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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3년 7월 29일, 이탈리아 프레다피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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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년 4월 28일, 동고 근처 |
국적 | 이탈리아 |
요약
유럽 최초의 파시스트 지도자로서 이탈리아를 세계대전 속으로 끌어들여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인물이다.
무솔리니는 1883년 7월 프레다피오에서 대장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무솔리니는 자신의 비천한 출생을 내세우며 '인민의 아들'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는 뛰어난 대중연설로 군중을 휘어잡아 최연소 이탈리아 총리에 올랐다. 이후 권위주의 통치를 통해 1인 독재 체제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히틀러와의 동맹관계를 구축하면서 2차세계대전의 늪에 빠졌고, 정부와 함께 사살되었다.
개요
유럽 최초의 파시스트 지도자로서 이탈리아를 세계대전 속으로 끌어들여 엄청난 재앙을 초래한 인물이다(전체주의).
초기생애
베니토 무솔리니는 1883년 7월 프레다피오에서 대장장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무솔리니는 자신의 비천한 출생을 내세우며 '인민의 아들'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지만 국방경비대 중위의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대장간일 틈틈이 사회주의계 언론에 참여하기도 했고 어머니는 교사였으므로 그의 주장만큼 비천한 배경은 아니었다. 그의 가족들은 낡은 팔라초 2층에 마련된 비좁은 방 2칸에서 살았다. 대부분의 시간을 선술집 논쟁으로 소일했던 아버지는 그나마의 수입을 첩에게 탕진하기가 일쑤였으므로 가족의 끼니걱정은 끊이지 않았다.
무솔리니는 반항적이고 다루기 힘들며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 아이였다. 그는 학교에서는 난폭했고 집에 들어와서는 변덕스러웠다. 마을학교의 교사들은 이러한 학생을 감당하지 못하여 파엔차에 있는 엄격한 살레지오회 수도원학교에 보냈으나, 동료학생을 주머니칼로 찌르고 체벌을 가하려던 수사에게 덤벼드는 등 말썽은 계속되었다.
포를림포폴리의 조수에카르두치 학교에 편입한 무솔리니는 또다시 동급생을 공격함으로써 정학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명석했던 무솔리니는 어려움 없이 졸업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고 교사자격증을 취득, 얼마동안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이내 교사직이 적성에 맞지 않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 강인한 턱과 꿰뚫어보는 듯한 검은 눈을 가진 작고 창백한 19세의 무솔리니는 카를 마르크스가 새겨진 니켈메달만을 간직한 채 이탈리아를 떠나 스위스로 갔다.
청년 무솔리니는 이후 몇 달 동안 이일저일을 전전하면서 간신히 연명해갔다.
이무렵 무솔리니의 기묘한 매력과 특출한 말재주는 뭇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일관성 있는 자신의 사상체계를 형성하지는 못했지만 칸트·스피노자·크로포트킨·니체·헤겔·카우츠키·소렐에 심취했던 그는 비범한 인성과 당당한 풍모를 지닌 미래의 혁명가로서 동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후 저널리스트이자 대중연설가로서 명성을 쌓은 무솔리니는 노동조합의 선전운동에 관여해 파업을 주동하고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폭력의 사용을 옹호했으며 거듭 복수의 날이 다가올 것임을 역설했다. 1904년 로마의 일간지들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귀국사실을 일제히 보도했다.
귀국 후 얼마동안 무솔리니의 동정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후 우디네 북쪽 베네치아알프스 지역에서 다시 교사생활을 시작했으나 그것은 스스로가 고백하고 있듯이 '도덕적인 타락의 연속'이었다. 쓸모없는 허송세월에 염증을 느낀 무솔리니는 노동조합운동과 저널리즘 그리고 급진주의 정치노선으로 다시 복귀했으며 체포와 투옥의 나날이 이어졌다. 1909년 자유의 몸이 된 무솔리니는 16세의 라첼레 구이디와 사랑에 빠졌고 포를리의 비좁은 아파트에서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얼마 후 그들은 결혼했는데, 라첼레는 무솔리니 아버지의 정부의 둘째 딸이었다.
결혼 직후 무솔리니는 통산 5번째의 구금생활을 맞이하지만 그무렵 가장 촉망되는 동시에 가장 위험스러운 청년 사회주의자로서 부각되기 시작한다. 수많은 사회주의 일간지의 논객이었던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 〈계급투쟁 La Lotta di Classe〉지를 창간,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마침내 1912년 사회당 기관지 〈전진! Avanti!〉의 편집장으로 위촉되었다. 무솔리니는 〈전진!〉의 발행부수를 2배 이상 끌어올리면서 반군국주의·반제국주의 논조를 통해 이탈리아의 제1차 세계대전 개입을 강력히 저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곧이어 무솔리니의 심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전쟁의 혼란이 사회혁명을 촉발시킬 여건을 조성해주기도 한다는 마르크스의 언명에 마음이 흔들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전주의자를 자처했던 태도를 바꾸어 대뜸 전쟁개입을 옹호하는 논설과 연설문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프랑스가 패배할 경우 유럽의 자유주의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 변명의 요지였다. 무솔리니는 〈전진!〉의 편집장직을 사퇴했고 사회당은 그의 당적을 박탈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지지하는 한 출판업자의 재정지원을 받아 〈이탈리아 인민 Il Popolo d'Italia〉지의 편집을 담당하게 된 무솔리니는 이제 분명하고 뚜렷한 어조로 새로운 철학을 천명하기 시작했다.
"오늘 이후 이탈리아 민족은 단지 이탈리아 민족일 뿐이다. 철과 철이 만나고 우리의 가슴 속에서는 한 가지 외침이 터져 나온다. 이탈리아 만세!" 파시즘의 탄생을 알리는 첫닭이 울고 베니토 무솔리니는 전장으로 달려나갔다.
권력쟁취
베르살리에리(Bersaglieri:저격대)에 복무하던 중 부상을 입은 무솔리니는 확고한 반사회주의자이자 운명론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찍이 1918년 2월 그는 구체제의 악폐들을 완전히 청산해낼 수 있는 단호하고 정력적인 독재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3개월 후 볼로냐의 대중집회에서 자신이 그러한 지도자가 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이듬해 밀라노에서는 무솔리니의 야심을 뒷받침하기 위한 정치조직의 핵심부가 편성되었다. 피아차산세폴크로의 조직사무실에는 공화주의자·무정부주의자·생디칼리스트·사회주의혁명가·퇴역군인을 망라한 200여 명의 인사들이 새로운 정치세력의 구축을 위해 몰려들었고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의 릭토르(권력의 상징인 파시네[fascinae]를 들고 집정관의 앞길을 비키게 함)와 같은 결속력으로 뭉친 전위대라는 의미에서 이 세력을 '전투 파쇼'(Fasci di Combattimento)라고 이름 붙였다.
대중집회에서 무솔리니는 로마냐 무정부주의자들의 검은 셔츠를 일색으로 차려입은 수많은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검은 셔츠단). 당당한 그의 체격은 대단히 인상적이었으며 스타카토로 반복되는 웅변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다.
태도는 연극조로 과장되어 있었고 생각은 모순투성이였으며 인용은 정확하지 못했고 악의에 찬 공격들은 방향이 어긋나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음에도 그가 구사하는 단어들에는 생동감이 넘쳐 흘렀고 은유들은 감탄스러울 만큼 적절한 것이었으며 반복되는 열정적인 제스처는 집회장을 메운 군중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1922년 여름 드디어 무솔리니의 야망을 충족시켜줄 호기가 찾아들었다.
이탈리아 국민 전체가 우려하고 있었던 사회당의 총파업이 개시된 것이다. 무솔리니는 정부당국이 파업을 저지하지 않을 경우 파시스트가 직접 총파업의 분쇄에 나설 것임을 선언했다. 그는 나폴리에 모인 동조자들 앞에서 "우리에게 권력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우리 스스로 로마로 진군해 직접 정권을 인수받을 것이다"라고 공표했고 격앙된 군중들은 일제히 "로마! 로마!"를 외치며 그의 열변에 호응을 보냈다. 청중들은 당장 로마로 행군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늦게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간부들과 회동, 4일 내에 행동대를 로마에 입성시켜 콰드룸비리(Quadrumviri:4개 정당의 지도자 단체)의 병력에 합류시킬 것을 결정했다. 무솔리니는 타협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고 국왕이 서면 소환장을 발하기 전에는 왕국으로 나아갈 생각도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파시스트 동조자들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로마로의 대규모 행군을 시작했다. '로마 진군'은 선전기관에서 보도한 것만큼 질서정연하지는 않았지만 내각을 총사퇴로 이끌기 위한 충분한 위협이 되었다.
파시즘이라는 대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베니토 무솔리니가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조각위촉전문을 띄워보냈다.
독재
최연소 이탈리아 총리(1922. 10. 31)로서 무솔리니가 가졌던 자부심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의 놀랍고도 갑작스러운 성공 이면에는 정치·경제 제반여건의 혜택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 자신의 인성이나 타고난 재능, 날카로운 상황판단과 선동가로서의 탁월한 자질 또한 그의 성공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파시즘의 지도자를 떠나서 이탈리아 전인민의 수장으로 부각되기를 원했던 무솔리니는 광범위한 비파시스트 인사들로 내각을 구성했고, 중앙집권의 의사 또한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그 한해 동안 그는 완전한 독재권력을 창출해냈고 파시스트 당원들이 의회를 장악할 수 있도록 새로운 선거법(Legge Acerbo)을 통과시켰다.
1924년 의심할 여지없는 선거부정이 자행되는 가운데 무솔리니의 1인 독재체제는 확고한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무솔리니의 권위주의 통치방식은 이탈리아 국민들의 환영을 받았다. 끊임없는 파업과 소요 속에서 시달려온 국민들은 파시즘의 현란한 선전기술과 중세풍의 의장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경제가 안정궤도에 오르고 조국이 지난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독재정치에 복종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무솔리니는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다줄 인물로 인식되었다.
기대한 바와 같이 질서가 회복되고 근로조건의 개선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공공사업계획들이 착수되기 시작하자 '일 두체'(Il Duce)는 전인민의 신뢰를 한몸에 받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언론들은 무솔리니를 천재나 초인으로 격찬했다. 짧은 시간에 그가 이룩해놓은 업적들은 마치 기적을 보는 것과도 같았다. 그는 분열과 혼란에 휩싸인 조국을 변혁시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산업가와 지주들의 반발을 초래하지 않은 채 일련의 사회개혁과 공공사업계획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1929년 2월 무솔리니는 교황청과 '라테란 조약'을 체결, 60년에 걸친 교회와 정부의 분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권력의 오만, 진정한 국가이익에 대한 몰이해, 제국에 대한 환상과 같은 것들이 팽창주의적 야심으로 이어지지만 않았더라도 무솔리니는 죽을 때까지 이탈리아의 영웅으로 건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외정복의 야심은 먼저 아비시니아 고원으로 눈길을 돌렸고 10개월간에 걸친 준비와 풍설·위협 그리고 망설임 끝에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 침공이 감행되었다.
유럽 제국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나 이미 일이 진행되어버린 이상 사태를 뒤집어놓을 다른 방책이란 있을 수 없었다. 국제연맹은 제재조치의 하나로 금수품목록을 작성했지만 유럽 전쟁을 유발시킬지도 모를 석유 등의 주요자원들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언젠가 무솔리니는 "만약 연맹이 이탈리아의 석유수입에 제재를 가했더라면 파시스트 군대는 아마도 1주일 내에 아비시니아에서 물러나야 했을 것이다"라고 실토한 바 있었다.
곤혹스런 문제는 더이상 제기되지 않았고 1936년 5월 9일 밤 일 두체는 피아차베네치아 광장에 운집한 40만의 군중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환희에 찬 성명을 발표했다. "파시스트 정권이 수립된 지 14년이 되는 오늘 마침내 위대한 새 시대가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바야흐로 이탈리아는 제국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독일의 히틀러는 무솔리니의 아프리카 원정을 적극 고무했고 이탈리아는 새로운 동맹세력을 발견하게 되었다. 로마와 베를린을 축으로 '강철동맹'이 체결되고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잔인한 동반관계는 그들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어갔다(추축국).
제2차 세계대전
무솔리니는 조국의 안녕을 위해서는 평화유지가 절실히 요구되므로 맹목적으로 독일과 보조를 같이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독일과의 제휴가 손쉽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며 중립을 지킬 경우 이미 확보하고 있는 기득권까지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무솔리니의 사위로 외무장관이었던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은 팔라초베네치아에서의 결말이 나지 않는 오랜 토론과정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처음에 전쟁가입을 반대했던 무솔리니는 명예가 대전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는 종잡을 수 없는 뒷말을 내뱉었다. 총리는 승승장구하는 히틀러의 군대를 침통함과 놀라움 속에서 지켜보았고 새로운 승전보가 전해질 때마다 전의를 굳혀갔으나 독일군이 고삐를 좀 늦추거나 불의의 반격에라도 직면해 어느 정도 숨쉴 여유를 가졌으면 하는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독일이 서부전선을 격파하고 프랑스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놓임에 따라 총리는 더이상 망설이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 정부는 대연합국 선전포고를 발령했고 이것은 큰 실수로 판명된다.
전쟁은 처음부터 이탈리아에 불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군이 최소한의 승리를 거두기도 전에 굴복하고 말았고 히틀러와 회동한 무솔리니는 치아노의 표현을 빌자면 자신의 의견개진이 상담 정도의 가치밖에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몹시 침울해졌다.
무솔리니는 추축국 동맹의 2류 지도자에 불과한 자신의 위상을 받아들여야 했다. 히틀러와 마주할 때마다 이탈리아군의 무력한 패배는 그의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고 한마디 대꾸도 못한 채 과거의 승리와 미래의 계획에 관한 나치 총통의 장황한 연설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더욱이 그를 참을 수 없게 만든 것은 기밀의 누설을 경계한 히틀러가 구체적인 계획들에 대한 언급을 전혀 회피한 채 기정사실만을 거론했던 점이었다. 독일군이 루마니아와 소련에서 기습작전을 전개했을 때 무솔리니는 아무런 사전연락을 받지 못했다.
이탈리아 군대가 한마디 통고도 없이 알바니아를 거쳐 그리스를 침공한 것은 히틀러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앙갚음을 하려는 무솔리니의 무모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일련의 공세는 치욕적인 참패로 끝을 맺었고 독일군은 마지못해 수렁에 빠진 무솔리니를 구출해야 했다. 히틀러는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무솔리니를 위해 병력손실을 감당해야 했고 이제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붕괴 가능성에 대비해 사전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 상륙에 성공했다.
이탈리아 내 제반 정치세력들은 대책수립에 부심하고 있었다. 7월 24일 개전 이후 소집되지 않고 있던 '파시스트 대평의회'가 개최되었고 절대다수의 찬성으로 무솔리니의 총리직을 박탈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투표결과에 개의치 않고 지지자들의 항명사태를 믿으려 하지 않았던 무솔리니는 다음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집무실에 모습을 나타냈으나 그날 오후 국왕을 접견하고 빌라 사보이아를 나서려는 순간 출동한 왕실근위대에 체포되고 만다.
무솔리니는 포차 섬에 이어 사르데냐 해역의 외딴 도서로 그리고 종국에는 아브루치 산맥 그란사소디탈리아의 한 호텔로 유폐되었지만 산기슭에 글라이더를 띄워보낸 독일 특공대의 도움을 받아 뮌헨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무솔리니는 독일에게 이탈리아 전지역의 점령·통치를 용인하는 대신, 북부에 새로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고 치아노를 비롯한 대평의회 반역자들을 처단하자는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살로에 세워진 '이탈리아 사회공화국'(RSI)은 그러나 독일군 사령부의 배후조종을 받는 괴뢰정권에 불과했고 각료 한 사람이 회고했듯이 총리는 다가올 종말도 알지 못한 채 여전히 환상을 꿈꾸며 역사와 그 속에서의 자신의 역할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독일군의 방어선이 무너지고 연합군의 북진이 가속화하자 파르티잔 지도자들은 베니토 무솔리니의 처단을 결의했다. 무솔리니는 장남(둘째 아들은 전사)을 비롯한 여러 측근들의 충고를 무시하고 산악지대에서 최후의 유격전을 펼치기 위해 바텔리나로 향했지만 총리의 추종세력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군 사병으로 변장, 인스부르크로 퇴각하는 트럭 행렬에 몸을 숨긴 무솔리니는 국경 부근에서 파르티잔에게 발각되어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하기를 고집했던 정부 클라레타 페타치와 함께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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