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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만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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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게피다이족·고트족은 BC 1, 2세기경 발트해 남쪽 연안지역에 살았다. 카이사르 시대에 게르만족은 라인강 서쪽에 자리를 잡았고, 남쪽으로는 도나우강까지 이르렀다.
500년에 앵글족과 색슨족은 잉글랜드로 건너갔고, 프랑크족은 갈리아 북동부지역을 차지했다. 부르군트족은 론강 유역에 살았고, 그 서쪽에 서고트족이 살았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에, 반달족은 아프리카에 정착했다. 프랑크족은 갈리아 지역에서 서고트족을 몰아냈다. 서고트족은 스페인에서 살다가 이슬람교도들에게 전멸당했다.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에 독립왕국을 세웠지만 샤를마뉴에게 멸망당했다. 고트족이 떠난 동부 독일지방은 슬라브족이 차지했다. 8세기 이후 게르만족은 동부 독일지방과 슈타이어마르크·카린티아 등을 슬라브족에게서 되찾았다.

게르만족(Germane)

ⓒ Ras67/wikipedia | Public Domain

게르만족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으나 청동기시대말 스웨덴 남부, 덴마크 반도, 엠스 강과 오데르 강 및 하르츠 산맥 사이의 독일 북부지방에 살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게르만족의 일파인 반달족·게피다이족·고트족은 BC 1, 2세기경에 스웨덴 남부를 떠나, 오데르 강과 비수아 강 사이에 있는 발트 해 남쪽 연안지역을 차지했다. 초기에는 독일 서부지방의 대부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켈트족을 몰아내고 남쪽과 서쪽으로도 이주했다. 예를 들어 켈트족의 일파인 헬베티족은 BC 1세기에는 오늘날의 스위스 지역에만 살고 있었지만, 한때는 마인 강 연안까지 퍼져 있었다.

(→ 로마사)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에 게르만족은 라인 강 서쪽에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남쪽으로는 도나우 강까지 이르렀다.

게르만족이 로마인과 처음으로 크게 충돌한 것은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튜튼족)이 갈리아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를 침략한 BC 2세기였는데 이들은 BC 102~101년에 로마의 마리우스에 의해 섬멸되었다.

피테아스시대부터 로마의 여행자들은 북부 유럽에 있는 튜튼족의 나라들을 방문했지만, 로마인들이 게르만족과 켈트족을 명확히 구별할 줄 알게 된 것은 BC 1세기에 들어서고도 한참 뒤인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에 이르러서였다. 카이사르는 라인 강 서쪽을 침범한 게르만족을 로마 제국의 국경 안으로 받아들였으며, 또한 게르만 문화를 기술한 문헌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을 남겼다.

BC 9년에 로마인들은 제국의 동쪽 국경을 라인 강에서 엘베 강으로 넓혔으나, AD 9년에 그들의 지배를 받고 있던 게르만족이 아르미니우스의 영도로 반란을 일으키자, 로마 국경은 다시 라인 강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을 지배한 기간 및 로마인과 게르만족 사이에 전쟁이 자주 일어났던 AD 1세기에 로마인들은 게르만족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타키투스가 98년에 역사책 〈게르마니아 Germania〉를 저술할 수 있었던 것도 이때쯤 게르만족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수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현존하는 민족지(民族誌) 가운데 가장 가치있는 저술 중의 하나이다. 후세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성과는 타키투스가 제공하는 정보에 많은 점을 덧붙였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고고학은 오히려 타키투스의 정확성을 확인하고, 주제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의 옛 민요를 인용하여 게르만족은 대지(大地)의 아들인 투이스토 신의 자손으로, 투이스토는 마누스라는 아들을 낳았고, 마누스는 다시 아들 3명을 낳았다고 했다.

이 3형제를 각각 시조로 게르만족은 잉가이보네스·헤르미노네스·이스타이보네스의 3개 부족으로 갈라졌는데, 그 기준이 무엇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타키투스는 다른 형태의 족보도 기록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마누스에게는 수에비족과 반달족, 그밖에 여러 부족의 시조로 여겨지는 수많은 아들이 있었다. 어쨌든 이런 민요가 유포되었다는 사실은 타키투스 시대에는 게르만족의 여러 부족이 서로의 관계를 자각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로마 제국에 복속하는 게르만인들은 종종 자신을 '게르마니'(Germani)라고 부른 반면, 라인 강 너머에 사는 자유로운 게르만인들은 11세기에 '디우티스크'(diutisc:'민족의'를 뜻하는 현대 라틴어이며 독일어 'deutsch'의 어원임)라는 형용사가 널리 쓰이기 시작할 때까지 자기 집단을 지칭하는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다. '게르마니'라는 낱말의 뜻과 그 낱말이 어느 언어에 속해 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타키투스 시대에 게르만족의 주요부족들은 다음과 같이 분포해 있었다.

카티족은 오늘날의 헤센 지방, 프리시족은 라인 강과 엠스 강 사이의 강기슭, 카우키족은 베저 강 어귀, 그 남쪽에는 아르미니우스의 부족인 케루스키족이 살았다. 슈바벤이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수에비족은 메클렌부르크, 브란덴부르크, 작센, 튀빙겐 지역에 살았다. 하펠 강과 슈프레 강 주변에 사는 셈노네스족은 수에비족의 일파이며, 셈노네스족의 북서쪽에 살았던 랑고바르디족(롬바르드족)도 역시 수에비족이었다.

네르투스 여신을 숭배한 7개 부족 가운데 앙글리족(앵글족)은 슐레스비히 동부의 앙겔른 반도에 모여 살았다. 로마 제국의 도나우 강 국경 지역에서는 헤르문두리족이 레겐부르크 근처에서 북쪽의 프랑켄을 거쳐 튀빙겐 지방까지 퍼져 있었다.

일찍이 마인 강 유역에 살았던 마르코만니족은 BC 10년부터 10년 동안 보헤미아(그 이전까지는 켈트족의 한 부족인 보이족이 차지하고 있었음)로 이주했고, 그 동쪽 모라비아에는 콰디족이 살고 있었다.

도나우 강 하류에는 바스타르나이족이 살았는데, 이들은 대체로 게르만족의 일파로 여겨진다. 고트족게피다이족 및 반달족은 발트 해 남쪽 연안에 살고 있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수이오네스족과 시토네스족은 스웨덴에 살았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역사적으로 그리 중요하지 않은 다른 부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시대 이후에 중요해진 작센족(색슨족)과 부르군트족을 비롯한 몇몇 부족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3세기말에 이르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라인 강 동부지역에 타키투스가 전혀 알지 못했던 부족들의 거대한 연합체가 3개나 형성된 것이다. 이제 로마 제국의 라인 강 하류 국경은 프랑크족이 사는 지역과 직접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라인 강 유역은 260년경부터 부르군트족에게 점령되었고, 아그리데쿠마테스 지방(지금의 슈바르츠발트 지역의 일부)은 알레만니족의 영토가 되었다.

부르군트족은 독일 동부지역에서 이주해온 것 같다.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은 동부에서 온 이주민들도 어느 정도 섞여 있었겠지만, 타키투스 시대에 라인 강 하류지방과 아그리데쿠마테스 지방에서 살던 부족들의 연합체였을 것이다. 타키투스가 발트 해 연안에 살고 있다고 말한 부족은 2세기 후반에 남동쪽으로 이동했고 따라서 고트족은 이제 우크라이나 지방과 오늘날의 루마니아 지방을 대부분 지배했다. 게피다이족은 트란실바니아 북쪽의 산지에, 그 서쪽에는 반달족이 살게 되었다.

500년에 이르자 앵글족과 색슨족은 잉글랜드로 건너갔고, 프랑크족은 갈리아 북동부지역을 차지했다.

부르군트족은 론 강 유역에 살았으며, 그 서쪽에는 서고트족이 살게 되었다. 동고트족은 이탈리아에 정착했고, 반달족은 아프리카에 자리를 잡았다. 프랑크족은 507년에 갈리아 대부분 지역에서 서고트족을 몰아냈다. 피레네 산맥에서 루아르 강에 이르는 갈리아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서고트족은 그후 스페인에 들어가 살다가, 711년 이슬람교도들에게 전멸당했다.

롬바르드족은 568년 이탈리아로 들어가 독립왕국을 세웠지만, 이 왕국은 샤를마뉴에게 멸망당했다(774). 고트족을 비롯한 원주민이 떠난 동부 독일지방은 슬라브족이 차지했고 이들은 서쪽으로 보헤미아와 엘베 강 저지까지 세력을 뻗쳤다.

8세기 이후 게르만족은 동부 독일지방과 니더외스터라이히 및 슈타이어마르크와 카린티아의 대부분을 슬라브족에게서 되찾았다.

문화

게르만족의 문화

ⓒ Der Wolf im Wald/wikipedia | CC BY-SA 3.0 de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따르면, 게르만족은 목축민이었고 양과 소를 사육하여 젖·치즈·고기 등의 식량 대부분을 얻었다고 한다. 이들은 농사도 지었는데, 주요농작물은 곡식과 근채작물 및 채소였다. 게르만족의 소와 말은 로마인의 기준으로 보면 품질이 좋지 않았다.

게르마니아(고대 로마인들이 게르만족의 거주지에 붙인 이름)에서는 카이사르 시대보다 약 4세기 전에 철기시대가 시작되었지만 카이사르 시대에도 여전히 금속은 가정용품을 만드는 데 쓰기에는 사치스러운 재료였고 가정용품은 대부분 나무·가죽·진흙으로 만들었다. 게르만족이 사용한 물건 가운데 큰 금속제품은 아직도 대부분 청동으로 만들어졌지만, 무기는 철기였다. 도기는 대부분 손으로 만들었고, 물레를 돌려서 만든 항아리도 비교적 드물었다.

초기에 게르마니아에서 교역이 얼마나 발달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노예무역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많은 노예들이 로마인에게 팔려갔다. 물레를 이용하는 도공들(극히 드물었음)과 대장장이, 광부들은 분명 그들이 만들거나 캐낸 물건을 팔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게르마니아의 보통 마을에서는 집에서 쓸 물건을 스스로 만들었던 것 같다.

카이사르 시대에는 켈트족의 상품만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만들어진 상품도 취급하는 외국상인들이 게르마니아에서 활동하면서 포도주와 청동기 같은 상품을 부유한 군인들에게 공급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는 로마 제국에서 수입하는 상품이 크게 늘어나 게르만족의 지도자들은 전에는 손에 넣지 못했던 모든 부류의 상품(유리그릇, 붉은 식탁, 로마의 무기, 브로치, 작은 조상, 다양한 장식품 등)을 구입할 수 있다. 이런 로마 제품을 소유한다는 것은 곧 높은 지위를 상징했으나, 어떻게 그 값을 지불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전쟁

로마 제국 초기에 게르만족의 무기는 공격용이든 방어용이든 금속을 별로 쓰지 않은 것이 특징이었다. 게르만족의 주무기는 긴 창이었고, 칼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었다. 투구와 가슴받이도 거의 없었다. 가벼운 나무나 고리버들로 만든 방패가 유일한 방어용 무기였는데, 방패 가장자리에 쇠테를 두르거나 가죽으로 보강하는 경우도 있었다.

게르만족이 중무장한 로마군을 향하여 그토록 신속하고 맹렬한 돌진을 감행한 것은 이처럼 적절한 장비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가벼운 방패와 공격용 창뿐인 게르만족이 장기적인 백병전에 말려들어 갑옷을 입은 로마군의 칼과 맞설 경우, 승리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6세기까지도 게르만족 가운데는 장비를 갖춘 사람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중무장한 기마 궁수대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병력도 없었다.

정치형태

카이사르가 묘사하고 있는 게르만족에게는 독재정치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파구스'(친족집단)의 지도자들은 분쟁이 일어날 경우 그 해결을 위해 애썼지만, 자신의 '파구스' 내부에서 일어난 분쟁에만 개입했다.

이 시대에는 중재기구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고 평화시에도 모든 '파구스'에 명령을 내리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중앙 권력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전시에는 수많은 연합 족장이 선출되었지만, 이들은 공동 지도자였고 오직 전시에만 그 지위를 가졌다고 한다.

타키투스 시대에는 새로운 유형의 군사적 족장이 나타났는데, 공인된 '왕족'만이 선출될 자격을 갖고 있었다. 1세기의 케루스키족과 바타비족, 6세기의 헤룰리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에는 공인된 왕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왕족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족장 선거에서 선출될 자격이 있었고, 족장은 세습되지 않았다. 이런 유형의 족장은 종신직이었으며, 군사적 의무만이 아니라 종교적 의무도 갖고 있었다. 지도자협의회는 족장의 결정을 파기할 수 있었으며, 전사들의 전체회의는 족장의 제안에 대해 거부권을 가졌고 족장의 영향력은 그 자신의 개인적 자질에 따라 크게 좌우되었다.

타키투스 시대에는 게르만족도 초보적인 사법기구를 갖게 되었다. 전체회의는 재판관으로 활동할 지도자들을 선출했고, 이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민간 소송을 심리했다. 재판관들은 자신의 판결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각각 100명씩의 수행원을 데리고 다녔고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지은 죄의 경중에 따라 말이나 소를 벌금으로 내야 했다. 그러나 분쟁(예컨대 살인·상해·절도 때문에 일어난 분쟁)은 여전히 친족집단 내부에서 해결되는 경우가 많았고, 그 분쟁이 초래한 피의 복수가 몇 세대 동안이나 계속되기도 했다.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지 오랜 뒤까지도 통치자들은 피의 복수를 소멸시키지 못했다.

게르만족의 족장들 가운데 개인적 전제정치를 확립했던 이는 마로보두스 1명뿐이다. 그는 BC 9년경에 마르코만니족을 그들의 고향 마인 강 유역에서 이끌고 나와 보헤미아에 정착시켰다. 그는 보헤미아를 근거지로 엘베 강과 비수아 강 사이에 살고 있는 다른 게르만족을 상당수 정복했다. 셈노네스족·롬바르드족·루기족도 그에게 복속되었다. 그러나 케루스키족은 마로보두스 왕의 몇몇 부하들과 함께 AD 17년에 왕을 공격하여 폐위시킨 다음, 로마 제국으로 쫓아냈다. 그밖에 이 시기에 왕국을 세우려고 시도한 족장들은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모두 실패했다.

게르만 세계에 군주제도가 완전히 확립된 것은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 영토 안에 부족연합체로 정착한 뒤였고 이탈리아의 동고트족, 갈리아와 스페인의 서고트족, 아프리카에 정착한 반달족의 지도자들이 게르만족 최초의 왕이었다. 이 시기의 다른 게르만족 족장들 가운데 아타나리크나 알라리크 같은 유명한 족장들은 로마 제국 영토 밖에 살았거나 부족연합체를 이루지 않고 국경수비조약(foedus)으로 보호되고 있는 지역에 정착해 살았는데, 이들은 타키투스가 묘사한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권한을 거의 갖지 못했던 것 같다.

종교

여러 가지 증거로 미루어볼 때 규모가 큰 게르만 부족들은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에는 아직 로마 제국의 국경 바깥에 살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지만, 서로마 제국 멸망 이전에 로마 제국의 속주로 이주한 게르만인들은 1세대가 지나기 전에 모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것 같다.

반달족은 409~429년 스페인에서, 부르군트족은 412~436년 동부 갈리아에서, 동고트족은 456~472년경 판노니아 속주에서 각각 개종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모두 아리우스파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고, 클로비스 왕 시절의 프랑크족 개종(496), 지기스문트 왕 시절의 부르군트족 개종까지는 규모가 큰 게르만 부족이 공식적으로 가톨릭교도가 된 경우는 전혀 없었다.

게르만족이 가톨릭교 대신 아리우스파를 받아들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8세기 후반에 와서 고색슨족의 개종을 끝으로 유럽 대륙에 있던 모든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반면,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사는 게르만족은 10세기에야 개종했다. 잉글랜드는 7세기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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