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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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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초기의 것으로 확인된 나이지리아의 문화는 노크족의 문화로, 노크족은 나이저 강과 베누에 강이 만나는 조스 고원 북쪽 지역에서 BC 500∼AD 200년경에 번성했던 부족이다.

그뒤 보르누(지금의 보르노)의 카누리족·하우사족·풀라니족이 북부지방으로 이주해왔다. 11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카넴 제국이 차드 호 동서로 팽창해 하우사족 영토의 대부분을 지배했다. 13세기에는 북부지역으로 이슬람교가 전파되어 원주민 사회와 종교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4세기 말 무렵에는 카넴 제국의 세력이 약해져 보르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다. 한편 보르누 서쪽에서는 하우사족의 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다. 그중 주요 왕국은 카노·자리아·다우라·카치나 왕국인데, 일찍이 고대부터 존재한 이 왕국들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이거나 상호방위를 위해 연합했다.

이들은 카넴 제국, 수단의 송가이 왕국, 보르누·케비 왕국에 차례로 정복당하면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며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계속했다.

풀라니족은 오랜 기간에 걸쳐 하우사족의 영토로 이주해왔다. 그들은 대부분 유목민이었으나 일부는 도시에 정착해 하우사족과 한데 어울려 살았다. 19세기 초 풀라니족 토후들이 몇몇 지방의 지배자로 임명되었고, 결국에는 서쪽의 간두에서 동쪽의 아다마와에 이르는 풀라니 제국(보르누는 제외)이 탄생했다.

보르누와 하우사 영토 이남에는 요루바 왕국과 베냉 왕국이 있었으며, 이들은 지금의 나이지리아 서부지역과, 지금의 동부지역에 해당하는 이보족의 영토를 지배했다.

포르투갈인들이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나이지리아 해안에 상륙한 것은 15세기의 일이었다. 그들은 베냉족을 노예로 잡아갔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영국 노예선들이 나이지리아 해안에 밀어닥쳤다. 대부분의 노예무역은 나이저 강 삼각주와 다른 강 기슭에 사는 여러 종족이나 소수의 족장들을 상대로 행해졌다.

노예들은 대부분 내륙지대에서 붙잡혔다.

1807년 영국은 노예무역을 폐지했으나, 다른 나라 선박들이 대서양을 통해 노예를 실어 나름으로써 계속 그 맥이 이어졌다. 당시 아프리카 서부해안에는 영국 함대가 진주하여 노예무역을 저지했으며, 영국 상선들은 야자유와 기타 생산품을 거래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이지리아의 내륙오지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 몇몇 유럽 탐험가들에 의해 서방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은 1861년에 라고스를 합병하면서부터 이 지역을 공식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다.

나이지리아는 1886년 별개의 영국 식민지로 출발해, 1914년 나이지리아 식민지 및 보호령의 일부가 되었다.

나이지리아는 1960년 10월 연방 총리 직선과 형식적인 국가 수반을 골자로 하는 연방헌법을 채택하고 영국에서 독립했으며, 영국연방과 국제연합(UN) 회원국이 되었다. 1963년에는 연방공화국이 되었고, 남디 아지키웨가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1962∼63년에 실시된 말썽 많은 인구조사로 해묵은 종족·지역 간의 대립과 지역간 교육적·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문제가 대두했다.

1962년 서부지역에서는 정부가 붕괴했다. 무엇보다도 1964년의 연방선거 거부 사태는 나이지리아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갔다. 마침내 1965년 10월의 부정선거로 서부지역이 무정부상태에 빠지고, 일단의 군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발레와 연방 총리와 주 총리 2명을 살해하면서 연방정부를 전복시키고 군사정권을 수립했다. 이로써 나이지리아의 정정은 바야흐로 걷잡을 수 없는 혼미상태로 접어들게 되었다.

존슨 아귀이 이론시 소장이 이끄는 군사정부는 지역 권력을 해체하고 중앙집권 정책을 시도했으나, 이는 북부지역에서 강력한 반(反)이보족 봉기를 초래했다.

결국 이론시는 1966년 6월 암살되고, 야쿠부 고원 중령(뒤에 장군이 됨)이 권력을 장악했다.

고원 정권은 연방의 헌법상의 장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국대표자회의를 소집하려 했으나 1966년에 발생한 종족 대학살로 무산되었다. 하우사족과 이보족 사이의 무력충돌로 하우사족이 대부분인 북부지역에서 이보족 1만∼3만 명이 학살되고, 여기서 살아남은 이보족 100만여 명이 이보족이 지배하는 동부지역으로 도망가는 참극이 벌어진 것이었다.

1967년 1월 정국 수습책의 일환으로 오두메구 오주쿠 중령(뒤에 장군이 됨)이 이끄는 동부지역 대표들의 동의하에 중립국인 가나의 아부리에서 전국대표자회의가 개최되었으나 합의문에 대한 해석 차이로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해 5월 27일 동부지역 자문회의는 오주쿠에게 동부지역에 '비아프라 공화국'을 수립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 날 연방 군사정부는 기존의 4개 지역(북부·동부·서부·중서부 지역)을 북부 6개 주, 동부 3개 주 등 12개 주로 분할하는 법률을 공포했다.

그로부터 3일 뒤인 5월 30일 오주쿠는 동부지역 3개 주의 연방 탈퇴와 비아프라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연방 군사정부는 즉각 이를 반란으로 규정했다. 첫 교전은 7월 6일 벌어졌다. 비아프라 내전이 시작된 것이었다.

고원 정권은 처음에는 소위 '치안 활동'의 수준으로 대응했으나 몇 주 후부터는 전면전에 나섰다. 그해 8월 비아프라군은 나이저 강을 건너 베닌시티를 함락하고 라고스까지 진격하는 등 승전을 올렸다. 그러나 연방군은 비아프라군을 오레에서 저지하는 한편 에누구로 진격해 이보족의 심장부를 타격했다.

내전이 일어난 지 2년 만에 비아프라는 대부분의 영토를 상실한 채 완전 고립되었으나 정부군에 완강히 저항했다.

아프리카 통일기구의 중재도 뚜렷한 성과를 얻지 못했다. 영국·소련은 연방 군사정권에 무기를 지원했고, 프랑스는 비아프라에 군수물자를 제공했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비아프라를 독립국으로 승인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비아프라 어린이들은 굶어 죽어 갔다.

50만 또는 수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군인과 민간인 사상자를 내면서 2년 6개월 이상 계속된 비아프라 내전은, 1970년 1월 11일 오주쿠가 코트디부아르로 피신하고 1월 15일 비아프라 대표단이 라고스에서 공식 항복함에 따라 마침내 종식되었다.

내전이 끝난 후 고원 정권은 국가 재건 및 국민 재통합 계획을 발표했다.

1974년 고원은 1976년으로 약속한 민정이양 일정을 연기하면서 권력의 유지를 꾀했지만 1975년 7월 무르탈라 모하메드 준장이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한편 무르탈라 모하메드는 1976년 2월 암살되고, 올루세군 오바산조 중장이 권좌에 올랐다.

국가 재건과 국민 재통합의 과제를 떠맡은 오바산조는 1979년 민정이양을 위한 대통령선거를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야당 후보 셰후 우스만 알리유 샤가리가 승리해 그해 10월 대통령에 취임했다. 나이지리아 역사상 2번째의 민간정부를 이끈 샤가리는 특히 원유가의 폭락으로 곤경을 겪었으나, 1983년 중반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샤가리 정부는 그해 12월 모하메드 부하리 소장을 주축으로 하는 군사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었다. 그리고 부하리가 이끄는 군사정권은 1985년 8월 이브라힘 바방기다가 일으킨 군사 쿠데타(20년 만에 6번째 쿠데타임)로 전복되었다.

바방기다가 이끄는 군사정권은 경제개혁에 전념했으며, 1990년대 초까지 권력을 민간정부에 이양하겠다고 약속했다.

1993년 1월 그는 최고 권력기관인 군사통치위원회를 해산하고, 군부 위주의 국가안보위원회와 민간 각료회의를 포괄하는 과도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그해 6월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인 사회민주당 후보 모슈드 아비올라가 당선하자 국가안보위원회는 선거를 무효화했다. 이로 인해 정국이 혼란에 빠진 와중에 바방기다는 권좌에서 물러났고, 그해 11월 사니 아바차 장군이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아바차 정권은 스스로를 대통령이라고 선언한 아비올라를 1994년 6월 국가반역죄로 투옥하는 한편, 1995년 11월에는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고 저명한 극작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켄 사로 위와를 비롯한 인권운동가 9명에 대한 교수형을 감행하고, 1997년 3월에는 아프리카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망명 작가 올레 소잉카 등 반정부인사 15명을 반역죄로 기소하는 등 민정이양을 거부하고 민주화운동을 줄곧 탄압했다.

아바차는 1998년 6월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으며, 압둘살람 아부바카르 군참모총장이 그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했다.

아부바카르는 '1999년 5월 29일 민정이양'을 골자로 한 민주화 일정을 제시했다. 과거 군사정권하에서 투옥된 정치범들이 석방되기 시작했고, 지방선거(1998. 12)와 주 총리 선거(1999. 1), 총선(1999. 2)이 순조롭게 실시되었다. 이어 1999년 2월말에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는 과거 군사정권의 수반(1976∼79년)을 역임하고 군부독재를 비판해 아바차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은 올루세군 오바산조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가 이끄는 민간정부가 5월 말 출범함으로써 나이지리아는 군부독재를 청산하는 전기를 맞이했다.

약 30년간의 오랜 군부독재와 짧은 기간의 비효율적이고 부패한 민간통치가 번갈아 가며 계속되어 온 나이지리아는 20세기 말 현재 정정 불안과 종족·종교 간의 반목 외에, 급속하게 증가하는 인구와 정부의 만성적인 부패, 1970년대 석유수출로 벌어들인 수입을 낭비함으로써 빚어진 과다한 외채 부담, 기대 이하의 경제성장 등의 문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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