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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

다른 표기 언어 Nigeria 동의어 나이지리아 연방공화국, Federal Republic of Nigeria
요약 테이블
위치 서부아프리카 대서양연안
인구 229,152,217명 (2024년 추계)
수도 아부자
면적 923,768.0㎢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나이지리아 공화국 (Federal Republic of Nigeria)
기후 사바나기후, 열대우림성기후
민족 구성 하우사족(29%), 요루바족(21%), 이보족
언어 영어
정부/의회형태 연방공화제 / 양원제
종교 이슬람교(50%), 그리스도교(40%), 토착종교
화폐 나이라 (₦)
대륙 아프리카
국가번호 234
GDP USD 408,612,000,000
전압 230V / 50Hz
도메인 .ng

요약 서아프리카 연안 국가들 가운데 가장 큰 나라. 아프리카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 북쪽으로는 니제르, 북동쪽으로는 차드 호, 동쪽으로는 카메룬, 서쪽으로는 베냉과 접해 있다. 건조한 기후부터 적도 주변의 매우 습한 기후까지 다양한 기후대를 가진다. 풍부한 천연자원이 있으며,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상당하다. 요루바·이보·하우사·풀라니·에도·영어를 포함한 수백 개의 언어가 사용된다. 면적 923,768.0㎢, 인구 229,152,217(2024 추계).

나이지리아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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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길이 1,050km, 동서 길이가 1,130km이다. 서아프리카 연안 국가들 가운데 가장 큰 나라이며,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다. 수도는 1990년대 초까지는 라고스였으나, 그뒤 연방 수도권 지역에 위치한 아부자 신도시로 이전되었다.

나이지리아는 서남쪽으로 베냉 만, 동남쪽으로 비아프라 만과 접해 있는데, 이 둘은 모두 기니 만에 속해 있다. 한편 북쪽으로는 니제르, 북동쪽으로는 차드 호, 동쪽으로는 카메룬 그리고 서쪽으로는 베냉과 접해 있다.

나이지리아는 건조한 기후부터 적도 주변의 매우 습한 기후까지 다양한 기후대를 가진다. 하지만 나이지리아가 가진 최고의 다양성은 그 나라 국민들에게서 보여진다. 나이지리아에서는 요루바·이보·하우사·풀라니·에도·이비비오·티브·영어를 포함한 수백 개의 언어가 사용된다. 나이지리아는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진 나라로 특히 석유와 천연가스 매장량이 상당하다.

새로운 수도 아부자는 1976년 법령에 의해 연방 수도권 지역에 만들어졌다. 이전의 수도였던 라고스는 국가 상업·산업을 이끄는 도시로서 그 입지를 유지하고 있다.

오늘날의 나이지리아는 영국의 남북 나이지리아 보호령이 통합된 1914년부터 시작되었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1일 독립했고 1963년 공화국 헌법을 제정했으나 투표에 의해 영연방의 일원으로 남았다. 최초의 공화국은 군부에 의해 전복되었고, 이 군부가 13년 동안 통치했다. 2번째 공화국은 1979~83년에 존속했고 그 이후 다시 군부통치가 15년간 이어졌다.

지도
나이지리아

자연환경

아프리카 대륙고원은 남쪽과 동쪽에서 북쪽과 서쪽 방향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나이지리아는 바로 그 거대한 대륙고원의 아랫부분에 자리잡고 있다. 나이지리아의 지형은 해발 600∼1,200m의 높은 고원지대와 그 사이에 있는 낮은 지대들이 침식된 지표 형태로 나타나며, 그 대부분이 주요 강 유역에 자리잡고 있다. 기니 만을 따라 발달된 해안지대는 완만한 기복을 이루는 평원으로 되어 있다.

서부 및 중북부 지역에는 높은 평원들과 그 사이에 발달된 얕은 계곡들이 넓게 나타나는데, 이들 곳곳에는 둥근 지붕 모양의 수많은 구릉과 길다란 산등성이들이 산재해 있다. 그밖에 특히 눈에 띄는 기복 지형으로는 중부의 조스 고원과 동북부의 비우 고원을 꼽을 수 있으며, 두 고원은 모두 수많은 사화산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광대한 용암지표로 되어 있다. 전국토의 3/5을 이루는 나이저·베누에 강 유역은 나이지리아 수자원의 절대적인 몫을 차지한다. 차드 호 저지의 약 1/10이 나이지리아에 있다. 주요 강은 나이저 강과 나이저 강의 가장 큰 지류인 베누에 강이며, 그밖에 소코토 강, 카두나 강, 공골라 강이 있다. 토양은 고원지대의 결정편암(結晶片巖)과 퇴적암에서 생겨난 침투성이 좋은 홍토(紅土)에서 해안 일대의 모래·습지성 토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대부분의 토양이 다공질이어서 비옥도가 낮은 것이 흠인데, 특히 강우량이 무척 많은 남부지역의 토양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남부 해안 일대의 기온은 32℃를 넘는 일이 드물지만 습도가 매우 높고, 장마철이 거의 1년 내내 계속된다. 내륙지방은 4∼10월이 우기이고 11∼3월이 건기인데, 여름 기온은 38℃를 넘을 때가 많다. 북부지방의 건기는 거의 8개월간 계속되는데, 이때 하마탄(harmatan:열풍)이라는 뜨겁고 먼지가 많은 사하라 사막의 바람이 계속 분다.

평균강우량은 지역에 따라 격차가 심해 해안 일대에서는 1,800∼3,000㎜ 이상이며, 북쪽 국경지대는 약 500㎜이다.

나이지리아의 자연식생 분포는 남에서 북으로 올라가면서 습지대, 열대우림지대, 그리고 나무가 곳곳에 산재한 사바나 지대로 구분된다. 나이지리아에는 침팬지, 고릴라, 아프리카 야생개, 표범, 코끼리, 기린, 사자, 악어, 뱀 등 다양한 야생동물이 살고 있다. 국토의 약 1/3이 경작 가능한 땅이며, 2/5는 목초지로 이용 가능하다.

나이지리아의 석유매장량은 20세기 말 현재 아프리카 총매장량의 거의 1/3에 해당된다. 천연가스 매장량은 아프리카 대륙에 묻힌 천연가스의 거의 1/3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철광석도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나이지리아 카두나 강

High dynamic range (HDR) The Kaduna River in Kaduna Nige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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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위치상 대륙횡단 이주로의 합류점에 놓여 있어, 민족과 문화가 매우 다양하다. 전국에 250여 종족이 살고 있으며, 각각 고유의 관습과 전통, 언어를 갖고 있다. 10대 종족, 즉 하우사·요루바·이보·풀라니·이비비오·카누리·에도·티브·이조·누페족이 나이지리아 전체 인구의 9/10를 차지하고 있다.

인구가 가장 많은 종족은 19세기에 자신들을 정복한 소수의 풀라니족과 융합한 북부의 하우사족으로,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다. 인구가 2번째로 많은 종족은 서남부 지역의 요루바족이며, 동남부 지역의 이보족이 그 다음으로 인구가 많다. 이어 이보족 인근에 사는 이비비오족과 베닌시티의 에도족 순으로 인구가 많다. 나이지리아의 중앙부에는 서로 다른 종족들이 밀집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티브족누페족이 다수를 차지한다.

요루바(Yoruba)족

각 종족은 고유의 언어를 가지고 있다. 그중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언어는 하우사어인데, 이는 하우사·풀라니족이 정치적으로 나이지리아를 장악해 온 데서 기인한다. 그밖에 요루바어·이보어·이비비오어·카누리어·티브어·이조어 등의 순으로 많이 쓰인다. 공식 언어인 영어 외에 수많은 부족언어가 함께 쓰인다. 종교는 이슬람교가 전체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그 외에 그리스도교가 전체의 2/5, 나머지는 토착 종교로 구성된다.

나이지리아의 도시들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가운데 카노·카치나·자리아의 경우 역사가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베닌시티도 16세기 말부터 발달했다. 주요 인구밀집 지역은 중남부의 열대우림지대, 라고스와 포트하커트 사이의 해안 저지, 그리고 북서부지대이다. 반면 광대한 중부지역과 차드 호 저지, 크로스 강 동쪽 유역에는 사실상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나이지리아의 인구 추세는 다른 개발도상국들과 거의 비슷하다. 1950년대 이후 비교적 높은 편에 속했던 유아사망률이 상당히 낮아지고 있기는 하나, 출생률과 사망률은 여전히 높다.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세계에서 제일 높은 수준이며,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도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제일 높은 편이다.

국내 인구이동률이 상당히 높고, 대개 북쪽 지방보다 도시화된 남쪽 지방을 선호한다. 한때 아프리카 서부 이웃 국가들로부터 인구유입이 많아, 나이지리아 정부는 1983년 100만 명 이상의 가나인을 국외로 추방한 데 이어 1984∼1985년에는 국경을 폐쇄하기도 했다. 나이지리아의 인구는 2024년 기준 2억 2,915만 2,217명이고, 인구밀도는 246명/㎢이다. 15세 이하가 전체 인구의 44%를 차지하며, 도시거주자는 인구의 절반을 이루고 있다.

경제

나이지리아는 주로 석유산업과 농업에 기반을 둔 개발도상국형 혼합경제를 이루고 있다. 급속히 진행되던 경제성장은 1980년대 초 나이지리아산 원유 가격이 폭락하면서 주춤해졌다. 그후 나이지리아 정부는 여러 가지 긴축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비석유 부문, 특히 농업·공업 부문에 수출증대 계획을 도입했다.

이밖에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국영기업들의 민영화가 단행되었다. 한편 석유수출 수입의 감소로 1980년대 들어 하강곡선을 그렸던 국민총생산(GNP)이 1980년대 중반부터는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지만 인구의 증가 속도에는 미치지 못해, 1인당 GNP는 대부분의 서아프리카 국가들보다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농업은 국내총생산(GDP)의 2/5를 차지하며 전체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여기에 종사한다. 그러나 농산물 생산은 여러 차례의 가뭄과 정부의 농산물 가격 인하정책, 석유산업 위주의 정책으로 인한 농업 기술의 낙후와 인력 감소 등으로 1960년대 이후 급격히 감소하고 있다. 육류 생산에 있어서는 대체로 자급자족이 가능한 편이나, 주식(옥수수·수수·타로토란·마·카사바·쌀) 생산이 인구증가율을 따라잡지 못해 매년 상당량의 식량을 외국에서 수입한다.

카카오와 고무는 농업 부문에서 유일한 수출 작물이다. 국토의 약 1/8이 숲으로 덮여 있어 삼림 개발 가능성이 높지만, 불법 벌채가 행해지고 있다. 벌목된 목재의 대부분은 연료로 사용된다.

석유생산이 주종을 이루는 공업은 GDP의 약 1/5을 차지하고 있는데, 전체 노동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낮다. 석유 탐사 및 생산은 거의 대부분 나이지리아 남부지역과 기니 만 앞바다에서 진행되고 있다. 나이지리아 석유공사는 모든 대규모 석유회사에 이권을 갖고 있다.

또한 주석과 석회석이 대량 채굴되고 있으며, 천연가스 생산이 개발중에 있다. 제조업은 급속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아직 규모가 작은 저개발 분야로 남아 있다. 제조업의 주종은 섬유산업이지만 밀수품들과의 경쟁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발전시설의 약 4/5는 화력발전소이며, 그 나머지는 수력발전소이다. 발전용량이 전력수요를 따르지 못하고 있다. 서비스업·무역업·수송업은 GDP의 약 1/3를 차지하며, 전체 노동인구의 2/5 가량이 이에 종사하고 있다. 나이지리아는 비교적 광범위한 도로망(거의 절반은 포장도로)을 갖추고 있으며, 주요 항구들도 지난 몇 년 동안 계속 확장되고 현대화되어 왔다. 라고스와 카노에는 국내 및 국제공항이 있다.

국가예산은 주로 석유수출로 생기는 수입에 맞추어 책정된다. 나이지리아는 1981∼85년의 국가개발계획에 따라 농업을 최우선 분야로 지정했는데, 관개사업에 필요한 자금은 주로 국제차관으로 충당되었다. 고유가 시대에는 무역수지가 흑자를 보였으나 유가가 하락하면서 수출이 수입을 밑돌고 있다.

주요수입품은 기계류·화학제품·공산품·식품 등이며, 주요무역상대국은 미국·독일·영국·프랑스·스페인 등이다.

나이지리아의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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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사회

연방공화국 나이지리아의 정치는 연방을 구성하고 있는 지역·종족·종교 간의 고질적인 반목과 이를 배경으로 한 7차례의 군사 쿠데타·부정부패, 인권 유린이라는 질곡을 겪어 왔다.

1979년 나이지리아는 직접선거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국가수반으로서 행정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중심제와 양원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을 채택했다.

무함마두 부하리(Muhammadu Buhari) 대통령

나이지리아 대통령

ⓒ Chatham House / wikipedia | CC BY 2.0

그러나 1983년 12월 모하메드 부하리 소장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후 헌법의 일부가 수정 또는 정지되고, 의회는 최고군사평의회로 대체되었다. 이후 최고군사평의회는 1985년 이브라힘 바방기다의 군사 쿠데타 후 군사통치위원회로, 그리고 1993년에는 국가보안위원회로 대체되었다. 바방기다 정권은 민정이양을 약속했으나, 1993년 6월 다수당이 참가한 가운데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사회민주당 후보 모슈드 아비올라가 58%의 득표로 승리를 거두자 국가보안위원회는 선거를 무효화했다.

그해 11월 사니 아바차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다시 장악하고 모든 정부기관을 해산했다. 군사정권은 모든 정당활동을 금지시키고 최고 권력기관으로 임시통치위원회를 구성했다.

나이지리아의 정치는 1998년 6월 아바차의 갑작스런 사망 후 권력을 승계한 압둘살라미 아부바카르 군참모총장이 민주화 일정을 제시하고, 그에 따라 1999년 2월말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올루세군 오바산조가 승리를 거두고 1999년 5월 그가 이끄는 민간정부가 출범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행정부는 연방정부·주정부·지방정부의 3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1987년까지만 하더라도 지방정부는 주정부의 종속물에 지나지 않았고, 주정부로부터 권한을 침해당하기 일쑤였다. 이러한 상황은 1988년 연방정부가 연방 보조금을 주정부를 통하지 않고 지방정부에 직접 교부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바뀌게 되었다. 이로써 나이지리아 사상 최초로 지방정부가 효과적으로 기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사법제도는 지역마다 편차를 보이는데, 특히 이슬람교도가 많은 북부와 그리스도교도가 많은 남부 사이에서 이 편차가 두드러진다.

현재 관습법과 나이지리아 성문법, 영국법이 통용되고 있다.

관습법은 대개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들이 주재하는 부족 법원(즉 일종의 관습법원)에서 적용되지만, 이슬람 법원인 알칼리 법원의 판사(Alkalis)는 이슬람법에 관한 정규 교육을 받는다. 나이지리아 성문법은 영국 식민지 시절의 법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지금까지 많은 부분에 대한 개정 작업이 이루어졌다.

주의회는 연방정부가 입법권을 장악하고 있는 국방·외교·광업 등의 이른바 '독점 입법 사항'을 제외한 다른 분야에 관한 법률을 통과시킬 수 있다. 연방의회가 제정한 법률과 주의회가 제정한 법률이 서로 배치할 경우 연방법이 우선한다. 나이지리아 성문법 외에 영국법이 하급법원과 모든 고등법원에서 적용된다. 각 주마다 고등법원이 설립되어 있으며, 최고법원은 대법원이다.

국민의 보건위생 상태는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열악한 편이다.

주정부 소관인 공공의료·보건 서비스는 대체로 미흡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대부분의 병원이 충분한 의료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약품 또한 만성적인 부족현상을 보이고 있다. 상당수의 국민이 아직도 말라리아와 각종 수인성 질병, 결핵, 뇌척수막염, 기타 예방 가능한 질병들로 죽어가고 있다. 20세기 말 현재 나이지리아의 평균수명은 남자가 51세, 여자가 54세로 비교적 낮은 수준이다.

공식적으로는 6년간의 의무교육이 실시된다.

초등학교 취학률은 일반초등교육(UPE) 프로그램으로 대변되는 교육개발 정책을 추진한 결과 1970∼80년에 크게 높아졌다. 중등학교 취학률은 여전히 낮은 수준인데, 그것은 중등교육 부문이 UPE 프로그램을 이수한 학생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기술인력과 교사양성을 목적으로 한 종합대학과 단과대학들이 설립되었다.

대부분의 나이지리아 신문은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연방정부나 주정부 소유이며, 몇몇 민간신문은 개인용이거나 당기관지의 성격이 짙다.

그러나 언론·출판의 자유는 나이지리아의 확고한 전통으로서, 정부의 검열 절차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의사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 또한 정부 소유로 되어 있다.

문화

나이지리아는 아랍과 서부 유럽 문화의 영향을 받았거나 나이지리아 토착문화로부터 직접 생겨난 풍부하고도 다양한 문화유산을 지니고 있다. 전통예술은 독립 이후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다. 오요족의 호리병박 조각품과, 베닌시티족·아우카족·이코트족의 가면 및 흑단 나무로 만든 두상, 샤가무족의 가시나무 조각, 나이지리아 풍물을 주제로 한 유화 등이 부유층의 집을 장식하고 있으며, 주민들도 수입품 대신 현지에서 직접 짜고 염색한 옷을 즐겨 입는다.

나이지리아

민속공예품, 나이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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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바단대학교와 이페대학교에 부설된 아프리카학 연구소는 자리아와 이바단에 있는 미술·드라마학교와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민속무용과 시에 대한 관심을 일깨워 이를 널리 알리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전통음악과 무용, 민속 오페라, 약 25개의 언어로 된 소설 등의 이야기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다.

역사

가장 초기의 것으로 확인된 나이지리아의 문화는 노크족의 문화로, 노크족은 나이저 강과 베누에 강이 만나는 조스 고원 북쪽 지역에서 BC 500∼AD 200년경에 번성했던 부족이다.

그뒤 보르누(지금의 보르노)의 카누리족·하우사족·풀라니족이 북부지방으로 이주해왔다. 11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카넴 제국이 차드 호 동서로 팽창해 하우사족 영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13세기에는 북부지역으로 이슬람교가 전파되어 원주민 사회와 종교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4세기 말 무렵에는 카넴 제국의 세력이 약해져 보르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다. 한편 보르누 서쪽에서는 하우사족의 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그중 주요 왕국은 카노·자리아·다우라·카치나 왕국인데, 일찍이 고대부터 존재한 이 왕국들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이거나 상호방위를 위해 연합했다.

이들은 카넴 제국, 수단의 송가이 왕국, 보르누·케비 왕국에 차례로 정복당하면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계속했다.

풀라니족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하우사족의 영토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대부분 유목민이었으나 일부는 도시에 정착해 하우사족과 한데 어울려 살았다. 19세기 초 풀라니족 토후들이 몇몇 지방의 지배자로 임명되었고, 결국에는 서쪽의 간두에서 동쪽의 아다마와에 이르는 풀라니 제국(보르누는 제외)이 탄생했다.

보르누와 하우사 영토 이남에는 요루바 왕국과 베냉 왕국이 있었으며, 이들은 지금의 나이지리아 서부지역과, 지금의 동부지역에 해당하는 이보족의 영토를 지배했다.

포르투갈인들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나이지리아 해안에 상륙한 것은 15세기의 일이었다. 그들은 베냉족을 노예로 잡아갔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영국 노예선들이 나이지리아 해안에 밀어닥쳤다. 대부분의 노예무역은 나이저 강 삼각주와 다른 강 기슭에 사는 여러 종족이나 소수의 족장들을 상대로 행해졌다.

노예들은 대부분 내륙지대에서 붙잡혔다.

1807년 영국은 노예무역을 폐지했으나, 다른 나라 선박들이 대서양을 통해 노예를 실어 나름으로써 계속 그 맥이 이어졌다. 당시 아프리카 서부해안에는 영국 함대가 진주하여 노예무역을 저지했으며, 영국 상선들은 야자유와 기타 생산품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이지리아의 내륙오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 몇몇 유럽 탐험가들에 의해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은 1861년에 라고스를 합병하면서부터 이 지역을 공식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이지리아는 1886년 별개의 영국 식민지로 출발해, 1914년 나이지리아 식민지 및 보호령의 일부가 되었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연방 총리 직선과 형식적인 국가 수반을 골자로 하는 연방헌법을 채택하고 영국에서 독립했으며, 영국연방과 국제연합(UN) 회원국이 되었다. 1963년에는 연방공화국이 되었고, 남디 아지키웨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1962∼63년에 실시된 말썽 많은 인구조사로 해묵은 종족·지역 간의 대립과 지역간 교육적·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문제가 대두했다.

1962년 서부지역에서는 정부가 붕괴했다. 무엇보다도 1964년의 연방선거 거부 사태는 나이지리아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 마침내 1965년 10월의 부정선거로 서부지역이 무정부상태에 빠지고, 일단의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발레와 연방 총리와 주 총리 2명을 살해하면서 연방정부를 전복시키고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정정은 바야흐로 걷잡을 수 없는 혼미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존슨 아귀이 이론시 소장이 이끄는 군사정부는 지역 권력을 해체하고 중앙집권 정책을 시도했으나, 이는 북부지역에서 강력한 반(反)이보족 봉기를 초래했다.

결국 이론시는 1966년 6월 암살되고, 야쿠부 고원 중령(뒤에 장군이 됨)이 권력을 장악했다.

고원 정권은 연방의 헌법상의 장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대표자회의를 소집하려 했으나 1966년에 발생한 종족 대학살로 무산되었다. 하우사족과 이보족 사이의 무력충돌로 하우사족이 대부분인 북부지역에서 이보족 1만∼3만 명이 학살되고, 여기서 살아남은 이보족 100만여 명이 이보족이 지배하는 동부지역으로 도망가는 참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1967년 1월 정국 수습책의 일환으로 오두메구 오주쿠 중령(뒤에 장군이 됨)이 이끄는 동부지역 대표들의 동의하에 중립국인 가나의 아부리에서 전국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으나 합의문에 대한 해석 차이로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해 5월 27일 동부지역 자문회의는 오주쿠에게 동부지역에 '비아프라 공화국'을 수립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 날 연방 군사정부는 기존의 4개 지역(북부·동부·서부·중서부 지역)을 북부 6개 주, 동부 3개 주 등 12개 주로 분할하는 법률을 공포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5월 30일 오주쿠는 동부지역 3개 주의 연방 탈퇴와 비아프라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연방 군사정부는 즉각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첫 교전은 7월 6일 벌어졌다. 비아프라 내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고원 정권은 처음에는 소위 '치안 활동'의 수준으로 대응했으나 몇 주 후부터는 전면전에 나섰다. 그해 8월 비아프라군은 나이저 강을 건너 베닌시티를 함락하고 라고스까지 진격하는 등 승전을 올렸다. 그러나 연방군은 비아프라군을 오레에서 저지하는 한편 에누구로 진격해 이보족의 심장부를 타격했다.

내전이 일어난 지 2년 만에 비아프라는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한 채 완전 고립되었으나 정부군에 완강히 저항했다.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중재도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영국·소련은 연방 군사정권에 무기를 지원했고, 프랑스는 비아프라에 군수물자를 제공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비아프라를 독립국으로 승인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비아프라 어린이들은 굶어 죽어 갔다.

50만 또는 수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를 내면서 2년 6개월 이상 계속된 비아프라 내전은, 1970년 1월 11일 오주쿠가 코트디부아르로 피신하고 1월 15일 비아프라 대표단이 라고스에서 공식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종식되었다.

내전이 끝난 후 고원 정권은 국가 재건 및 국민 재통합 계획을 발표했다.

1974년 고원은 1976년으로 약속한 민정이양 일정을 연기하면서 권력의 유지를 꾀했지만 1975년 7월 무르탈라 모하메드 준장이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한편 무르탈라 모하메드는 1976년 2월 암살되고, 올루세군 오바산조 중장이 권좌에 올랐다.

국가 재건과 국민 재통합의 과제를 떠맡은 오바산조는 1979년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야당 후보 셰후 우스만 알리유 샤가리가 승리해 그해 10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나이지리아 역사상 2번째의 민간정부를 이끈 샤가리는 특히 원유가의 폭락으로 곤경을 겪었으나, 1983년 중반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샤가리 정부는 그해 12월 모하메드 부하리 소장을 주축으로 하는 군사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리고 부하리가 이끄는 군사정권은 1985년 8월 이브라힘 바방기다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20년 만에 6번째 쿠데타임)로 전복되었다.

바방기다가 이끄는 군사정권은 경제개혁에 전념했으며, 1990년대 초까지 권력을 민간정부에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1993년 1월 그는 최고 권력기관인 군사통치위원회를 해산하고, 군부 위주의 국가안보위원회와 민간 각료회의를 포괄하는 과도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그해 6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인 사회민주당 후보 모슈드 아비올라가 당선하자 국가안보위원회는 선거를 무효화했다. 이로 인해 정국이 혼란에 빠진 와중에 바방기다는 권좌에서 물러났고, 그해 11월 사니 아바차 장군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아바차 정권은 스스로를 대통령이라고 선언한 아비올라를 1994년 6월 국가반역죄로 투옥하는 한편, 1995년 11월에는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저명한 극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켄 사로 위와를 비롯한 인권운동가 9명에 대한 교수형을 감행하고, 1997년 3월에는 아프리카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망명 작가 올레 소잉카 등 반정부인사 15명을 반역죄로 기소하는 등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민주화운동을 줄곧 탄압했다.

아바차는 1998년 6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으며, 압둘살람 아부바카르 군참모총장이 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했다.

아부바카르는 '1999년 5월 29일 민정이양'을 골자로 한 민주화 일정을 제시했다. 과거 군사정권하에서 투옥된 정치범들이 석방되기 시작했고, 지방선거(1998. 12)와 주 총리 선거(1999. 1), 총선(1999. 2)이 순조롭게 실시되었다. 이어 1999년 2월말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과거 군사정권의 수반(1976∼79년)을 역임하고 군부독재를 비판해 아바차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은 올루세군 오바산조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이끄는 민간정부가 5월 말 출범함으로써 나이지리아는 군부독재를 청산하는 전기를 맞이했다.

약 30년간의 오랜 군부독재와 짧은 기간의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민간통치가 번갈아 가며 계속되어 온 나이지리아는 20세기 말 현재 정정 불안과 종족·종교 간의 반목 외에, 급속하게 증가하는 인구와 정부의 만성적인 부패, 1970년대 석유수출로 벌어들인 수입을 낭비함으로써 빚어진 과다한 외채 부담, 기대 이하의 경제성장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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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와 한국과의 관계

외교

나이지리아와 한국은 1980년 2월에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한국은 1980년 3월에 주나이지리아대사관, 나이지리아는 1987년 12월에 주한대사관을 설치했다. 양국의 교류는 1981년 1월에 아우두 나이지리아 외무부장관의 방한과 1982년 2월에 노신영 외무부장관의 나이지리아 방문을 계기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국가원수급 교류로는 1982년 8월에 전두환 대통령, 2006년 3월에 노무현 대통령의 방문, 1985년 7월과 2000년 7월의 올루세군 오바산조 대통령의 방한을 꼽을 수 있다. 이후 양국은 장차관급 고위인사의 상호 방문으로 양국간에 돈독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편 나이지리아는 북한과 1976년 6월에 국교를 수립했다. 북한은 1977년 4월에 주 나이지리아 대사관을 개설했으며, 나이지리아는 1988년 1월에  주 북한 나이지리아 대사관을 개설했다. 북한은 1997년 3월에 김영남 외교부장, 2011년 5월에 양형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부위원장이 나이지리아를, 나이지리아는 1997년 8월에 아부바카르 방위참모장이 북한을 방문한 바 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2023년 기준 나이지리아의 대한국 수출액은 8억 648억 달러, 수입액은 5억 3,046억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석유, 천연가스, 구리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광물성 연료, 플라스틱, 알루미늄 등이다. 한국은 2017년 기준으로 총 170억 달러에 해당하는 건설공사를 수주했고, 한국은 나이지리아에 2017년 기준 누계로 2억 9,962만 달러를 투자했으며, 정부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로 1987-2017년 동안 7,097만 달러를 지원했다.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경제과학기술협력협정(1982년 8월), 항공협정(1982년 12월), 이중과세방지협정(1988년 10월), 해운협정(1989년 8월), 체육교류협정(1996년 10월), 투자보장협정(1998년 3월) 등이 있다. 한편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한국 기업의 진출 및 상담을 돕기 위해 요라고스무역관을 설치했으며, 24개의 도매 및 소매업, 건설공사업, 제조업 업체가 진출해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나이지리아에는 한글학교 1개가 설립되어 있어 교민의 한글교육에 이바지하고 있으며 나이지리아 수도 아부자에 2010년 5월에 한국문화원이 설립되어 한국 문화 홍보 및 교류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2010년 9월에 한-나이지리아 수교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나이지리아 아부자문화공연단은 한국의 국립극장에서, 한국의 국립극장 공연단은 나이지리아의 아부자 힐튼호텔에서 공연을 가졌다.

2023년 기준 나이지리아에는 405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에 나이지리아 수도인 아부자와 라고스, 포타코트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23년 기준 2,533명의 나이지리아 국적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나이지리아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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