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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교회의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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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요인

초기 교회라는 보편적 그리스도교로부터 로마 가톨릭 교회가 출현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역사적인 요인이 있다.

교회 내에서 로마 교황의 수위권(首位權) 옹호론자들이 가장 결정적인 것으로 간주해온 요인은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베드로의 수위권과 베드로와 로마 교회의 동일시였다. 사도들에 대해 여러 가지로 열거한 〈신약성서〉의 내용(마태 10:2~5, 마르 3:16~19, 루가 6:14~16, 사도 1:13)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며 필사본에는 더욱 차이가 많지만, 공통적으로 "베드로라고 하는 첫 시몬"(마태오의 표현에서)을 열거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신약성서〉에 보면 그리스도가 제자 베드로에게 "자 들어라,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그리스어로 'petra')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마태 16:18)라고 말했는데,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교회, 즉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설립 강령인 것이다.

로마 교황의 수위권에 대한 논의와 함께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였기에 또한 중요시되었다.

첫째가는 도시의 교회는 모든 교회 중 첫째여야 했기 때문이다. 묘한 것은 새로 개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30년에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여 로마의 권위가 약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특권이었던 대신관(Pontifex Maximus) 직함이 교황에게 위임됨으로써 천도는 오히려 로마의 권위를 강화시켜주었다.

천도는 또한 새 수도가 교황청과 동등한 교회의 권위를 갖는가를 놓고 로마('구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신 로마') 사이에 분쟁을 야기시켰다. 제2차 공의회(381,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제4차 공의회(451, 칼케돈)는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구가 로마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다고 공포했으나 로마 교황청은 이것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칼케돈 공의회).

외적 요인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것 외에 중세 초기에 최소한 2가지 외적 요인이 로마 가톨릭 교회를 하나의 독특한 그리스도교 형태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첫째는 7세기 이슬람교의 융성이었다. 632년 예언자 마호메트 사망 후 한 세기 동안 그의 추종자들은 초기 교회의 5개 총대주교구(Patriarchate) 중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 3개 교구를 점령하고, 동·서 대분열의 양극이 된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만을 남겨놓았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하나의 뚜렷한 실재(實在)로 출현하게 된 2번째 요인은 당시 게르만 민족과 여타 민족이 유럽으로 이주하여 결국에는 그들이 유럽의 주된 인구를 구성하게 된 민족 대이동과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 가톨릭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312년 개종을 하지 않았다면 당시의 형태를 취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가 개종한 결과 그리스도교는 몇 세기만에 로마 제국에서 불법적인 지위에서 벗어나 합법적이고 지배적인 위치를 갖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그리스도교 국가의 통치자는 신앙고백을 해야 했으며 모든 그리스도교 국가의 성격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교회 권력이 교황에게 집중됨으로써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교회 자체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끊임없는 문제거리가 되었다. 교회사의 첫 1,000년이 끝날 무렵, 교회는 지나간 수세기 동안의 정신적·행정적·지적 자원의 상속자가 되어 있었다(로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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