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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후기에서 종교개혁까지의 로마 가톨릭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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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 역사 중 가장 결정적으로 치명상을 입은 시대는 14세기 중엽부터 16세기 중엽까지 2세기 동안이었다.

이 시기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결정적인 분열을 통해 프로테스탄트가 출현하여 그리스도교 지도에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시기였다. 이 시기는 또한 로마 가톨릭 교회가 다른 그리스도교계, 심지어는 서양의 다른 그리스도교계 분파와 구별되는 실체로 등장하게 된 때이기도 했다. 따라서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종교개혁의 결과라는 주장에는 재론의 여지가 많다.

1378~1417년의 시기는 분열의 정도가 비숫했던 1054년의 동서 대분열과 구분하기 위해 서방교회 대분열의 시기라고 일컫는다. 이것은 교황 2명이 서로 상대방과 그 신도들을 파문하여 유럽 교회가 둘로 갈라진 사건이었다. 이들의 갈등으로 인해 제국, 교구, 수도회, 본당, 심지어는 가정까지 분열되었다.

양 교회는 서로 니케아 신조에서 명시한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적인' 교회라고 주장했는데, 실제적 교회의 모습은 둘 다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비웃음만 사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두 교황들간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전체 교회회의를 소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여러 차례 공의회가 열렸는데, 첫번째 회의는 1409년 피사에서 개최되어 교회 분열 문제를 비롯하여 그동안 발생된 규율과 교의에 대한 여러 문제를 다루었다(→ 피사 공의회). 유럽 교회 대분열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8)로서 끝을 맺게 되었다.

콘스탄츠 공의회의 주요의제 중 하나는 서로 대립하는 양 교회와 교황 및 공의회의 권위에 도전한 체코 프라하의 설교가이며 개혁자인 얀 후스(1372~1415)에 대한 것이었다. 1411년 후스는 오늘날 대립교황이라고 부르는 교황 요한 23세(1410~15 재위)에 의해 파문당했으나, 화해의 기운이 무르익으면서 콘스탄츠 공의회에 출두하도록 소환되었으며, 지기스문트황제(1368~1437)는 후스에게 안전통행권을 약속했다. 그러나 황제의 약속과는 달리 후스가 소환에 응해 1414년 11월 콘스탄츠 공의회에 나왔을 때 체포·감금되었다.

그는 특히 교회에 대한 과격한 교리 때문에 이단죄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아 1415년 7월 6일 처형되었다.

중세에서 종교개혁으로 변천하는 과정은 점진적인 것이었으나 14,15세기에 들어서면서 그 방향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스콜라 신학 자체가 경건주의자의 공격을 받았고,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문명의 기초, 즉 그리스와 라틴어 고전, 성서학과 교부학으로 복귀하여 교회를 개혁할 것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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