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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왕가와 영국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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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주의는 엘리자베스의 후계자들을 괴롭혔으며, 또한 뉴잉글랜드 식민지를 건설하는 데도 기여했다.

영국 내에서 여러 가지 종교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많은 청교도들에게 이민은 유일한 해결방법이었다. 제임스 1세(1603~25 재위)는 종교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1604년에 햄프턴궁 회담을 소집했는데, 제임스는 이 회의에서 퓨리터니즘에 대한 자신의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 회의가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은 흠정영역성서로 알려진 성서를 만들어낸(1611) 점이다.

제임스의 아들 찰스 1세(1625~49 재위)는 종교문제에 관해서 더 많은 변화를 추구했다. 그는 당시 영국 교회에 전파되고 있던 하나의 교회개혁 운동인 아르미니우스파의 교리에 이끌리게 되었는데, 이것은 칼뱅주의에 기울어진 국민들 사이에 커다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1633년에 가장 걸출한 아르미니우스파의 한 사람이었던 윌리엄 로드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로드는 설교보다 의식을 강조했으며, 교회를 장식하고 성찬대를 회중과 분리시켰다.

이런 것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를 상기시키는 것들이었는데, 프로테스탄트들이 가톨릭교의 부활을 걱정하고 있던 바로 그 시점에 나타났던 것이다. 교황에 대한 반대는 여러 갈래의 프로테스탄트 개혁운동을 하나로 뭉치게 해왔는데, 이제 그것은 새로운 제도 도입에 대한 반대운동을 결집하는 구호가 되었다.

로드의 교회개혁 방안은 곧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도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인들은 자신들의 교회에 대한 간섭을 좌시하지 않았다. 1640년에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에 침입해 찰스로 하여금 다시 의회를 소집하도록 한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하게 했다. 1640년 11월에 소집된 의회(장기의회)는 찰스의 의도를 불신했으며, 2가지 내용의 개혁안을 내놓았다. 첫번째 안은 의회의 존재와 신민의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국왕의 권리를 제한하는 것이었다(3년마다 의회를 소집하는 규정 설치, 성실법원과 고등 종교재판소의 폐지 등). 그러나 2번째 안인 교회개혁은 하원을 2개파로 갈라놓을 위험성이 있었다.

1641년에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의회는 군대를 찰스의 수중에 맡기느니 차라리 의회 자체의 군대를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찰스는 그 결정은 물론 그밖의 의회가 강요한 사항들까지도 거절하고 무력으로 사태를 해결하기로 작정했다.

1642년에 내란이 시작되었으나 사실 그것은 국왕이나 의회나 국민들이나 그 누구도 바라지 않던 사태였다. 그것은 이기든 지든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인 싸움이었다.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은 결국 찰스를 패배시켰으나, 의회의 통제하에 있던 군대는 다음에 취할 행동을 몰랐다.

1646년에 군대가 정치적 투쟁에서 발언권을 주장하게 되자 내란은 혁명으로 바뀌었다. 의회가 찰스와 타협하려 한다고 믿은 군대는 1648년 하원의원들을 숙청했으며, 이렇게 해서 남은 잔부의회는 찰스를 재판할 고등법정을 설치하고 왕을 반역죄로 선고하여 처형했다(1649). 그후 계속된 승전으로 명성이 높아진 크롬웰은 1653년에 호국경의 자리에 올랐다(→ 색인:보호정치). 그러나 종교 지도자들, 의회 지도자들, 군 지휘관들 사이의 의견 차이 때문에 호국경 정부는 계속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으며, 오직 크롬웰 혼자 힘으로 지탱하고 있었다.

1658년에 그가 죽자 개혁에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졌다. 호국경 정부는 혼란에 빠졌고 군의 한 부대가 런던에 진입해 장기의회(長期議會)를 회복하고 국왕이 돌아올 길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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