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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다른 표기 언어 Saint Peter the Apostle 동의어 케파, 시몬 바르요나, 시몬 베드로, 시메온, Simeon, 세인트 피터
요약 테이블
출생 미상
사망 AD 64경, 로마

요약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수제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교황직을 최초로 받은 인물로 생각한다.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 활동 초기에 제자로 부름받았고, 뒤에 예수에게서 반석이라는 의미의 '게파'라는 이름을 받았다. 같은 뜻의 라틴어 petra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알려진다.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예수의 승천 후 그는 예수를 대신하여 교회의 새로운 지도자가 되었으며 헤로데 아그리파세에게 붙들렸다가 도망하여 소아시아 및 안티오키아에서 전도하였다.

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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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는 수제자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지금까지 계속되는 교황직을 최초로 받은 인물로 생각한다. 어부였던 베드로는 예수 활동 초기에 제자로 부름받았고, 뒤에 예수에게서 '게파'(Cephas:'반석'이라는 뜻이며, 같은 뜻의 라틴어 petra에서 베드로라는 이름이 유래함)라는 이름을 받았다.

생애와 제자들 사이에서의 위치

베드로의 생애에 관한 정보는 〈신약성서〉 가운데 4복음서, 〈사도행전〉, 바울로의 편지들, 베드로의 이름으로 기록된 2편의 편지에 한정되어 있다.

원래 그는 히브리어 이름 '시므온', 또는 그 이름의 그리스어 형태인 '시몬'으로 알려진 듯하다. 〈신약성서〉에서 시므온이란 이름은 2번, 시몬은 49번 나온다. 중요한 순간에 그는 '요한의 아들 시몬'(요한 21:15)이라고 불렸고, 〈요한의 복음서〉에는 '시몬'이 17번 나오며, 다른 곳에는 잘 나타나지 않는 '시몬 베드로'라는 합성어를 즐겨 쓴다.

바울로는 반석이라는 뜻의 아람어식 이름, 또는 별명인 '케파'(Kepha)를 그리스어로 음역한 '케파스'(Kēphas:라틴어 음역으로는 Cephas가 됨)를 즐겨 썼지만(10번중 8번은 이 이름을 썼음),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은 그리스어 '페트로스'(Petros)를 약 150번 썼다. 공관복음서(마태 8:14)와 바울로의 편지(Ⅰ고린 9:5)에는 베드로가 요한의 아들이며 결혼을 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있다.

그의 집안은 원래 베싸이다 출신이었지만(요한 1:44) 예수의 선교활동 기간 중에는 갈릴래아 호수 북서쪽의 가파르나움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그와 동생 안드레아가 제베대오의 아들인 야고보, 요한과 함께 어부생활을 했다(루가 5:10).

〈신약성서〉에서 베드로가 직접 한 말이나 그에 관한 내용, 또는 간접적으로 그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수많은 일화에 나타난 그의 행동과 반응들을 통해 베드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우유부단하고 소신없이 행동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태도는 그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여 처음에는 이방인들과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다가 나중에는 거절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갈라 2:11~14). 때로는 단호하기도 하고(사도 4:10, 5:1~10), 경우에 따라서는 무분별하고 경솔하며(루가 22:33), 성급하고 화를 잘 내는(요한 18:10)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또한 자주 온유하면서도 확고한 인물로, 그리고 예수 앞에서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나타나듯이 큰 충성과 사랑을 바칠 수 있는 인물로 묘사된다(요한 21:15~17). 〈신약성서〉는 베드로가 모세율법 훈련을 받지 않았다는 뜻에서 못 배운 사람이라고 전하는데(사도 4:13), 그가 그리스어를 알았는지도 의심스럽다. 그는 깨닫는 데 느렸던 것 같고 실수를 했지만 훗날 책임을 부여받았을 때는 성숙하고 유능한 인물임을 보여주었다. 복음서들은 예수 활동 초기에 베드로가 제자로 부름받았다는 데 일치하지만, 언제 어디서 그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저마다 다르게 기록한다.

〈루가의 복음서〉(5:1~11)는 베드로가 부름받은 일은 강조하면서 야고보·요한·안드레아의 이름은 빠뜨린다. 〈마태오의 복음서〉(4:18~22)와 〈마르코의 복음서〉(1:16~20)는 위의 4명이 부름받은 일을 기록하며 루가와 마찬가지로 이 사건이 갈릴래아 호수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한다. 〈요한의 복음서〉는 이 사건이 유대에서 일어났으며(1:28),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의 추종자였고(1:35) 요한이 예수를 가리켜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그는 요한을 떠나 베드로를 '메시아'(예수)에게 소개했고 이때 예수가 베드로에게 게파(베드로, 즉 반석)라는 이름(또는 별명)을 주었다고 했다.

공관복음서(마태오·마르코·루가)는 예수가 활동을 시작한 갈릴리에서 베드로가 부름받았다고 기록하는데, 이것이 옳은 듯하다.

〈요한의 복음서〉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역사보다는 신학에 중점을 두고 기록한 듯하다. 이 복음서의 저자는 베드로가 처음부터 예수가 메시아임을 깨달았고 예수는 베드로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시몬, 즉 반석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다. 공관복음서들은 대체로 12사도 가운데 베드로가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서술하지만 그렇지 않은 예도 있다. 예를 들어 마태오와 루가는 베드로가 예수에게 비유에 관해 물었다고 했지만 마르코는 여러 제자들이 함께 물었다고도 한다(마태 15:15, 루가 8:45, 마르 7:17).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관복음서는 모두 베드로가 제자들의 대변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다른 제자들보다 어느 정도 우위에 있었다고 강조한다.

제자들의 이름이 열거될 때마다 베드로는 늘 맨 앞에 나온다(마태 10:2~4, 마르 3:16~ 19, 루가 6:14~16, 사도 1:13, 갈라 2:9은 예외). 사도교회에서 베드로가 차지한 중요성 때문에 복음서에서 그렇게 기록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그의 강한 성격이 중요한 요인이었음에 틀림없다.

예수의 제자가 아니었던 사람들도 베드로의 권위를 인정했는데, 이를테면 성전세를 받으러 다니던 사람들도 정보를 얻기 위해 베드로에게 접근했다(마태 17:24). 또한 특유의 조급한 성격 때문에 제자들을 대표하여 예수에게 비유(마태 15:15) 또는 가르침(마태 18:21)의 뜻을 물었다.

베드로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12제자를 대표하여 충성스럽게 봉사한 대가로 하늘나라에서 특혜를 누리게 해달라고 청했다(마태 19:27~28).

많은 경우에 베드로의 이름만 나오고 다른 제자들은 단지 그의 일행으로만 언급된다(마르 1:36, 루가 8:45). 특별한 사건에서 예수와 가장 가까운 3명의 제자('기둥들' 즉, 베드로·야고보·요한)가 등장할 때도 베드로의 이름만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 3명의 이름이 나올 때도 베드로의 이름이 늘 맨 앞에 나온다(마태 17:1, 26:37). 예수가 찾아가 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준 곳도 가파르나움에 있던 베드로의 집이다(마태 8:14). 예수가 군중을 가르칠 때 탄 배도 그의 배였다(루가 5:3).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함으로써 깊은 통찰력과 신앙을 보여준 사람도 베드로였다(마태 16:15~18, 마르 8:29, 루가 9:20). 예수가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을 때 만류하다가 도리어 꾸중을 들은 사람도 베드로였다(마르 8:32~33). 또한 그리스도를 부인하여 가장 강인하면서도 순간적으로 약점을 보인 사람 역시 베드로였다(마태 26:69~75, 마르 14:66~72, 루가 22:54~61). 그러나 훗날 그는 놀랄 만큼 성숙해져서 강인함을 되찾았고 예수에게 사명을 받은 대로(루가 22:31~32)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비록 예수를 부인하긴 했으나 마지막에는 부활을 맨 처음 목격한 증인이 되었다(루가 24:34).

〈요한의 복음서〉에서 베드로의 지위는 '예수의 사랑받던 제자' 요한이라는 인물의 도전을 받는다. 이 복음서에서 베드로는 37번(4복음서 전체에서는 109번)이나 언급되지만 그중 1/3은 부록(21장)에 나오며 단지 9개의 사건에서만 나올 뿐이다.

이 복음서는 대표자 및 대변인으로서 베드로의 역할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보다 친밀하게 그리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제자들의 역할이 약화되면서도 한편으로 베드로가 강조되고, 예수로부터 "내 어린 양들을 잘 돌보아라",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요한 21:15~16)라는 사명을 받는 것으로 보아 사도교회에서 베드로가 얼마나 큰 신망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베드로와 나란히 요한도 중요한 인물로 나타난다(13:24, 18:15, 19:26~27 등). 21장에서는 베드로를 강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부인한 이 제자가 공관복음서에서 누리던 지위를 되찾게 해 주었다.

베드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사건들

복음서에서 베드로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많은 사건들 가운데 3가지는 따로 고찰해보아야 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중요하고 해석상 문제가 있으며 논쟁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마르코의 복음서〉(8:29)와 〈루가의 복음서〉(9:20)에서 예수가 누군가에 대해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답변을 듣고자 했을 때 베드로는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예수가 '메시아', 즉 '하느님의 메시아'라고 대답했다. 아마도 예수는 이 대답이 너무 편파적이고 정치성을 띤 것이기 때문에 거부하는 뜻에서 제자들에게 그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마르코의 이야기를 확대한 〈마태오의 복음서〉(16:13)에서 베드로는 자신과 다른 제자들을 대변하여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새로운 이해의 차원에 도달했고, 이렇게 예수의 신성(神性)에 대한 한 차원 높은 인식은 예수에게 인정을 받으며, 베드로가 '성직임명'을 받는 계기가 된다. 베드로 자료라고 할 수 있는 부분(마태 16:18~19)에서 예수는 시몬에게 게파, 또는 베드로(반석)라는 이름을 주었다.

과거에 몇몇 권위있는 학자들은 반석이 예수 자신이나 베드로의 신앙을 가리킨다고 생각했으나 오늘날 대다수 학자들은 가장 명확하고 전통적인 해석, 즉 반석이 베드로를 가리킨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요한의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베드로와 처음 만났을 때 이 이름을 주었다(1:42). 처음 만난 때가 언제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예수가 베드로에게 이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점만은 확실해 보인다.

마태오는 계속해서 이 반석 위에(즉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1세기에 기록된 〈마태오의 복음서〉에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는 확고한 교회조직보다는 신앙인들의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 이야기가 나오는 마태오의 독특한 자료(마태 16:16~19)의 신빙성에 대해서는 많이 논의되어왔고, 지금도 논의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근거들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즉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6~19절은 오직 그곳에만 나오고, 교회라는 단어는 후대에서야 이루어진 교회조직을 암시한다. 비록 위의 주장이나 이 자료의 신빙성에 도전하는 다른 주장들이 나름대로 주의깊게 제시되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예수가 어느 특정한 시점에(아마도 그의 생애 말기에) 이 말을 했으리라고 본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그의 신앙과 통찰력을 잘 보여준다면 예수를 부인한 사실은 비록 잠시 동안이긴 하지만 그가 의지가 약하고 나태해질 수도, 또 흔들릴 수도 있는 사람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결코 그는 신앙 자체를 잃지는 않았다. 예수를 부인하기 이전에 베드로는 예수를 깊이 사랑했고, 또 자기 능력을 과신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배반하리라는 예수의 예언을 무시한 채 다른 제자들이 예수를 버릴지라도 주를 배반하느니 죽음을 당하겠다고 장담했다(마태 26:33~35, 마르 14:29~31, 루가 22:31~34, 요한 13:37~38). 그러나 정작 예수가 붙잡히자 베드로는 도망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가 붙잡혀 있는 대사제의 관저로 따라갔다. 그 뜰에서 예수와 한편임을 말해야 할 위험한 순간에 그는 부인하는 쪽을 택했다(마태 26:69~75, 마르 14:66~72, 루가 22:54~61, 요한 18:15~18, 25~27). 마침내 예수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몹시 수치스러웠으며 예수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깨닫고는 비통하게 울었다(마태 26:75, 마르 14:72).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했지만 예수는 그에 대한 사랑과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

부활한 그리스도를 맨 처음 만난 사람도 베드로였다. 그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했고(마태 16:16), 형제들에게 "힘이 되어다오"라는 부탁을 이전에 받았으며(루가 22:32), 중대한 순간에 결연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주저했지만(마르 14:66~72) 부활의 아침에 "무덤으로 달려간"(루가 24:12) 사람이었다. 부활을 맨 처음 목격한 증인이라는 최초의 보도는 바울로의 편지들에서도 발견되며(Ⅰ고린 15:5), 이것은 바로 루가의 의도인 듯하다(루가 24:34). 부활한 예수가 갈릴리에서 베드로에게 맨 처음 나타난 이야기는 원래 〈마르코의 복음서〉 끝부분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마태오와 요한이 부활에서 베드로의 중요성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주목할 만한다. 그러나 〈마태오의 복음서〉 14장 27~28절은 부활 이후의 이야기를 미리 잘못 배치한 것일 수 있고, 〈요한의 복음서〉 21장은 바울로가 보존한 전승(Ⅰ고린 15:5)의 흔적을 담고 있는 듯하다. 예수가 부활한 후 맨 먼저 베드로에게 나타났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그는 부활의 증인이었고, 이를 사도직의 표준이라고 공포했다(사도 1:22).

사도교회에서 베드로의 위치

복음서의 서술에 비추에 볼 때 예수의 죽음 이후 곧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떠오른 것은 결코 예상 밖의 일이 아니었다.

부활 이후 거의 15년 동안 베드로는 사도교회를 이끌었다. 그는 회의를 주재하여 유다(그리스도를 배반한 뒤에 죽음) 대신 마티아를 사도로 임명했으며(사도 1:23~26), 교회가 탄생하게 된 오순절에 맨 먼저 일어나 설교를 했다(사도 1:14~39). 또한 예루살렘의 유대인 종교법정에 서서 사도들을 변호하는 설교를 하고(사도 4:5~22), 교회 안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훈계하는 재판장 역할도 했다(사도 5:1~10). 베드로는 12사도들을 이끌고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교회를 확장했다(사도 9:32). 그는 먼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갔고(사도 8:4~17), 그 결과 "그들도 성령을 받았다". 사마리아에서 그는 마술사이자 주술적 치유자인 시몬 마구스를 만났다.

그뒤 사론 평지의 리따로 가서(사도 9:32~35) 중풍병자 애네아를 고쳤으며, 지중해연안 도시 요빠로 가서(사도 9:36~43) 다비타(도르가)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다.

지중해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카이사레아에 간 베드로는(사도 10:1~11:18)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 고르넬리오를 개종시킴으로써(사도 10:1) 이방인을 교회로 받아들였다.

당시 유대교 규정에 따르면 이방인 개종자는 먼저 할례를 통해 유대인이 되어야 받아들일 수 있다. 베드로는 할례를 요구하지 않은 채 고르넬리오와 그외 다른 이방인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회당과 비공식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함으로써(사도 10:48)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고, 이것은 유대 그리스도교도들 및 일반 유대인들의 반발을 샀다. '성령'이 성결하게 하심(사도 10:10~15)에 힘입어 베드로가 독자적으로 일으킨 이 사건으로 헤로데는 야고보(요한의 형)의 목을 베고 베드로를 체포하게 한(사도 12:2, 3) 것으로 보인다.

감옥에 있는(AD 44경) 베드로를 주의 천사가 찾아왔고 두손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풀려서 그는 감옥을 빠져나왔다(사도 12:1~8). 그는 즉시 "마르코라고도 불리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사도 12:12). 그리고 자기가 감옥에서 빠져나온 사실을 "야고보와 다른 교우들"에게 알리라고 부탁하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사도 12:17). 이 시점에서 예루살렘에서 누리던 베드로의 지도권은 끝을 맺게 되었다.

베드로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곳'이라는 말이 같은 지방의 임시피난처를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의 후기활동을 다루지 않는다. 〈루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쓴 저자가 이후의 활동을 다루는 제3의 책을 쓸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책이 씌어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씌어졌다 하더라도 후에 상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클레멘스의 첫번째 편지 First Letter of Clement〉(제4~6권)에 암시된 교회 내부의 시기심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거나, 아니면 책을 완성하기 전에 저자가 죽었을 것이다.

클레멘스의 첫번째 편지(First Letter of Cl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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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후기활동에 대해서는 베드로가 유명했던 당시 두 사도, 즉 야고보와 바울로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데서 잠깐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베드로는 헤로데 왕에게 잡혀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예루살렘을 떠날 때까지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사도 12:1~17). 예를 들어 바울로는 회심 뒤 3년 만에 베드로와 의논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와 함께 2주일을 그곳에 머물렀다(갈라 1:18~19). 그러나 많은 〈신약성서〉 학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난 뒤 베드로는 선교활동을 맡았고 '주의 형제' 야고보가 교회의 실제적인 지도권을 가졌다고 본다(이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음). 이렇게 권위가 베드로에서 야고보로 옮겨졌다는 것은 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서 이방 그리스도교도들과 함께 식사하던 도중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의 뜻을 따라 자리를 물러난 사실(갈라 2:11~14), 이른바 예루살렘 사도회의(사도 15:7)에서 결정된 사항들을 야고보가 최종적으로 '요약'한 사실, 후에 베드로가 마르코라고도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서 떠날 때 자신의 거처에 대한 설명 또는 '보고'를 주로 야고보에게 남긴 사실(사도 12:17) 등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바울로는 회심 3년 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처음 만났다.

이 만남을 기록하는 데서 게파(베드로)라는 이름이 야고보보다 먼저 나온다. 그러나 14년 뒤의 만남을 전하는 이야기에는 야고보가 게파보다 먼저 나온다(갈라 2:9). 또한 바울로는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났던 자신과 베드로가 연루된 사건을 강조한다.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 바울로는 안티오키아에서 유대 그리스도교도와 이방 그리스도교도를 하나의 회중으로 합하는 일에 어느 정도 성공했던 것 같다. 유대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방인들과 한자리에 앉아 식사하는 것을 그들의 전통에서 아주 벗어난 일로 보았다.

바울로가 없는 동안 베드로는 선교사로서 안티오키아를 방문하여 유대인 그리스도교도와 이방인 교우들과 식사를 했다. 후에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이방인 교우와 함께 식사하는 관습에 반대했다. 베드로는 야고보에게 복종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물러 났고", 유대 그리스도교도들도 마찬가지로 처신했다. 이로써 이 집단의 통일성은 무너지게 되었다. 바울로는 돌아와서 베드로가 우유부단해서 저지른 일에 대해, 어쩌면 결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한 것 같은 일에 대해 베드로를 꾸짖었다(갈라 2:11~14).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예루살렘 공의회(49/50)가 소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회의에서 바울로는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고"(갈라 2:7), 베드로는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갈라 2:8).

바울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 12절에서 지나가는 말로 게파(베드로)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것은 고린토 교회의 한 집단이 특별히 베드로에게 헌신했음을 암시한다(어떤 사람들은 이 내용을 근거로 베드로가 고린토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함). 또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9장 5절에서는 베드로가 아내와 함께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쓰고 있다.

베드로가 소아시아에서 선교 여행을 했다는 것은 〈베드로의 첫째 편지〉 1장 1절에서 엿볼 수 있다.

로마에서의 베드로에 관한 전승

성 베드로(San Pietro)

성 베드로 사도, 교황,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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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의 체류지·순교·매장 등을 둘러싼 문제들은 〈신약성서〉와 초대교회를 연구할 때 부딪치는 복잡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사도행전〉이나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베드로가 로마에서 살았다는 언급이 없으므로 일단 여기서 추측을 멈추게 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일 베드로가 〈베드로의 첫째 편지〉를 썼다면 5장 13절의 '바빌론'에 대한 언급은 베드로가 한동안 제국의 수도에 머물렀다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베드로가 그 편지의 저자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 비밀스런 표현은 적어도 1세기말 또는 2세기초의 전승을 반영한다.

바빌론은 로마를 가리키는 비밀스런 표현인데, 〈요한의 묵시록〉(14:8, 16:19, 17:5~6)과 여러 유대교 예언자들의 글에서 그런 뜻으로 사용되었다.

1세기말에는 베드로가 로마에서 살았다는 전승이 이미 퍼져 있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 전승을 뒷받침해 주는 초기의 증거가 2세기초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가 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 Letter to the Romans〉에도 나온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25년간 주교직을 수행했다는 전승은 3세기초, 아니면 3세기 중반에 가서야 비로소 생긴 듯하다.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세웠다거나 또는 그가 이 교회의 초대 주교였다는 주장은 지금도 쟁점으로 남아 있으며 2세기 중반이나 말에 나타난 증거에 근거한다. 〈요한의 묵시록〉 21장 18~19절은 예언의 문학적인 형태로 분명히 베드로의 죽음을 언급한다. 이 장을 쓴 사람은 베드로가 늙어서 순교한 데 대한 전승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부분에는 그가 십자가형을 당해 죽었다고 볼 만한 점이 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암시조차 없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했다는 설을 뒷받침해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로마의 클레멘스가 쓴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 Letter to the Corinthians〉(96경, 5:1~6:4)에서 볼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의 몹쓸 시기심 때문에 한두 번이 아니라 숱하게 고난을 당하고 증인의 일을 해낸 베드로는 마땅히 영광스러운 곳으로 갔다(5:4).…… 거룩하게 살았던 이 사람들(베드로와 바울로)은 타인의 시기로 인해 수 없이 많은 고문과 끔찍한 일을 당하고, 우리들 가운데 모범이 된 수많은 선택받은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6:1)." 이 자료들과 후기 저작들에 나오는 암시에 근거해서 많은 학자들은 베드로가 순교한 장소는 로마로, 그 시기는 네로 시대로 추정하게 되었다.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1275경~1342경)가 〈평화의 수호자 Defensor pacis〉를 쓴 이래로 베드로가 과연 로마에서 살다가 순교했는가 하는 질문의 일부로 베드로가 어디에 묻혔는가 하는 문제도 논의되어왔다.

〈신약성서〉에는 이 문제를 해결해줄 만한 실마리가 전혀 없다. 최초의 증거(200경)는 가이우스(또는 카이우스)의 글 중 한 단편에 나오는데, 그것은 베드로의 '트로파이온'(기념비)이 바티칸에 있다는 적어도 한 세대 전의 전승(165경)을 담고 있다. 비록 정확한 파악이 어렵긴 하지만 이 시기에 바티칸 지역이 베드로의 무덤이나 그가 승리한(순교한) 지역에 세운 기념비와 연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교황 다마소(366~384 재위)의 비문을 근거로 그가 비아 아피아에 있는 '아드 카타쿰바스'(산세바스티아노의 '지하묘지')에 묻혔다고 주장한다.

이 비문은 매우 불분명한 용어로 되어 있어서 교황 그레고리오가 황녀 콘스탄티나에게 보낸 편지와 〈교황 역대실록 Liber Pontificalis〉에 실린 코르넬리우스의 설명처럼 잘못 해석될 소지가 많이 있었다. 앞서 언급한 것을 제외하면 후기의 문학 전승은 한결같이 바티칸 언덕을 베드로가 묻힌 장소로 본다.

19세기말에는 베드로와 바울로의 묘지가 '아드 카타쿰바스'였다는 이론을 실증하기 위해 발굴작업이 시작되었다.

약 50년간의 탐사를 끝마친 오늘날에는 이미 200년경부터 그곳에 그리스도교가 영향을 미쳤지만 260년경에야 그곳에 사도들을 기리는 제의가 행해졌으리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사도들의 유골이 안치되었다고 전해내려온 이 지역 전체에 대한 발굴작업도 베드로와 바울로가 원래 그곳에 묻혔다든가 아니면 다른 곳에 묻혔다가 훗날 그곳으로 이장되었다는 증거를 전혀 내놓지 못했다.

4세기초 콘스탄티누스 황제(337 죽음)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바티칸 언덕에 대성당을 세웠다.

장소를 남쪽으로 조금만 옮겼어도 대교회당을 평지 위에 비교적 쉽게 세울 수 있었는데 힘들게 그곳에 세운 것으로 보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베드로의 유골이 조그만 아이디쿨라(Aedicula:작은 성상을 모신 신전) 밑에 안장되어 있음을 확신한 것 같다. 발굴의 목적은 콘스탄티누스의 확신이 사실인지, 아니면 단지 오해에 불과했는지를 판단하는 일이었다.

오늘날 성 베드로 대성전의 중앙 제대 훨씬 밑에 있는 이 자리의 발굴은 1939년에 시작되었다.

발굴과정과 발굴된 것을 해석하는 데 따르는 문제들은 대단히 복잡했다. 어떤 학자들은 꽤 늦게 세워진 아이디쿨라의 옆면 벽돌에서 발굴된 상자에 베드로 성해들의 일부가 담겨 있는데, 이 성해들은 원래 아이디쿨라 밑 땅속에 안치되어 있었다고 믿는다. 이를 믿지 않는 학자들도 많다. 베드로의 무덤이 아이디쿨라 터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을 입증해줄 만한성해가 오늘날에는 남아 있지 않다. 그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까지 옆벽에 안치되어 있던 이 상자 속의 성해들도 긍정적인 결론을 이끌어낼 만한 근거가 되지 못한다. 고고학적 조사도 베드로의 무덤 위치에 관한 의문을 어느 정도 확실하게 풀어주지 못했다.

만일 베드로의 무덤이 아이디쿨라에 없었다면 인접한 다른 지역에 있었거나, 아니면 그의 시체를 아예 발견하지 못해 장사도 치르지 못했을 수도 있다.

성 베드로 축일

로마 가톨릭 교회 교회력에는 베드로를 기념하는 5대 축일이 기록되어 있으며, 각 축일마다 바울로의 이름도 함께 나온다. 날짜 순서대로 보면 첫번째는 1월 18일 로마에서 거행되는 '베드로 대성당'(Cathedra Petri) 축일이며, 2번째는 2월 22일 안티오키아에서 거행되는 축일이다. 3번째는 6월 29일에 거행되는 베드로와 바울로의 축일로서, 이 날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12가지 대축일에 포함된다. 4번째는 베드로가 쇠사슬에서 벗어나 도망친 일을 기념하는 축일로서 8월 1일에 거행된다. 마지막으로 5번째는 베드로와 바울로의 대성당을 봉헌한 일과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것을 세운 일을 함께 기념하는 축일로서 11월 18일에 거행된다.

베드로(Pietro)

ⓒ 페테르 파울 루벤스/위키피디아 |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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