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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인돌은 흔히 뚜껑 구실을 하는 넓은 덮개돌을 여러 개의 굄돌이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일종의 무덤방으로 꾸민 이 구조물은 유럽 신석기시대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고인돌은 굄돌이 뚜렷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서 한국·만주·일본·유럽·영국 제도·북아프리카에 분포한다.
한국에서는 고인돌을 지석묘라고도 한다. 한국에는 많은 고인돌이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 퍼져 있다. 주로 강을 낀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하며, 골짜기 방향이나 강·해안선을 따라서 만들어졌다. 고인돌은 제단고인돌과 무덤고인돌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무덤고인돌은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굄돌에 따라 탁자식고인돌·바둑판고인돌·구덩식고인돌로 나뉜다. 우리나라에는 땅 위에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는 구덩식고인돌이 가장 널리 분포하고 있다.
흔히 뚜껑 구실을 하는 넓은 덮개돌을 여러 개의 굄돌이 받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일종의 무덤방으로 꾸민 이 구조물은 유럽 신석기시대에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돌멘'(dolmen)이라는 말의 뿌리는 켈트어이며 브르타뉴어는 아닌 것 같다. 고인돌은 굄돌이 뚜렷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형태로서 한국·만주·일본 등을 비롯하여 유럽, 영국 제도, 북아프리카에 분포한다.
한국의 고인돌
지석묘(支石墓)라고도 한다.
한국 선사시대 여러 유적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분포관계를 보면, 주변지역인 중국에서는 산둥 반도와 랴오닝 지역의 남부 저장 성 부근에서 가끔 보이며, 일본은 규슈 지역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국에는 이들 지역과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수만 기(基)에 해당하는 많은 고인돌이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 퍼져 있다. 주로 강을 낀 낮은 구릉지대에 분포하며, 주변의 자연지세에 걸맞는 골짜기 방향이나 강·해안선을 따라서 만들어졌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이어오는 자연숭배 사상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강 옆의 들판이나 바닷가 부근에 있는 것은 물과 깊은 관련이 있고, 수적으로 많이 분포하는 평안·황해·전라지역은 서해안이라는 점에서 바다와 고인돌 사회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목된다.
기능면에서 볼 때, 당시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믿고 있던 어떤 대상이나 자연의 힘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가지의 의식을 거행하던 '제단고인돌'과 죽은 사람을 묻기 위하여 만들었던 '무덤고인돌'로 크게 나눌 수 있으며, 우리나라에 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이 무덤고인돌이다.
무덤고인돌의 형식을 보면, 먼저 밖으로 드러난 모습인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굄돌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뉘며, 덮개돌 밑에 있는 무덤방의 짜임새는 만든 방법과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다.
탁자식고인돌(북방식·전형)은 4개의 판판한 돌을 세워서 지표 위에 네모꼴의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덮개돌의 하중을 받고 있는 긴 벽은 그대로 있지만, 고인돌을 만든 다음 나들이문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되는 짧은 벽은 거의 파괴되어 없어진 상태이다.
이러한 형식은 황해·평안도의 서북지역에 많이 있고 전라남도 나주, 경상남도 거창에서도 드물게 나타난다.
바둑판고인돌(남방식·기반식)은 땅 위에 놓인 3~4개 또는 그 이상의 받침돌이 덮개돌을 받치고 있는 것으로, 땅 속에 있는 무덤방은 구덩이·돌널·돌덧널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구덩식고인돌(무지석식·개석식)은 땅 위에 커다란 덮개돌만 드러나 있는 것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많이 분포하고 있어 고인돌의 기원을 밝히는 데 중요하며, 전북 고창지방에 있는 것은 덮개돌이 무려 170t 가량 된다.
고인돌은 상당히 일찍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왔다.
옛 기록으로는 BC 78년 〈전한서 前漢書〉에 처음 나타나며, 우리나라에서는 1200년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에 금마군(지금의 익산군)의 고인돌이 소개되었다. 광복 이후 발굴된 여러 유적 가운데 고인돌의 수가 가장 많다. 제천 황석리와 양평리, 달성 진천동 유적에서는 사람뼈가 나왔다. 껴묻거리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토기가 있는데, 간혹 늦은 시기의 빗살무늬토기도 나온다.
석기는 대부분 간돌검[磨製石劍]·돌촉[石鏃] 등이다.
가끔 청동유물을 찾을 수 있는데, 최근 여천 적량동유적에서는 한 유적에서 여러 점의 비파형동검이 나와 주목된다. 드물게, 꾸미개인 곱은옥[曲玉]과 대롱옥[管玉]이 나오고 사슴이나 소과[牛科]의 동물, 돼지 등 짐승뼈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다. 이는 고인돌을 만들 때 치렀던 제의나 묻힌 사람의 영생을 바라는 내세에 대한 믿음의 한 부분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고인돌사회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X'자가 새겨진 자갈돌이 옥천 안터유적과 화순 대전유적에서 나왔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값이 나온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발굴조사에서 찾은 껴묻거리를 통하여 대강 연대를 살펴보면, 양평 양수리의 연대측정값이 3,900±200BP로 드러났고 안터고인돌에서는 늦은 시기의 빗살무늬토기가 나왔으며, 담양 문학리, 충주 하천리, 제천 함암리 고인돌에서는 이른 철기시대의 토기와 쇠똥[鐵滓]을 찾았다. 이러한 사실로 보아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늦은 신석기시대부터 조금씩 만들어지다가 청동기시대에 널리 퍼졌고 이른 철기시대까지도 지역에 따라 가끔 만들었던 것 같다.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퍼져 있는 고인돌의 기원에 관해서는 바다를 통해 동남아시아 또는 중국 동북부지역에서 전해졌다는 전파설과 함께 주변지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많다는 점과 축조연대가 이르다는 점에서 주변지역과 관계없이 자체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자생설이 맞서고 있어 아직까지 뚜렷하게 설명하기는 어렵다.
커다란 덮개돌을 옮겨 고인돌을 만드는 데는 훌륭한 기술과 많은 사람들의 힘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러한 기술과 노동력은 선사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지금까지 밝혀낸 당시의 여러 생활상으로 보아 고인돌을 만들 때는 사회적·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공동체의식 속에서 마을 전체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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