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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브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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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석기시대말까지도 브리튼 섬은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어 떠돌이 사냥꾼들이 쉽게 드나들었다(→ 색인:수렵채취 사회). BC 11000년경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점점 더 따뜻해지자, 툰드라가 삼림으로 바뀌고 순록 사냥 대신 붉은사슴과 고라니 사냥이 널리 행해졌다.

BC 6000~5000년경에 브리튼이 대륙으로부터 분리되면서, 이주가 어려워졌다. 이때부터 브리튼은 발전된 유럽 대륙의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기보다는 이를 받아들이고 이용함으로써 섬나라 특유의 문화를 발전시켰다. 유럽의 서쪽이나 서북쪽 해안 지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BC 4000년 무렵 농업을 들여왔다. 그후 BC 2000년대초에 네덜란드 지방과 라인 강 중류지방에서 건너온 비커족(Beaker Folk)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인도유럽어를 들여왔을 것이다.

교역을 장악한 이는 웨식스의 족장들이었는데, 그들의 호화스러운 무덤들을 통해서 그들이 얼마나 번성했는지 알 수 있다. 상업이 크게 발달해 콘월과 아일랜드, 중부 유럽과 발트 해에 이르는 중개무역이 번성했다. 이처럼 번성한 덕택에 웨식스의 족장들은 스톤헨지로 알려진 선돌기념물을 세울 수 있었던 것 같다.

BC 8세기 무렵부터 켈트족이 등장해 구릉지대에 성채를 구축했다.

BC 2세기에 이르면서 브리튼에는 섬나라 특유의, 그리고 켈트 고유의 문화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갈리아의 벨기에 지역에서 더 많은 부족들이 이주해오면서부터 로마의 역사가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브리튼의 여러 부족들이 나타났다(→ 색인:인구이동). BC 55~54년에 로마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략을 받은 뒤부터 브리튼(브리타니아)은 로마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후 약 90년 뒤 로마는 본격적으로 이 섬의 정복에 착수했으며, AD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섬의 남동부 지역(지금의 잉글랜드)을 정복하여 이를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 49년에 지금의 콜체스터(카무로두눔)에 콜로니아(colonia)를 건설했는데, 그것은 복무를 마친 군인들을 전략적 요지에 배치한 일종의 예비군 주둔지였지만 로마의 도시 생활의 보기를 브리튼인들에게 보여주는 구실도 했다.

로마인의 정복으로 로마 문명이 브리튼 섬에 전파되었다.

도시가 세워지고 황제숭배의식이 행해졌으며, 상인들은 부지런히 브리튼인에게 로마 물질문명의 혜택을 가져다주었다. 1세기 후반 이래 로마인들이 웨일스를 점령하고 스코틀랜드 지방으로 진출함에 따라 남부지방에서는 군대가 떠나가고 대신 키비타스가 지방 행정의 중심이 되었는데 이것은 주민 대부분이 토착민들로 구성된 하나의 행정구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키비타스 중심으로 추진된 도시화 계획과 주민교화사업이 2세기까지 계속되었다.

로마의 웨일스 정복은 78년에 완수되었으나, 스코틀랜드 침입은 실패하고 말았다. 섬 전체를 점령하기에는 인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북부에 경계선을 마련하려는 몇 번에 걸친 시도 끝에 마침내 솔웨이 만과 타인 강 사이의 지협이 경계선으로 선택되어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곳에 돌로 된 성벽을 쌓았다(122~130). 이것이 로마 제국에서 가장 거창한 국경선 방벽으로 유명한 하드리아누스 성벽이다.

로마인의 정복 이전에 벌써 브리튼은 곡물 이외에 금·은·철·가죽·노예·사냥개 등을 수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제의 기반은 역시 농업에 있었다. 로마인의 정복은 농업 생산을 크게 자극했는데, 그것은 군에서 필요한 식량을 공급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로마화 현상은 도시의 상층 계급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농촌지역에서는 켈트어가 계속 사용되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라틴어와 켈트어 2가지 말을 사용했다. 벽이나 바위의 흔적들을 보면 심지어 수공업 장인들까지도 라틴 문자를 썼던 것을 알 수 있다.

브리튼 섬의 로마 문명은 4세기에 큰 번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브리튼에 주둔한 로마 군대가 게르만족들의 제국령 침범을 막기 위하여 철수하게 되면서, 브리튼은 점차 로마의 지배와 보호에서 떨어져나오게 되었다. 367년에 스코틀랜드의 픽트족과 아일랜드의 스콧족이 바다를 통해 합동 작전으로 침범해왔을 때 브리튼은 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그후로도 계속된 군대의 철수로 방어력은 더욱 약해졌는데, 407년 브리튼 주둔군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콘스탄티누스 3세가 더 많은 군대를 갈리아 지방으로 철수시키자 섬에 남은 병력으로 픽트족과 색슨족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브리튼인들은 정통 황제인 호노리우스에게 호소했으나, 황제는 원군을 파견할 수가 없었고, 다만 자체 방어할 권한을 브리튼 각 도시에 부여하는 데 그쳤다(410). 이것으로 로마인의 브리튼 지배는 종말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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