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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 영국 잉글랜드 남동부, 켄트 주 동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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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 172,752명 (2020년 추계) |
면적 | 308.84km² |
언어 | 영어 |
대륙 | 유럽 |
국가 | 영국 |
요약 영국 잉글랜드 켄트 주에 있는 행정구와 도시.
로마 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원래 스투어 강 어귀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이 강은 새넛 섬과 본토를 갈라놓던 완트섬 해협으로 흘러들어갔다.
43년에 클라우디우스가 이곳을 침략하여 두로베르눔칸티아코룸이라는 로마 도시를 세웠고, 이 도시는 카싱 가도(후의 와틀링 가도)에 의해 89㎞ 북서쪽에 있던 런던과 26㎞ 남동쪽에 있던 도버와 연결되었다. 200년경에 건설되어 중세에 높게 증축된 로마 도시의 성벽 일부가 지금도 남아 있다.
6세기 후반에 이곳은 애설버트 1세가 다스리던 켄트 왕국의 수도였다. 그는 그리스도교도인 베르다(프랑크족의 왕 채리버트의 딸)와 결혼함으로써 영향을 받아 성 아우구스티누스(597년 새넛 섬에 도착)의 캔터베리 전도사업을 지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를스에서 잉글랜드 주교직을 마친 뒤 이곳으로 돌아와 대성당을 세웠는데, 이 성당은 지금도 잉글랜드에서 중요한 주교관구 중심지이다.
데인족의 침략에 시달리면서도 이 도시의 중요성은 점점 커졌으며, 특히 1011년에 그러했다. 1170년 대성당에서 토머스 베켓 대주교가 살해되고, 1174년 헨리 2세가 참회한 후, 베켓의 성골(聖骨)을 보러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왔다. 순례자들은 이곳에 있는 많은 여관들의 주요고객이었으며, 이러한 순례자들의 모습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The Canterbury Tales〉에 그려져 있다.
14세기 이전에 시정부가 세워졌고, 1461년에 집행관이 있는 주로 승격되었다. 16세기의 종교개혁 때 많은 수도원이 해체되고 토머스 베켓에 대한 숭배는 탄압을 받았으며 도시는 쇠퇴했다. 대부분 직조공이던 개신교도 피난민들이 유럽 대륙으로부터 유입되자 도시는 다시 활기를 찾았다.
현재 이곳은 시장도시이며 행정구의 서비스 중심지이고, 약간의 경공업이 이루어지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곳이기도 하다. 주요 교육기관은 켄트대학교(1965)이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심한 공습을 받았으나 대성당은 일부만이 파괴되었으며, 상가지역은 그후 광범위하게 재건되었다. 대성당은 여러 번 재건되었는데, 1070~89년과 14세기, 그리고 현재의 본당(本堂)과 탑이 건설되면서 개축되었다. 16세기에 이 성당의 큰 지하실은 위그노 피난민들을 위한 예배장소로 이용되었고, 지금도 매주 프랑스어로 예배가 이루어진다. 크라이스트처치 문을 통해 수도원 유적과 연결되며, 노르만 양식의 계단 위에 서 있는 킹 학교는 중세 초기에 설립된 것을 1541년 헨리 8세가 개축한 것이다. 원래 22개였던 교회구 교회들과 노르만족 대사원의 유적 등과 같은 중세 교회 건물들이 이 도시를 품위 있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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