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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니니의 중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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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바노 8세의 후원

우르바노 8세(1623~44 재위)가 교황 직위에 오르면서 베르니니는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예술적으로도 발전했다.

우르바누스 8세(Urbanus VIII)

ⓒ Gian Lorenzo Bernini/wikipedia | Public Domain

우르바누스 8세는 그에게 회화와 건축도 다룰 것을 촉구했다. 그의 그림은 조각만큼 뛰어나지는 않지만 몇 점, 특히 2점의 자화상(1620경·1640경,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은 매우 뛰어나다. 최초의 건축 작품은 로마에 있는 개조된 산타 비비안나 성당이다.

그 무렵 베르니니는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있는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울 상징적인 구조물을 의뢰받았다. 그리하여 1624~33년에 금박을 입힌 거대한 청동 닫집을 만들었다.

나선형 장식의 기둥들과 금속으로 된 옷주름 처리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나 장소 위에 설치해 존경을 표시하는 닫집을 생각나게 한다. 이 작품에서 그의 독창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부분은 4명의 천사가 떠받치고 있는 듯한 윗부분의 보주(寶珠)와 그위에 얹혀 있는 십자가이다. 이 닫집은 우르바누스 8세의 개인적인 상징물이기도 하다. 닫집의 꼭대기 근처에는 교황의 삼중관이 있으며, 기념물 전체는 바르베리니 가문의 상징인 벌과 해, 월계수 덩굴들로 아로새겨져 있다. 이 닫집은 완벽한 조화로 배치되어 있어 그 높이가 4층 건물만큼이나 된다고는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 닫집은 또한 성 베드로 대성전 안에 설계되어 있는 모든 장식의 중심이기도 하다. 대성전의 돔을 받치고 있는 4개의 기둥은 거대한 조상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인 〈성 롱기누스 St. Longinus〉는 베르니니가 설계한 것이었다.

베르니니의 건축 활동은 주로 1629년 카를로 마데르노가 죽은 뒤에 이루어졌는데, 그해에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과 팔라초 바르베리니의 건축일을 맡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직접 작품을 만들기도 했지만 주문이 늘어나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작업실을 차리고 작업계획을 세워 한 작업조가 만든 조각품과 장식품들이 전체적으로 일관된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또한 베르니니는 언제나 열렬한 가톨릭교 신앙에 입각해 작품을 만들었다(매일 미사에 참석하고 1주일에 2번 영성체했음).

그는 종교미술의 목적이 신자들을 가르치고 신앙을 북돋우며, 가톨릭 교회의 전도자로서 봉사하는 것이라는 트리엔트 공의회(1545~63)의 공식 교리에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종교미술은 항상 알기 쉽고 사실적이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독실한 믿음을 위한 정서적인 자극제로서 작용해야 한다. 베르니니의 종교미술은 주로 그러한 원칙들에 따르려는 진지한 노력의 결과로 발전했다.

그는 우르바누스 8세 밑에서 무덤이나 분수와 같은 새로운 여러 종류의 기념물들도 만들기 시작했다. 우르바누스 8세의 무덤은 팔을 위엄있게 들어올린 채 앉아 있는 교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아래에 금을 입힌 청동 석관(石棺) 옆으로 각기 사랑과 정의를 상징하는 2개의 흰 대리석상이 있다.

석관 위에는 죽음의 신을 나타내는 형상이 묘표(墓標) 역할을 하는 잎사귀 위에 우르바누스의 이름을 쓰고 있는데, 베르니니는 여기에서 콘체토(이탈리아어로 '착상' 또는, 예전에는 '기발한 착상'이라고 했음)라는 생생한 주제를 사용해 새롭고 다채로운 무덤의 여러 요소들을 하나로 통합하고 있다. 이 시기에 또한 혁명적인 일련의 작은 묘비들을 설계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마리아 라기의 묘비(1643)이다.

베르니니가 로마 시에 공헌한 가장 두드러진 업적은 분수들이다.

맨 처음 만든 분수는 스페인 광장에 있는 〈바르카차 Barcaccia〉(1627~29)로서, 이것은 조각과 건축을 융합한 점에서 성 베드로 대성전의 닫집과 비슷하다. 〈트리톤 Triton〉은 고대 로마의 건축학적인 분수를 극적으로 변형시킨 것이다. 전통적인 기하학 양식의 광장 분수로 겹쳐진 모양의 분수못은 마치 살아 있는 듯하며, 4마리의 돌고래가 해신(海神)을 떠받치고 있는 거대한 조개껍질을 들어올리고 있으며, 해신은 고둥에서 물을 뿜어올리고 있다.

그러나 베르니니의 초기 건축 작품들이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었다. 1637년 그는 성 베드로 대성전의 정면 위에 종탑들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1646년 그 무게로 말미암아 성당 건물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종탑들은 철거되었고 베르니니는 한동안 신뢰를 잃었다.

인노첸시오 10세와 알렉산데르 7세의 후원

베르니니의 가장 장대한 공공기념물들은 1640년대 중반에서 1660년대 사이에 만들어졌다.

로마의 나보나 광장에 있는 '4대강 분수'는 우묵한 바위 위로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가 우뚝 솟아 있으며, 바위 주변에는 17세기 세계의 4대강(유럽의 도나우 강, 아프리카의 나일 강, 아시아의 갠지스 강, 아메리카 대륙의 라플라타 강)을 상징하는 4개의 대리석상이 놓여 있다. 교황의 양 팔과 올리브 가지(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紋章)를 물고 있는 오벨리스크 위의 비둘기는 그것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뜻(다시금 힘을 얻은 교황이 하느님 밑에서 세계를 지배함)을 명확히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뚜렷한 상징적 표현에도 불구하고 베르니니의 분수는 시각적으로도 그 장대함을 과시하는 불멸의 작품이다. 베르니니의 종합적인 상상력은 또한 연극 작품들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연극의 본질은 그의 미술의 본질과 똑같았다. 그는 관객과 직접적이고도 더러는 예기치 않게 접촉하기 위해 구태의연한 관행을 깨뜨렸다. 그는 무대에서 실제로 불을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심지어 한번은 무대를 물에 잠기게 해 관객을 잠깐이나마 그 장면에 실제로 참여하는 배우로 만들기까지 했다.

베르니니의 성숙한 예술성을 보여주고 있는 가장 뛰어난 작품은 로마의 산타 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 있는 코르나로 예배당으로, 여기에서는 초기의 발전 과정이 절정에 이르러 있다.

페데리고 코르나로 추기경이 의뢰한 이 예배당은 그 작은 교회의 수랑(袖廊)에 있다. 그 예배당의 초점에는 스페인 카르멜 수도회의 위대한 개혁가인 '아빌라의 테레사'(1515~82)가 체험한 신비한 경험을 묘사한 〈성녀 테레사의 탈혼 The Ecstasy of St. Teresa〉이 놓여 있다.

성녀 테레사의 진술을 토대로 한 이 조각은 한 천사가 나타나 신성한 사랑의 불 화살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는 테레사의 신비 체험을 묘사하고 있는데, 성녀는 요동치는 물결 모양의 옷주름으로 온통 휩싸인 채 무아(無我) 상태에서 황홀경에 빠진 모습으로 천사와 함께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빛에 싸여 건축과 장식 요소들로 호화롭게 꾸며져 있는 제단 너머의 벽감(壁龕) 안에 들어 있다. 그 좌우에는 오페라 좌석과 비슷한 공간 속에 대리석상으로 묘사된 코르나로가(家)의 수많은 가족들이 대화나 독서 또는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코르나로 예배당은 회화적인 조각이나 건축에 대한 베르니니의 이상을 최고조로 실현시킨 것이다. 성녀 테레사와 천사의 조상은 흰 대리석으로 조각되어 있지만, 관람자는 그것이 입체상인지 고부조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조상의 위쪽과 뒤쪽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떨어지는 자연광도 뒤쪽에 조각된 금빛 광선과 더불어 군상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성녀 테레사의 탈혼〉은 전통적인 의미로는 조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종교적 드라마에서의 예배자도 포함해 조각과 그림, 빛 등으로 이루어진 회화적인 장면이다.

베르니니의 가장 뛰어난 건축 작품은 성 베드로 대성전 앞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주랑(柱廊)이다.

이 커다란 공간은 주로 부활절이나 특별한 행사 때 교황의 축복을 받으려고 모여드는 군중을 수용하는 데에 쓰였다. 베르니니는 교회에 달린 사다리꼴 앞마당 앞에 거대한 타원형 광장을 설계했는데, 그는 이 형체를 어머니의 감싸는 두 팔에 비유했다. 벽이 없이 독립해 있는 주랑은 드나들 수 있는 울타리의 필요성에 대한 기발한 해결책이었다. 방문객을 교회로 인도하는 이 타원형 광장은 지나치게 폭이 넓은 대성전의 정면을 보완해 균형을 이루고 있다.

베르니니가 설계한 타원형 광장의 중심에는 1586년 식스토 5세가 이 교회 앞으로 옮겨놓은 바티칸 궁의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그는 마데르노가 예전에 만든 분수를 타원형 광장의 긴 축선 상에서 오벨리스크와 타원의 둘레 사이에 옮겨놓고,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그 반대편에 배경의 조화를 위해 똑같은 분수를 하나 더 만들어놓았다.

또다른 그의 작품인 산 안드레아 알퀴리날레 성당 내부와 비교해볼 때 그 타원형 공간은 비슷하면서도 그 의미와 기능에서 약간 차이를 보여 흥미를 끈다.

베르니니의 가장 장대한 종교 장식품은 중세에 나무로 만든 교황좌(座)에 씌울 금박 청동덮개인 성 베드로의 옥좌(1657~66)이다.

베르니니의 임무는 그 옥좌의 장식 덮개를 만드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성 베드로 대성전을 찾아오는 순례 행렬을 위해 대성전의 앱스[後陣]에 의미심장한 장식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 옥좌는 초기 교회의 신학박사들(성 암브로시오, 성 아타나시오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성 아우구스티노)을 나타내는 4개의 인상적인 청동상으로 받쳐 있는 듯이 보인다.

그 위로는 구름과 햇살 위로 천사들의 금빛 후광이 타원형 창문에 그려져 있는 '성령의 비둘기'에서 퍼져나오고 있다. 이 비둘기 모양의 성령에서 퍼져나오는 자연의 빛은 하느님이 교회를 매개로 세상에 골고루 내려보내는 은총의 물결을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것이다. 이 옥좌는 대성전 바깥의 타원형 광장과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으면서도 그 양식이 매우 달라서 놀랍도록 다재다능한 그의 솜씨를 보여준다. 두 작품은 모두 키지 가문 출신의 교황인 알렉산데르 7세(1655~67 재위)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베르니니는 대규모 작업중에도 계속해서 몇 점의 인물 흉상을 만들었다.

그중 최초의 것은 모데나 공작인 에스테가(家)의 프란체스코 1세의 흉상(1650~51, 모데나 에스텐세 미술관)으로, 이 작품에서 그는 초상조각의 혁명을 이루었다.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의 흉상은 꽤 자유분방하고 자연스럽지만, 바로크의 이념을 대변한 인물인 보르게세 못지 않게 바로크 시대의 이상들을 나타내는 영웅적인 과시와 위풍당당한 자태를 보여준다.

프랑스 여행

베르니니는 1665년 4월말쯤 파리로 가서 11월 중순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이것은 그가 로마를 장기간 떠나 있었던 유일한 시기였다. 그 여행은 루이 14세가 여러 해에 걸쳐 그를 초청한데다가 예수회 회장인 대부 올리바의 권고로 이루어졌다. 여행의 목적은 새 왕궁의 설계였다. 이무렵 베르니니의 명성은 대단해 군중들이 그가 지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각 도시의 거리에서 줄을 이었고 파리에서의 환영회도 대단했다. 그러나 그가 프랑스의 미술과 건축을 무시하고 이탈리아의 미술과 건축만을 오만하게 극찬하자, 민감한 프랑스 사람들은 곧 불쾌해지고 말았다(루브르 박물관). 예를 들어, 베르니니는 지금은 없어져버린 튈르리 궁을 '꼬마들의 대부대'를 생각나게 하는 "크지만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파리의 모든 그림을 다 합쳐도 이탈리아 미술가인 구이도 레니의 그림 1점보다 못하다고 평했다.

이러한 말들 때문에 그는 프랑스 왕궁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으며, 그가 제시한 루브르 궁의 설계도가 거절된 것도 어느 정도는 영향이 있었다. 베르니니가 프랑스에서 유일하게 남긴 작품은 위엄있게 앞을 쳐다보는 태양왕 루이 14세의 커다란 흉상이다. 선으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수직적이고 안정된 이 초상조각은 그뒤 100년 동안이나 왕의 초상조각 제작의 모범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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