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청동기 시대의 에게문명

다른 표기 언어

요약 고대 그리스의 에게 해 지역에서 발생한 청동기 시대 문명.

초기 에게 문명

초기문화의 흔적으로 그리스 본토에서는 구석기시대 사냥꾼들이 돌을 깨뜨려 만든 연장이 곳곳에서 발견되었지만 크레타를 비롯한 다른 섬에서는 아직까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구석기시대

글립토돈을 사냥하는 구석기인

ⓒ Heinrich Harder/wikipedia | Public Domain

아르고스 만(灣)에 있는 프랑크티 동굴을 발굴한 결과 BC 1만 3000년경부터 이미 크레타 북쪽 멜로스 섬까지 배가 왕래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무렵에는 잡종 곡식 재배와 가축 사육, 조직적인 다랑어 잡이도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농경공동체는 BC 7000~6000년에 세워지기 시작해 그리스 전역에 퍼졌다(→ 농업). 당시 사람들은 손으로 도자기를 빚었고 돌을 갈아 모서리를 날카롭게 다듬은 연장을 만들었다. 이들은 밀·보리·귀리·콩 따위를 재배했고 소·양·염소·돼지 등도 길렀다.

에게 해 지역에서 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BC 3000~2000경) 사이의 이행기에는 뚜렷한 문화적 변화가 일어났다.

이는 금속 세공술을 알고 있는 새로운 민족이 동쪽에서 크레타 섬과 키클라데스 제도로 이주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금속세공품). BC 2500년을 전후해 크레타 섬과 키클라데스 제도 및 그리스 본토 남부 지역에서는 이미 금속 문화가 꽃을 피웠다. 초기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만든 금속연장으로는 도끼와 단도, 수염을 뽑는 족집게 등이 있었다.

이무렵 에게 해 거의 전역에 여러 개의 방을 가진 집들이 세워졌다.

크레타 섬에는 그 고장 통치자들의 저택으로 확인된 건물들이 남아 있다. 유적지에서 점토로 구운 타일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타일의 집'이라 부르는 본토의 정착지 레르나에 있던 집은 지붕 덮인 발코니가 딸린 2층집이었다.

크레타 섬에서 발견된 공동 무덤은 씨족이나 친족 묘지로, 여러 세대가 대대로 사용한 것 같다(→ 매장). 일부 무덤에는 수백 명이 묻혔다고 알려져 있으며 다양한 건물만이 아니라 동굴과 바위틈도 무덤으로 이용되었다.

둥근 무덤은 크레타 섬 남부의 메사라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으로, 땅 위에 세워진 이 무덤은 주위에 거대한 돌담을 둘렀고 그 위에는 아마 통나무와 짚이나 널빤지를 이었을 것이다.

입구 앞에 의식을 치르는 방이 딸린 부속 건물을 지어놓은 무덤도 있었고 옆에 공물을 바치는 방이 있는 무덤도 있었다. 무덤이 유해로 가득 차면 그 위에 새로운 층을 얹거나 부속 건물의 일부를 매장실로 이용했다. 때로는 오래된 유해를 별관으로 옮기고 그 자리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덤 안팎에서 공물을 바치는 장면을 묘사한 꽃병 그림이 암시하듯 이런 매장과 관련된 의식이 많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스 본토에서는 무덤에 대개 몇 구의 시체만 묻었다. 이는 그 무덤이 크레타 섬에 있는 무덤처럼 씨족이나 친족의 대규모 묘지가 아니라 가족 묘지였다는 것을 나타낸다.

에게 해 전역에서 발견된 무덤 근처의 도자기들은 모두 손으로 만든 용기였다(→ 그리스 도기). 독특한 타원형 그릇은 당시 본토에서 사용한 전형적인 국그릇으로, 전체적으로 불그스름하거나 검은 빛을 띠고 있으며 크레타 섬의 도자기는 색깔은 비슷하지만 표면에 얼룩무늬가 있다.

청동기시대에는 금·은으로도 그릇을 만들었고 금제 국그릇과 금·은 장신구를 비롯한 몇 가지 유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 지역에서 만든 점토 항아리와 도장에는 소용돌이 무늬(파도를 나타냄) 사이에 노가 많이 달린 배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 배들은 뱃머리가 높고 그 위에는 대개 물고기를 상징하는 깃발이 꽂혀 있으며 고물은 낮고 용골이 고물너머로 쑥 튀어나와 있다. 이런 종류의 배로 시리아와 이집트까지도 항해가 가능했던 것 같다.

시리아와 이집트의 유물에 크레타인의 솜씨와 이 무렵의 풍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청동기 말기의 에게 문명

그리스 본토의 초기 청동기시대는 새로운 민족이 키클라데스 제도와 본토 남부 지방으로 이동해 오면서 막을 내렸다.

이 민족 이동은 그 지역의 초기문명이 갖고 있던 통일성을 깨뜨렸다. BC 2000년이 되기 직전경에 본토의 많은 마을이 불타버렸으며 그후에 지어진 집들은 더 원시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집들은 원주민 부락을 불태운 뒤 그 자리에 정착한 외부 침입자들이 지은 것이 분명하다. 인도유럽어족의 일파인 북방 민족의 침입은 BC 2000년경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은 분명 유목민이었고 이들이 그리스에 말[馬]을 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많은 학자들은 이 민족 이동을 '그리스인의 도래'로 보고 있다.

아티카의 엘레우시스와 양쪽 해안에서는 이제 매장 방식이 종래의 단독 매장 방식에서 좀더 큰 가족묘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슐리만이 미케네에서 발견한 수혈식(竪穴式) 분묘는 손으로 들고 다닐 수 있는 금제 장신구와 무기를 부장품으로 택했다는 점에서 거의 유목민적이다.

이 수혈식 분묘에는 여러 해 동안 많은 시체가 매장되었다. 분묘 유적은 그 당시 장례 의식이 매우 발달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몇몇 무덤들을 덮고 있는 커다란 돌판에는 죽은 사람이 전차를 타고 전쟁터로 나가거나 사냥하러 가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그리스 본토에서 전차가 쓰였다는 가장 오래된 증거다.

크레타 섬은 키클라데스 제도나 본토에서 일어난 민족 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 같다.

크레타 섬

ⓒ Own photo/wikipedia | CC BY-SA 3.0

그러나 이곳에서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크레타 섬의 중심지인 크노소스와 파이스토스 및 말리아에는 넓은 직사각형의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궁전들이 세워졌는데 이들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건축된 것 같다.

당시에 쓰인 문자 중 처음 발견된 것은 BC 2000년경의 것으로 크레타에서 발견되었다. 이 문자는 동물이나 사물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림문자 또는 상형문자라고 부른다. 이 문자의 체계는 크레타에서 만들어진 것 같지만 아마 이집트나 시리아 문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크레타에서는 상형문자와 더불어 이것을 좀더 단순하게 도안한 선문자(線文字)도 사용되고 있었다.

후기(BC 1700~1450경)에는 좀더 발달한 선문자가 크레타 섬의 여러 지역에서 쓰였다. 이것은 BC 15세기말부터 크레타 섬과 본토에서 널리 쓰인 변형 선문자(선문자 B)와 구별하기 위해 선문자 A라고 부른다(→ 선형 A문자, 선형 B문자). 청동기시대 에게 해 지역에서 쓰인 글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크노소스에서 발견된 것처럼 대부분 점토판에 새겨져 있다.

크노소스 점토판에는 인사(人事) 문제와 동물, 직물, 무기, 저장된 보물, 종교적 제물 등에 관한 처리 내용이 써 있다.

BC 18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갈 무렵 크레타 섬에는 여러 가지 재난이 일어났다. 크노소스와 말리아의 궁전이 손상되었고 다른 중심지들은 화재로 파괴되었다. 그 원인은 자연 재해나 내란, 또는 본토에 사는 그리스인의 침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재난이 일어난 뒤에도 200~300년 동안 에게 해 지역의 청동기문명은 가장 발전했고, 이 시기에 크레타 문명도 절정에 이르렀다.

궁전들은 전보다 더욱 웅장하고 화려하게 복구되었으며 긴 직사각형의 안뜰을 둘러싸고 수많은 방들이 세워졌다. 그 궁전들은 대부분 2층이나 3층이었고 크노소스에는 자그마치 5층짜리 궁전도 있었던 것 같다.

파이스토스에 있는 아름다운 제례용 계단은 궁전 구내에 제례의식을 위한 구역이 따로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제식을 위한 방의 회반죽을 칠한 벽은 화려한 색깔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 그림에는 대부분 정교한 옷차림을 한 여신이 그려져 있고 여신 배경에는 신성한 춤이나 황소 뛰어넘기 같은 의식 장면이 나타나 있다.

황소 뛰어넘기는 종교나 마술에 근거한 행위였던 것 같다. 이 그림들의 크기는 실물 크기에서부터 세로 길이 5cm밖에 안되는 작은 것까지 다양하다. 벽화는 크레타 예술가들이 가장 뛰어난 업적을 이룬 예술 분야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단편(斷片)밖에 남아 있지 않다. 꽃병·도장·장신구 따위를 만드는 소규모 예술의 수준은 고고학적 유물에 더욱 잘 나타나 있다.

BC 1600년부터 BC 15세기말까지 절정에 이르렀던 크레타 문명은 또 한차례의 잇따른 재난으로 종말을 맞이했다.

BC 1500년경 테라 섬의 화산이 폭발해 주변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다. 크노소스는 이 화산 분화에 앞서서, 또는 분화와 함께 잇따라 일어난 지진으로 파괴되었고 크레타 섬 북부 해안의 마을들은 지진으로 인한 해일이 덮친 것 같다. 후세의 그리스 전설에 나오는 데우칼리온의 대홍수이야기는 이 무렵 역시 본토 해안을 덮친 해일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화산이 폭발한 뒤에도 크레타 섬은 BC 15세기 중엽까지 비교적 번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BC 15세기 중엽 크레타 섬의 중부와 남부에 있는 많은 주요 도시들이 화재로 불타버렸고 그후는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그들이 폐허에 집을 다시 짓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 존재했던 사회 질서가 완전히 허물어진 것을 의미한다. 폐허가 된 궁터에서 금붙이나 은붙이가 거의 발견되지 않은 사실로 보아 크레타 섬의 많은 궁전과 집들은 화재로 파괴되기 전에 이미 약탈당한 듯하다.

이 섬을 약탈한 사람들은 아마 본토에서 건너온 정복자들이었을 것이다. 이 정복자들은 애초에 크레타 섬에서 배웠던 관료제도를 크레타 섬에 다시 강요했을 가능성이 있다.

BC 14세기와 13세기의 국가는 왕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1명의 군사지도자와 전차장교들이 이끄는 군대를 두었다. 도시는 지방관리들을 우두머리로 하는 계급사회였다. 개인주택의 유적이 궁전이 있는 중심지와 궁전이 없는 시골에서 모두 발견되었고, 미케네의 집들을 비롯한 일부 개인주택은 선문자 B로 쓴 주택 등기문서를 가지고 있었다.

중심지와 중심지를 잇는 도로망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갖추어져 있었다.

BC 15세기부터 본토의 그리스인들이 동쪽을 탐험하기 시작해 동부의 많은 전초기지에 살던 크레타 이주민들을 대신했다. 히타이트인들은 그리스인들의 작전과 침입을 뚜렷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그리스인들을 아히와야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것은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아카이오스(아카이아)족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유명한 트로이 전쟁은 청동기시대 전체에 걸친 일련의 관계와 갈등이 집약된 것인지도 모른다.

에게 청동기시대의 종교

청동기시대에 에게 해 지역에서 숭배한 으뜸 신은 분명 여신이었다.

오늘날 남아 있는 문헌에 '말'이나 '곡식'을 뜻하는 형용사를 수반한 여신에 대한 언급이 있다. 본토의 궁전에는 여신에게 바칠 선물을 들고 행진하는 장면이 대부분 그려져 있다. 크레타 섬에서 발견된 점토여신상은 보통 BC 15~12세기초에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문헌을 보면 제우스와 포세이돈·아테나·아르테미스·아레스·헤르메스 및 디오니소스를 비롯한 그리스 후기의 많은 신들이 이 무렵에 이미 자리를 잡았고, 단순히 우상 그 자체보다는 훨씬 면밀하게 공들여 만든 구체적인 신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청동기시대 말기가 언어 자체뿐 아니라 종교와 제식에서도 뒤이은 그리스 시대와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시대에는 죽음의 세계에 관해 2가지 생각이 존재했다. 하나는 바다 저편에 엘리시온이라는 낙원이 있으며 죽은 사람은 그곳에서 육체적으로 편안한 새 삶을 얻는다는 생각이고, 또 하나의 생각은 서사시의 전통에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더 널리 퍼졌던 생각으로, 열등한 사람들이 사는 저승(하데스)이 지하에 있다는 것이다.

각각 크레타와 미케네의 전통을 대표하는 이 2가지 생각은 끝내 융합하지 않았으며 별개의 노래와 이야기 속에 따로따로 살아남았다.

에게 청동기시대의 종말

BC 13세기말에 접어들면서 본토의 궁전들은 잇따라 불탔지만 미케네에는 계속 사람이 살았으며, 그들은 BC 12세기에 도자기 생산과 무역으로 대단히 풍족하고 활기찬 생활을 누렸다.

그러나 필로스는 폐허가 되었고 아테네에는 사람이 살기는 했지만 부유하지는 못했다. 피난민들이 이주해 만들었거나 독자적으로 세워진 새로운 중심지들이 칼키스 남쪽에 있는 에우보이아 안쪽 해안의 레프칸디처럼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존재가 되었다. BC 1000년경에는 새로운 민족이 그리스와 크레타 및 여러 섬들과 키프로스에 들어와 정착했다.

도리스 부족민을 비롯한 여러 민족 집단인 이들은 허약해진 나라에 들어와 원주민을 내쫓거나 외딴 지역으로 몰아넣은 것 같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세계사

세계사와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



[Daum백과] 청동기 시대의 에게문명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