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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커스터의 헨리 4세(1399~1413 재위) 역시 의회와 충돌했으며, 웨일스와 노섬벌랜드에서 일어난 반란에 직면했다.
그의 아들 헨리 5세(1413~22 재위)는 프랑스와의 싸움을 다시 시작했다. 1415년에 소규모의 군대를 가지고 프랑스에 침입한 그는 아르플뢰르를 공략한 뒤 칼레로 진군했다. 아쟁쿠르에서 계속 나아갈 길이 막힌 잉글랜드군은 어쩔 수 없이 있는 힘껏 싸웠고 그결과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뒤이어 1417~19년에 헨리 5세는 노르망디를 정복했다. 프랑스에서의 사태 진전에 만족한 의회는 왕이 필요로 하는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헨리 5세의 아들 헨리 6세(1422~61, 1470~71 재위)가 아직 어리던 1429년에 잔 다르크가 나타나 프랑스인들의 저항력을 한군데로 결집했을 때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부르고뉴의 필리프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파기하자 싸움은 소모전이 되었으며, 1453년 무렵 잉글랜드는 칼레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영토를 잃고 말았다.
에드워드 3세의 후손들인 요크 가문과 랭커스터 가문 사이에 벌어진 투쟁인 이른바 장미전쟁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헨리 6세의 무능과 그에 대한 요크 공작 리처드의 반대로 말미암아 일어났지만, 지방 유력자들 사이의 반목 또한 이에 작용했다. 왕이 분쟁을 해결하지 못함에 따라 싸움은 전국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요크가가 내란에서 승리한 결과, 리처드의 아들인 에드워드 4세(1461~70, 1471~83 재위)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재위초 몇 년은 반대 세력을 진압하는 데 보냈으나, 후반은 상대적으로 질서와 평화의 시기였다. 에드워드의 가장 큰 업적은 왕국의 위신을 회복한 점이었다. 에드워드가 죽은 뒤 두 어린 왕자는 숙부인 리처드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첫째아들인 에드워드 5세(1483. 4~6)는 즉위하자마자 리처드에 의해 동생과 함께 런던 탑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리처드는 1483년에 리처드 3세로 즉위했다.
그는 유능한 국왕으로 인정받았으나, 그가 조카들을 살해했다느니 또는 살해를 묵인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퍼지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가 국왕에게 바치는 헌금 형식으로 내오던 덕세(德稅)를 금지하고 잉글랜드 상인 및 수공업 장인들을 보호하는 입법을 만드는 등 인심을 얻을 만한 일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조치도 그가 배신자이며 사악한 숙부라는 소문을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1485년 여름에 랭커스터 가계의 인물로서 왕위를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인 헨리 튜더가 밀퍼드 헤이븐에 상륙하자, 리처드는 결국 지지자들에게 버림받았다. 리처드는 보즈워스 평야의 전투에서 패배해 죽었다(→ 색인:보즈워스 전투).
15세기 전기간에 걸쳐 잉글랜드는 경제적 변화를 겪었다.
토지 시장이 크게 발달해 농민들 가운데는 이웃 농민들보다 높은 지위로 상승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요먼리라 불린 계급을 형성했다. 대지주들은 토지의 직접 경영보다 임대차제도를 선호했다. 잉글랜드는 여전히 농경사회였지만, 도시에서는 중요한 발전과 변화가 일어났다. 런던은 계속 성장하여 동남부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다른 지방에서는 양모공업이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15세기는 문화적인 면에서 볼 때 불모의 시대였으나, 학교와 대학의 설립이라는 점에서는 중요한 시기였다.
교회 예배당에 부속된 학교가 세워졌는가 하면, 어떤 것은 길드에 의해서도 세워졌다. 헨리 6세는 1440년에 이튼 고등학교를, 그리고 1441년에는 케임브리지대학교 킹스 칼리지를 설립했다. 옥스퍼드대학교 및 케임브리지대학교의 다른 칼리지들도 이 시기에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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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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