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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경상북도 경주시를 도읍으로 삼아 국가를 형성했던 신라의 무덤.
시간적으로 넓게는 옛 기록에 전하는 신라의 건국에서 멸망까지, 좁게는 신라의 국가형태가 확립된 마립간시대 이후에 축조되었던 무덤을 말한다. 공간적으로는 신라영역 내 모든 무덤을 일컫지만, 삼국시대에는 시기에 따라 신라의 영역이 변했으므로 도읍이었던 경주지역 고분과 이 지역 고분출토유물과 유사한 유물이 나오는 주변지역의 무덤을 포괄한다.
그러나 그 개념에 있어 신라 건국에서 가야가 멸망한 6세기 중반까지의 무덤에 대해 연구자들 사이에는 이견이 있다. 이는 신라의 국가형태가 확립된 시점 및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 축조되는 시점 문제와 신라 영역 내의 무덤구조가 지역적으로 다른 데 따른 문제이다. 따라서 연구자들 가운데는 극히 좁은 의미로서 경주지역 내에 분포하는 돌무지덧널무덤만을 신라고분이라 지칭하기도 한다.
대략적인 신라고분의 변천은 신라건국기인 원삼국시대 단계(제1기), 돌무지덧널무덤이 축조되는 단계(제2기),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 축조되는 단계(제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 신라고분
매장시설로 널무덤[木棺墓]과 덧널무덤[木槨墓]을 사용한 시기이며 전기·후기로 세분할 수 있다.
전기는 구덩이 속에 널[木棺]을 묻는 매장방법이 사용되었으며, 세형동검·전한경·와질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된다.
무덤은 구릉사면과 평지에 위치하며 경주의 조양동·구정동·입실리 등의 유적이 이에 해당된다. 후기는 구덩이 속에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속에 널을 사용하거나 피장자만을 안치하는 매장방법이 사용되었다. 무덤은 구릉사면과 평지에 위치하나 부분적으로 구릉정상부에도 있다. 많은 철제품이 출토되며, 특히 후기말에는 철제무기류가 많아지고 철제갑옷도 등장한다.
토기는 와질토기가 점차 사라지고 후기말부터는 도질·경질 토기가 출토된다. 경주의 조양동·구정동·황성동·황오동·인왕동 등의 유적이 이에 해당된다. 전기는 기원 전후에서 2세기까지, 후기는 3세기에서 4세기 중반까지로 추정되며, 이 시기는 신라의 국가형태가 완비되어가는 시기, 즉 삼한시대 사로국이 내적으로 발전하여 삼국시대 신라로 이행하는 직전단계로 보인다.
제2기 신라고분
신라 특유의 무덤구조인 돌무지덧널무덤이 만들어진 시기이다.
경주분지 내 해발 35~50m 사이의 평지에 분포한다. 경주 시가지의 남쪽 일대, 황남동·황오동·인왕동·교동·노서동·노동동이 주요분포지역이며 경주시 금척리와 경주 남천(南川) 이남의 오릉(五陵) 일대에도 고분군이 형성되어 있다. 평지에 축조되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제2기말에는 평지를 벗어나 보문동의 산록에도 일부 축조되었다. 1906년부터 조사되기 시작했으나 1911년 우연히 발견된 금관총(金冠塚)에서 금관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수습되자 이후 일제의 조선총독부 주관하에 대규모 발굴이 있었다.
해방 후 파괴되어가던 고분을 중심으로 조사되었으며, 1973년 고분공원인 대릉원(大陵苑) 조성시 황남동고분군을 중심으로 대규모 발굴조사가 있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돌무지덧널무덤의 일반적인 구조는 지하 또는 지상에 매장시설인 나무덧널을 설치하고 그 속에 널과 껴묻거리를 넣은 후, 냇돌로 원형의 돌무지를 쌓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덮은 원형의 봉토로 되어 있다. 봉토외곽에는 봉토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고 무덤의 범위를 나타내기 위해 무덤둘레돌[護石]이 둘러싸여 있다.
무덤에 따라서는 덧널 하나에 널과 껴묻거리가 함께 있는 것(單槨式),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각각 따로 만들어 으뜸덧널에는 널과 껴묻거리를 넣고 딸린덧널은 부장곽(副葬槨)으로 사용한 것(複槨式·兩槨式·雙槨式), 3개 이상의 덧널이 한 봉토 내에 있는 것(多槨式)이 있다. 이러한 무덤구조는 한 덧널 속에 한 번만 장사를 지낼 수 있으므로 합장(合葬)이나 그외의 추가장(追加葬)을 위해서는 봉토의 일부를 제거하고 그 옆에 붙여 다시 무덤을 만들어 봉토외형이 쌍무덤 형태를 이루게 하거나 한 봉토 내에 돌무지가 이중으로 겹치는, 즉 먼저 만든 무덤을 파괴하고 들어서게 되어 있다.
돌무지는 대형고분에서는 덧널 위에까지 덮여 있으며 중형고분에서는 덧널 주위에만 쌓은 경우도 있다. 초대형고분의 봉토는 지름이 80m, 높이가 20m에 달하나 주로 지름이 50m 내외인 대형고분과 10m 내외인 중형고분이 많다. 출토유물은 무덤구조의 특이성 때문에 쉽게 도굴할 수 없어 매장당시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왕릉급 고분으로 추정되는 금관총·서봉총(瑞鳳塚)·천마총(天馬塚)·황남대총북분(皇南大塚北墳)에서는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은장신구·유리그릇·금은장환두대도(金銀裝環頭大刀) 등의 무기류·갑옷·마구류·칠기·토기 등이 많이 출토된다.
그밖의 고분에서도 금동관(金銅冠)·금은장신구·무기류·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된다. 출토유물로 보아 돌무지덧널무덤은 왕·왕족·귀족계급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초대형 및 대형 돌무지덧널무덤들 사이에는 돌덧널무덤[石槨墓]과 독무덤[甕棺墓]이 밀집되어 분포하는데 그 수는 훨씬 많다. 이들 고분은 크기나 출토유물에서 돌무지덧널무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어 일반민들의 무덤으로 보인다.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상 계통은 갑작스런 등장으로 인해 추정하기 곤란하나 원삼국시대 덧널무덤이 발전해서 거대화된 형태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영남지방 각지에서 돌무지덧널무덤과 동시에 등장하는 고총(高塚)의 봉토무덤 축조와 연결된 현상이다. 그러나 출토유물 중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호우총(壺杆塚)의 "乙卯年國崗上廣開土地好太王壺杆十"이라는 명문이 있는 청동합(靑銅盒), 서봉총의 "延壽元年辛卯"라는 명문이 있는 은제합(銀製盒), 고구려 계통의 기마전술용 마구류를 통해볼 때 고구려 돌무지무덤과의 관계도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돌무지덧널무덤의 등장은 원삼국시대 덧널무덤의 전통과 고구려 돌무지무덤의 영향 아래 신라의 마립간시대 왕권을 반영하는 고총고분(高塚古墳)의 축조가 맞물려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돌무지덧널무덤이 축조된 시기는 신라가 내부적으로 국가형태를 완비하고 왕권을 확립해가던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중반까지이며, 역사적으로는 신라 마립간시대에서 동양적 왕권국가가 완비된 중고기(中古期)의 전기까지에 해당된다. 이 시기의 경주지역과 유사한 유물이 출토되는 주변지역의 고분은 변형 돌무지덧널무덤, 구덩식 돌방무덤, 돌널무덤, 독무덤이 있다.
변형 돌무지돌널무덤은 신라의 영토확장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경주시 안계리고분(安溪里古墳), 삼척 갈야산고분(葛夜山古墳), 창녕 교동고분(校洞古墳), 울주 양동고분(良東古墳) 등이 있다. 구덩식 돌방무덤은 주로 가야의 무덤구조이나 신라적인 유물이 출토되는 고분은 경주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지방수장층의 무덤으로 보이며, 대구·경산·양산·창녕 등 낙동강의 동쪽지역에 흩어져 있다.
이들 고분에서는 금동관·환두대도·은제허리띠 등 경주지역고분 출토유물과 흡사한 유물이 출토된다.
제3기 신라고분
돌무지덧널무덤이 점차 사라지고 굴식 돌방무덤이 만들어진 시기이다. 굴식 돌방무덤은 대충 다듬은 돌로 장방형 또는 방형의 널방[玄室]을 만들고 한쪽 벽에는 널방과 통하는 널길[羨道]을 두는 구조이다. 널방은 돌문[石扉]으로 닫혀 있는 것이 정식이나 나무문을 두거나 그냥 두는 경우도 많다.
널길 바깥은 자연석으로 막혀 있으며, 부부합장 등의 추가장(追加葬)이 있을 때 널길 막음돌을 걷어내고 먼저 묻힌 시신 옆에 다시 피장자를 묻을 수 있다. 이러한 무덤구조는 고구려·백제에서 발달한 것으로 신라에는 6세기 후엽경 전파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는 주된 묘제가 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이 밀집한 곳에도 몇 기 있으나 대체로 경주분지 외곽의 평지와 구릉지대에 분포한다. 노서동고분군 내 일부 고분과 경주 북천 이북의 용강동·황성동 일대의 고분군이 평지에 축조된 것이며, 구릉지대 고분군은 경주분지 외곽의 산록과 경주분지와 통하는 경주시 일대의 거의 모든 산맥의 사면에 있다. 수적으로 구릉지대 고분군이 많다. 그밖의 무덤구조로는 불교가 널리 전파되어 피장자를 화장한 후 유골을 단지에 넣어 매장하는 뼈단지무덤[骨壺墓]이 있으며, 제2기 이후의 돌덧널무덤과 독무덤도 계속 사용되었다.
돌무지덧널무덤에서 굴식 돌방무덤으로의 변화는 신라의 왕릉에서도 보인다. 제2기의 왕릉은 고분 내외에 왕릉임을 나타내는 명문이 없어 확정하기 곤란하나, 금관이 출토되는 평지의 초대형 또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이 왕릉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제3기의 왕릉은 문헌에 위치가 부정확하게 나타난 일부를 제외하고는 동양적 전제왕권이 확립된 일면을 보여주듯 대부분 독립된 구릉에 일정한 구역을 가지는 독립분(獨立墳)으로 조성되어 있다.
내부구조는 신문왕릉(神文王陵)으로 전하는 왕릉급 고분의 무덤둘레돌 남쪽에 "門"이라는 명문이 있어 굴식 돌방무덤으로 보인다. 왕릉의 외형은 제2·3기 전반의 태종무열왕릉(太宗武烈王陵)까지는 자연석으로 무덤둘레돌을 쌓았고, 이후에는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1m가량 높이로 둘러져 있다. 특히 성덕왕릉(聖德王陵) 이후의 왕릉은 무덤둘레돌이 판석으로 바뀌고 판석 사이에는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두거나 새겨놓았으며 주위에도 중국의 능묘와 같이 난간석·문인상·무인상·사자상·신도비(神道碑)를 일정하게 배치하여 왕릉으로서의 외모를 갖추고 있다. 또한 입지도 경주분지를 벗어나 있다. 그러나 신라 하대 왕릉들은 왕위쟁탈전으로 왕위가 불안정하고 재위기간이 짧았으므로 규모가 극히 축소되고 주위의 석물도 없는 단출한 형태이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신라왕릉들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변천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나, 일부 왕릉들은 조선 후기 이후에 자의적으로 왕릉이라 붙인 것이 많아 과학적인 조사를 통한 재구명(再究明)을 필요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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