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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이 브리튼 섬에 대대적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중엽부터의 일이었다.
6세기 브리튼의 작가 길더스의 기록에 따르면, 게르만족이 처음 브리튼 섬에 들어온 것은 픽트족과 스콧족의 침입을 막아달라는 브리튼 왕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최초의 용병들은 앵글족·색슨족·주트족 등 세 종족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고고학적인 증거는 실제 양상이 좀더 복잡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처음 이주의 물결에서는 프랑크족이 주도권을 행사했는가 하면 프리슬란트 지방과의 접촉 또한 잦았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잉글랜드 남동부 지방에서는 이들 게르만족 용병들이 브리튼의 주 사람들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켜 해안지대와 강유역에 게르만족의 정착지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진출은 토착민들에 의해서 한동안 저지되었는데, 이에 관한 이야기 속에 암브로시우스·아우렐리아누스·아서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그러나 550년경에 새로운 게르만족의 침입이 시작되었으며, 6세기가 끝나기 전에 브리튼인들은 서쪽으로 콘월과 웨일스의 변경까지 밀려나게 되었고 침입자들은 페나인 산맥 서쪽과 북쪽으로는 로디언 지방까지 진출했다.
브리튼 토착민들의 처지가 그후 어떻게 변했는지를 정확하게 밝히기는 어렵지만, 7세기말 무렵 모든 주민들이 자기 자신을 '잉글랜드인'으로 의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단일체 의식은 험버 강 이남의 모든 왕국들이 단일한 통치자, 즉 브레트월다의 통솔권을 인정한 오랜 기간을 거치면서 점차 강화되어갔다. 로마인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브리튼에 전파했으나 앵글로색슨족이 침입하자 웨일스 지방으로 쫓겨났다. 597년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에서 켄트로 선교단을 이끌고 오면서 그리스도교는 다시 전파되기 시작했다.
앵글로색슨족의 개종은 아우구스티누스를 파견했던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공로였는데, 이로 말미암아 그는 '잉글랜드인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켄트에 상륙한 지 100년이 채 되기도 전에 잉글랜드는 그리스도교 신학의 최첨단 중심지가 되었다. 캔터베리는 유명한 학교가 되었으며, 거기서 훈련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지식을 잉글랜드의 다른 지역으로 전파했다.
신학이 가장 발달한 중심지는 노섬브리아였다. 이곳에서는 켈트의 영향과 그리스·로마의 영향이 함께 융화되었다. 이 시기에 배출된 유명한 역사가이자 신학자인 비드(672경~735)는 노섬브리아 동쪽 해안의 재로 수도원에서 살았다.
고대 잉글랜드의 서사시 〈베오울프 Beowulf〉는 이 시기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정확한 연대는 분명하지 않다. 앵글로아일랜드 양식의 장식 글자 필사본이 발달한 것도 이 시기의 일인데, 그 가장 뛰어난 보기는 린디스판 복음서들이다. 교회에는 많은 보물들이 있었다. 잉글랜드 선교사들은 이와 같은 필사본과 공예품들을 자신들이 세운 해외 교회로 가져갔으며, 그래서 거꾸로 이런 교회들이 그와 같은 필사본과 공예품을 만들어내는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브리튼에 대한 바이킹의 소규모 산발적인 습격이 8세기말에 시작되었고 9세기에는 대규모의 약탈적 침입이 자행되었다.
865년 가을에 데인족 대군이 이스트앵글리아에 쳐들어와 요크를 점거했으며, 머시아는 돈을 주고 그들의 침략을 모면했다. 871년 그들은 웨식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웨식스의 왕 앨프레드는 877년 이들 데인족들을 웨식스 영토에서 몰아낼 수 있었다.
앨프레드가 승리함으로써 데인족이 잉글랜드 전체의 주인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으므로 그 의미가 자못 크다. 이후 웨식스가 데인족의 지배하에 들어간 적은 없었으며, 그 다음 세기에는 웨식스가 데인족이 점거했던 영토를 되찾았다. 927년에 앨프레드의 손자 애설스탠이 노섬브리아를 차지해 전(全)잉글랜드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권을 가진 최초의 국왕이 되었다.
웨스트색슨(웨식스)의 왕들은 전잉글랜드의 지배자가 됨으로써 웨스트색슨족·머시아족·데인족 영토 등 여러 법률과 다양한 관습을 가진 지역들을 다스려야만 했다. 행정구역이 점차 통일되었지만 왕들은 지방의 특수성을 없애려 하지는 않았다. 머시아는 웨식스를 따라 몇 개의 주(shire)로 나뉘었다(→ 색인:셔). 주보다 더 작은 행정구역이 언제부터 '헌드레드'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은 이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보편적인 행정단위가 되었다.
바이킹의 침입은 980년에 다시 시작되었으며, 그후 점점 더 힘이 거세어졌다. 계속되는 전쟁과 침입자들을 달래기 위해 바친 과중한 공납으로 지칠 대로 지친 잉글랜드인들은 1013년에 덴마크 왕 스벤(스웨인)을 그들의 왕으로 받아들였다.
약간의 저항이 있기는 했으나 스벤의 아들 크누트는 1016년 잉글랜드 전체의 왕이 되었다. 크누트는 몇몇 유력한 잉글랜드인을 무자비하게 처치했지만, 통치 자체는 폭군적인 것은 아니어서 그의 통치기간은 오히려 평화스런 시기로 기억되고 있다. 1035년 크누트가 죽자 왕위를 요구하는 사람이 여러 명 나타났고 이때문에 불안 상태가 계속되었다. 1042년에 잉글랜드계의 참회왕 에드워드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데인족의 침입으로 노르망디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에드워드의 궁정에는 그의 총애를 받는 몇몇 노르만인들이 세력을 잡고 있었다.
이때문에 머시아와 웨식스의 백작들이 그에 반항했다. 추방되었던 웨식스 백작 고드윈이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오자 에드워드는 그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해럴드는 유능한 통치자가 될 만한 사람이었으나 적대 세력의 힘이 너무 강했다. 교황청은 해럴드의 왕위계승을 반대하고, 로마에 대한 충성을 지켜온 윌리엄의 잉글랜드 침입을 축복했다.
이와 같은 교황의 지지 덕분에 윌리엄은 여러 지방에서 군대를 끌어모을 수 있었다. 해럴드는 북쪽에 침입한 노르웨이군을 스탬퍼드브리지에서 격퇴한 지 3주도 못 되어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엄과 맞서게 되었다(→ 색인:헤이스팅스 전투). 그결과 해럴드는 피살되었고 윌리엄은 1066년 크리스마스에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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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앵글로색슨 시대의 잉글랜드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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