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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아

다른 표기 언어 Zaria

요약 나이지리아 북부의 자리아를 중심으로 번성했던 옛 왕국.
Zazzau, Zegzoge라고도 함.

자리아(Zaria)

자리아의 국왕의 궁전문

ⓒ Martin H/wikipedia | CC BY-SA 2.0

토후국 시대를 거쳐 지금의 카두나 주의 지방 정부 의회가 있다. 왕국은 BC 11세기 궁구마 왕이 하우사 바콰이(7개의 진정한 하우사족 국가)의 하나로서 건설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우사 바콰이 중에서도 제일 남쪽에 있던 자리아는 노예들을 잡아다 다른 국가에 공급하는 역할을 했으며, 특히 북부에 있는 카노와 캇시나의 노예 시장에 노예들을 공급했다. 사하라에서 온 낙타 대상들은 남쪽으로 내려와 자리아에 도착해 소금을 주고 대신 노예·옷감·가죽·곡식을 가져갔다.

1456년 이슬람교가 들어왔고 16세기초 하우사 국가의 통치자들 중에서는 이슬람교로 개종한 통치자들도 있었다. 송가이 제국의 전사 출신 왕인 무하마드 1세(Muhammad I Askia)는 1512년 무렵 자리아를 정복했고 여행가인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정복의 결과를 기록해놓았다.

6세기말 자리아의 통치자인 아미나 여왕은 여러 차례의 정복 사업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여 누페 왕국과 주쿤 왕국을 병합했다. 강력한 세력을 자랑하던 카노와 캇시나까지도 자리아에 조공을 바쳐야 했다. 그러나 16세기가 끝날 무렵 원래의 명칭인 자자우에서 자리아로 이름을 바꾸고 남동쪽의 이비 근처를 중심으로 주쿤 왕국을 세운 코로로파(크와라라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코로로파가 쇠퇴하자 자리아는 곧바로 북동쪽에 있는 보르누 왕국의 조공국이 되었다(1734경~1804).

1804년 자리아를 다스리던 하우사의 이슬람교도 통치자는 나이지리아 북부에서 대대적으로 '지하드'를 벌이고 있던 풀라니의 이슬람교도 통치자 우스만 단 포디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로 인해 풀라니 출신이 1808년 자리아의 통치자가 되었다. 자리아는 예전의 가신 국가들(케피, 나사라와, 예마, 남쪽의 라파이)을 거느린 채 1835년 토후국이 되었다. 자리아는 지방 토후들과 소코토에 있는 술탄의 대리인이 통치했다.

자리아는 19세기말부터 국운이 쇠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손실은 1899년 비르닌 그와리를 남서부에 있던 토후국인 콘타고라에게 빼앗긴 일이었다. 1901년 자리아는 콘타고라가 노예들을 이용해 공격을 가해오자 영국에 대해 보호를 요청했다. 그러나 1902년 케피에서 지내고 있던 영국군 소속의 멀루니 대위가 자리아의 '마가지'(magaji:대표자)에게 살해되자 영국은 자리아가 거느리고 있던 가신 국가의 대부분을 분리해버렸다. 그러나 자리아는 나이지리아에서 가장 큰(3만 3,000 ㎢) 전통적인 토호국의 하나로 남아 있다.

이곳의 사반나 지역은 나이지리아의 수출품인 목화의 주요 생산지이며, 다른 주요 상품 작물로는 담배, 땅콩, 시어버터나무 열매, 콩, 사탕수수와 생강이 있으며 사탕수수는 이곳에서 직접 가공처리해 흑설탕으로 만들어낸다. 수수·기장·광저기는 기본적인 음식 재료이며 가축, 닭, 염소, 호로호로새 그리고 양을 사육해 육류를 얻는다. 남부에서는 조스플라토 주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는 주석 광산이 오래 전부터 개발되어 채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민들은 여러 종족이 섞여 있으나 이슬람교도인 하우사족과 풀라니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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