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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고고학의 시대호칭 중의 하나.
New Stone Age라고도 함.
인류문명의 발전단계의 하나이자 석기시대의 새로운 부분으로서, 대개 구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 사이에 해당한다.
영국의 고고학자 J. 러벅은 그가 쓴 〈선사시대 Prehistoric Times〉에서 석기시대를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로 처음 나누었다. 구석기시대가 플라이스토세에 속하는데 반해 신석기시대는 홀로세에 속하며, 구석기시대에는 타제석기만을 사용했던 데 비해 신석기시대는 마제석기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석영의 일종인 플린트제의 정교한 타제석기도 사용했다.
장신구로서 자연금을 이용하는 일은 있었지만, 구리·철 등의 금속을 가공하는 지식은 없었다. 또 농경과 가축의 사육, 토기의 사용 등도 기준이 될 수 있다. 이중에 러벅이 가장 중시한 것은 마제석기의 출현이었지만, 타제석기밖에 볼 수 없는 덴마크의 패총문화(에르테뵐레 문화)를 신석기문화로 분류했다.
중요한 것은 러벅은 자신의 구석기·신석기 개념을 유럽에 한하여 적용하고자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후 그의 뜻과는 달리 이 개념은 세계 각지에서 채용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영국의 L. 브라운에 의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사이에 과도적인 단계로서 중석기시대를 두는 것이 제창되었으며, 20세기에 와서 중석기시대의 개념이 학계에 널리 쓰이게 되면서, 러벅이 주장한 '신석기시대'의 일부는 중석기시대로 분류되어 에르테뵐레 문화 역시 현재는 중석기시대로 분류되고 있다.
유럽, 아프리카 북부, 서아시아에서의 조사·연구의 진전은 플라이스토세에서 홀로세로의 전환, 타제석기만에서 마제석기의 출현으로의 전환, 그리고 수렵·어로·채집에서 가축사육·농경으로의 전환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
또 정교하게 만든 타제석기가 신석기시대를 특징짓는 것만은 아니며, 칼·화살촉·낫으로서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도 중요하게 쓰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위에서 기술한 3가지의 전환 중 지질학적·석기제작기술사적인 구분이 아니라 경제사적인 기준으로 신석기시대를 정의하는 방법이 영국의 V. G. 차일드에 의해 제창되었다.
그에 의하면, 앞의 구석기시대·중석기시대가 식량의 채집경제단계였던 데 비해 신석기시대는 식량의 지급자족을 위한 생산경제단계에 속하며, 산업혁명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이 큰 비약은 '신석기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식량생산에 의해 생긴 여유는 마침내 전문기술자를 낳았으며, 결국은 계급의 성립, 도시·국가의 탄생을 촉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차일드에 의해 새로이 정의된 신석기시대의 개념은 범세계적으로 공통하여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식량채집에서 식량생산으로의 비약적인 발전이 지방에 따라서는 반드시 석기시대에 실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남시베리아의 알타이 지방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연해주(沿海州) 등지에서는 철기시대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신석기시대의 개념은 세계 각지에서 몇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곳도 있다.
서아시아에서는 농경·가축사육의 역사가 1만 5,000년 전(이하 탄소 동의원소법의 표시값)까지 거슬러올라간다고 한다.
처음에는 토기를 쓰지 않았고(무토기·선토기 신석기시대), 8,000~9,000년 전에 토기가 등장했다. 서아시아가 청동기시대에 들어선 것은 6,000년 전의 일이다. 따라서 유목이라는 생활양식은 농경사회가 성립한 후 분기했다고 보아진다. 유럽에서는 5,000~7,000년 전에 농경과 소·돼지·염소·양 등의 가축사육이 시작되었으며, 토기의 사용도 이루어졌다. 전형적인 신석기시대인 4,000~5,000년 전에 와서야 청동기시대로 이행한다.
그러나 핀란드에서 서시베리아에 걸친 삼림지대에서는 5,000년 전쯤에도 농경·가축사용을 알지 못한 채 토기와 마제석기를 사용하는 식량채집단계의 문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신석기시대문화로 취급되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연해주에 걸친 지역에도 토기를 사용하는 식량채집단계의 문화가 있었으며, 초기에는 타제석기를 주로 썼으나 후에는 마제석기가 출현했다.
이 지역의 식량채집단계의 문화 역시 신석기시대문화로 취급된다. 또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 분지에서는 3,000~4,000년 전에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6,000년~7,000년 전에 곡물·가축·토기·마제석기가 함께 존재하는 문화가 있었고, 뒤늦게 3,500년 전에 청동기시대를 맞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마제석기의 출현을 신석기시대의 지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농경이 행해졌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청동기시대의 시작에 대해서는 탄소 14법에 의해 5,500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중국보다 앞선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 등의 명칭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석기(石期)·고기(古期)·형성기 등의 고유한 명칭을 사용해 분류한다. 마제석기는 6,000~7,000년 전인 고기에 출현했고, 토기와 농경문화는 5,000~6,000년 전인 형성기에 시작되었다.
한국의 신석기시대
우리나라에서 신석기시대 유적이 알려지고 조사된 것은 1916년경부터이나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때는 해방 이후 1950년대부터이다.
북한에서는 1950년에 들어서면서 평안남도 온천군 운하리 궁산유적을 발굴하기 시작하여 평양특별시 승호구역 금탄리(1956 발굴), 청진시 농포동(1956 발굴), 황해북도 봉산군 지탑리(1957 발굴), 평안북도 의주군 미송리 동굴(1959 발굴),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 구석(1959~61 발굴) 등을 조사했다. 그밖에 두만강 유역과 동해안 일대의 함경북도 영안군·회령군·유선군·종성군·청진시 및 황해남도 은천군·송화군·은율군 등의 지역에 대한 조사를 하여 '유적분포정형'을 만들어갔다.
그결과 평안남도·황해도·경기도 일원을 포함하는 우리나라 서해안의 빗살무늬토기문화권(궁산문화권)을 설정했고 사슴뿔로 만든 괭이와 뒤지개, 멧돼지 이빨로 만든 낫 등의 출토유물을 가지고 원시농경을 추론했다.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 농사짓기는 이때에 처음으로 주장되었다. 유적이 이루어진 시기에 대해서도 토기에 섞인 석면의 존재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분명하게' 추정연대를 제시했는데 궁산문화의 상한은 BC 1500년 이상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1950년대의 남한지역 발굴은 1957년 국립박물관이 서해안 일대에서 신석기시대 조개더미를 조사한 정도인데, 이때 보고된 유적으로는 경기도 부천군 덕적도·소야도·승봉도, 전라남도 무안군 대흑산도의 조개더미 등이 있다.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서포항(1960~63 발굴), 황해남도 해주시 용당리(1960 발굴), 자강도 중강군 토성리(1960~61 발굴)·장성리(1960 발굴),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1962 발굴),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1964, 1965, 1966 발굴) 등의 유적발굴과 평안북도·함경북도 내의 유적답사가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적은 서포항이다. 이곳을 발굴함으로써 구석기유적을 찾게 되었으며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에 대한 종래의 관점을 완전히 바꾸게 되었다. 지금까지는 궁산유적과 지탑리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방의 뾰족밑빗살무늬토기문화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르다고 보아왔으나 동북지방의 납작밑토기문화는 BC 5000년대에 해당되므로 더 앞서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남한에서는 1960년대초에 한강유역의 서울 암사동과 하남 미사동 및 춘천 교동 동굴에 대한 조사·보고가 있었다.
여기서는 우리나라 신석기문화가 시베리아 계통이며 수렵·어로를 주로 하고 BC 3000~2000년에 시작되었는데 시베리아 쪽의 빗살무늬토기문화가 서해안으로 들어와 남해안을 거쳐 동북지방으로 전파되었다고 보았다. 1960년대 후반에 가면서 신석기유적 발굴이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김해 농소리(1964 발굴), 부산 다대포(1966 발굴), 사천 구평리(1966 발굴), 양산 신암리(1966 발굴) 등 주로 남해안지방의 조개더미유적과 암사동 집자리유적(1967, 1968 발굴)이 대표적이다.
외국인인 모어와 샘플은 1963~64년에 동삼동을 발굴했는데, 동삼동의 조개더미는 일제강점기부터 여러 번 시굴된 바 있으며 보고자들마다 의견이 달라 논란이 많던 곳이다. 이들은 종래 생각되어오던 것과는 달리 남해안식의 태선심선문이 영선동에서 주로 출토되는 압날문(押捺紋)보다 나중 시기에 속한다는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1969~71년에는 국립박물관과 서울대학교의 연합발굴이 실시되었다.
1970년대 이후 북한지역의 발굴에는 평안북도 용천군 용연리(1972 발굴), 신암리 제4지점(1974 발굴), 함경남도 신포시 강상리(1975 발굴), 평양특별시 남경(1979~81 발굴) 등의 유적의 있다.
남한지역의 발굴도 활발하지는 않아 1972년에 부산 금곡동 율리유적을 발굴했고, 1973년에 부산 영도구 아치섬의 철기시대 조개더미를 발굴하던 중 맨 아래층에서 일부 신석기시대의 조개더미를 찾아냈다. 1978년에 발굴한 김해 수가리 조개더미유적과 통영 상노대도 조개더미유적이 자세히 분석·보고되었는데, 여기에 담겨 있는 내용은 남해안지역의 신석기문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한편 샘플은 1960년대의 발굴결과를 1974년 종합·발표하여 남해안 유적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신석기연구에 큰 공헌을 했다. 유적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접근하여 객관적인 유물분류를 하고, 토기·석기뿐만 아니라 출토되는 모든 유물에도 관심을 기울여 동삼동을 통한 신석기문화의 복원에 뚜렷한 업적을 남겼다.
1980년대에 들어오면서 신석기문화 연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했다.
1980년초부터 시작된 양양 오산리유적 발굴로 강원도가 우리나라 신석기문화의 공백지대가 아님을 확인했고, 그 시기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 BC 6000년을 넘어가게 되었다. 유적 발굴은 1980년대말경 더욱 활발해져 1987년부터는 연차발굴로 하남시 미사리유적을 조사하고 있으며, 합천 댐 수몰지구에서 봉계리 및 거창 임불리유적을 찾게 되었다. 이로써 경상남도 내륙지방에도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음이 확인되었다.
최근에는 주암 댐 수몰지구에서 많은 양의 빗살무늬토기들을 찾아내 전라남도에도 신석기시대 유적이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1988년에는 서해안의 조개더미인 시흥 정왕리 오이도, 서산 고남리 유적들과 남해안의 조개더미들인 통영 연곡리 연대도, 욕지도 동항리, 상노대도 산등유적 등이, 1989년에는 여천 군내리 송도유적이 잇따라 발굴되었다.
조개더미유적에서는 유물보존성이 높아 많은 양의 자연유물과 뛰어난 인공유물들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사람뼈가 자주 출토되어 지금까지 거의 전무했던 신석기시대의 사람 연구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신석기시대 유적은 약 150여 군데가 넘으며 전국으로 분포되어 있다.
신석기시대의 빗살무늬토기가 시베리아 계통이라는 주제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여기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시베리아 기원문제는 주로 외국인 학자들에 의한 반론이 있게 되고, 1980년대에 들어와 시베리아 지방의 신석기 연대보다 더 올라가는 오산리유적을 발굴하면서 더욱 퇴조한 듯하다. 가장 많이 연구된 분야는 신석기시대의 시기구분(편년)이다. 남한의 시기구분은 1960년대 이후 한강 유역의 빗살무늬토기를 중심으로 나누다가 동삼동 발굴을 계기로 동삼동 출토의 덧무늬토기에 기준을 맞추었다.
한편 한강유역 빗살무늬토기를 중심으로 편년된 것도 있다. 최근에는 뒤의 것에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방사성탄소 연대를 참고하고 오산리 등을 포함시켜 남북한 전체의 신석기 시기구분이 나오게 되었다. 여기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신석기시대는 전기(BC 6000~3500)·중기(BC 3500~2000)·후기(BC 2000~1000)로 나누어진다. 북한도 신석기시대를 3시기로 나누고 있으나 서포항유적을 중심으로 하며 전기는 BC 5000~4000년, 중기는 BC 3000년 전반기, 후기는 BC 3000년 후반기부터 BC 2000년초로 보고 있어 차이가 있다.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신석기시대의 자료를 볼 때, 우리나라 신석기시대의 자연환경은 지금과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따뜻한 시기가 있었으며, 이에 따라 바닷물의 높이도 더 높은 때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신석기문화는 약 6,000년 전부터 시작되는데, 사람들은 강이나 바닷가에서 움집을 짓고 살며 주로 조개를 채취했기 때문에 먹고 버린 조가비들이 모여 조개더미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도토리·밤 등의 열매를 많이 이용했으며 이른 시기부터 좁쌀 등의 잡곡 농사를 지었다.
물고기를 잡는 데는 강가에서는 그물추를, 바다에서는 이음낚시를 포함하여 낚시를 가장 많이 한 듯하다. 깊은 바다에서 잡히는 물고기뼈들이 출토되어 사람들이 먼 바다까지 나갔음을 알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배만들기와 항해술도 발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깊은 바다에 오랫동안 잠수하여 귀뼈에 변형을 일으킨 사람뼈도 나온다.
짐승뼈가 다양하고 풍부하여 짐승사냥도 활발히 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많이 잡은 종류로는 사슴·노루 등의 짐승과 멧돼지이다. 족제비·너구리·오소리·여우 등의 뼈도 자주 출토되는데 털을 얻을 목적으로 주로 겨울철에 사냥하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집짐승을 기른 흔적은 신석기말경에 나타나는데 무산 범의 구석에서 출토된 집돼지뼈가 있다. 여가에는 치레걸이나 예술품을 만들고 옷도 만들어 입었으며, 외부와의 교역도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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