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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2세(1660~85 재위)는 왕정복고의 조건으로 몇 가지 사항을 약속했다. 일반사면령을 내리고 관용적인 종교적 결정을 추구할 것이며, 사유재산권을 보장할 것이라는 것 등이었다. 1660년에 새로 소집된 컨벤션 의회는 국왕과 상원의 복구를 선언하고, 군대를 해산하며, 국왕을 위한 고정 수입을 확정하고, 몰수된 재산을 국왕과 주교들에게 되돌려주었으나, 종교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별로 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기사의회(Cavalier Parliament)는 엄격한 영국국교회의 정통 교리를 확립하고, 지주층과 성직자 사이의 제휴를 도모하기 시작했는데, 그후 수세기 동안 영국의 지역사회를 지배한 것이 이들 두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국왕이 마지못해 서명한 심사령(1673)의 통과로 비국교도의 공직 취임이 금지되었다. 경제적인 면에서 찰스 2세는 꽤 넉넉한 재정을 물려받았다. 호국경 시대에 프랑스 및 스페인과 벌인 전쟁 덕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늘어났고 식민지 무역이 왕실 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색인:식민주의).
그러나 찰스는 의회와 대립했으며, 가톨릭 편향 정책을 펴서 많은 의원들을 불안하게 했다. 그의 아우이자 계승자인 제임스 2세(1685~88 재위)는 공개적인 가톨릭 신봉자로서 의회에 대한 도전이 한층 더 심했으며 심지어는 의회를 자신의 지지자들로 채우려고까지 했다. 1688년 왕비가 아들을 낳음에 따라 다시 또 가톨릭 국왕이 이어지리라는 염려가 널리 퍼지게 되고, 이때문에 제임스 지지 세력이 무너지자 제임스는 국외로 도망했다.
영국 침입을 계획하고 있던 오라녜 공 빌렘은 영국에 들어와 사태를 수습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는 부인인 메리(제임스의 딸)와 함께 1689년에 왕위에 올랐다(명예혁명). 윌리엄과 메리 여왕의 치세(1689~1702) 동안에 늘어나는 국가의 부채를 갚기 위해 영국은행이 설립되었다(1694). 의회는 또한 1701년에 왕위계승법을 통과시켰는데, 이것은 제임스 1세의 손자, 즉 하노버의 소피아와 그녀의 아들 조지(게오르크)에게 왕위계승권을 부여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 국왕의 계승을 보장하려는 것이었다. 이 시대의 정치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은 아마 휘그당과 토리당이라는 대립적인 정당이 성장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토리당이 영국국교회·지주 편이고 복종의 원리를 중시했던 데 비해 휘그당은 종교적 분리주의자들을 지지했고 활발한 대외정책을 장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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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영국의 왕정복고 시대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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