국가간의 평화를 위한 사회철학을 정립시켰다. 이러한 개혁과 관여의 정신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구체화되었다. 이 공의회는 요한이 소집했으나 교황은 공의회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 전례에서 자국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하고, 모든 면에서 평신도의 보다 적극적인 참여를 촉진시킴으로써 가톨릭 교회의 생활과 예배에 괄목할 만한 변화를 일으켰다. 이보다 훨씬 더 역사적인 것은 로마 가톨릭 교회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조치일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동방 정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이단자로 비난하던 종래의 태도에서 벗어나 이들에게 형제적인 일치의 손길을 뻗쳤다.
유대인 공동체에 대해서도 화해의 말을 건네면서 과거 그리스도인들의 반유대주의 행각에 대해 유감의 뜻을 밝혔다. 또한 공의회는 세계의 여타 종교에 대해 그리스도를 모르는 그들의 전통 속에 간직되어온 정신적 가치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신자와 비신자 모든 사람들에게는 인간성의 고결함과 자유로움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고,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 강압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배격하는 입장을 천명했다. 교회 발전에 기여한 중요도를 놓고 본다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아마도 니케아(325)·칼케돈(451)·트리엔트(1545~63) 공의회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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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근세기의 로마 가톨릭 교회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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