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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글자를 일정한 틀로 짜 맞추어 만든 글자틀.
활자는 한 글자만으로 하나의 활자를 만드는 단자가 많으나, 때로는 자주 쓰이는 2자 이상을 하나의 활자로 한 연이은 글자도 있다. 또한 소리점이나, 탁한 음 또는 센 음을 나타내는 발음, 신물 등을 표시하는 글자 아닌 모양을 새긴 활자도 있다. 이러한 활자를 써서 책이나 문서를 찍는 기술을 활판인쇄술이라 하며, 활판인쇄술로 찍어낸 책이 활자본이다. 활자본은 주자본·식자본·배인본·활판본이라 부르기도 한다.
역사
활자를 써서 인쇄하는 일은 동양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문헌상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북송시대에 심괄(沈括)이 쓴 〈몽계필담 夢溪筆談〉으로, "경력년(慶曆年), 즉 1041~48년에 필승(畢昇)이라는 선비가 아교와 진흙으로 글자를 새겨서 책을 찍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나무활자·주석활자 등을 만들어서 책을 찍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우리나라에는 일찍부터 활자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이미 주자(鑄字)로 책을 찍었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고려 문종(1047~83 재위) 때의 기원설, 1102년(숙종 7) 기원설, 1219~29년(고종 16) 기원설 등 3가지 설이 있다. 지금 남아 있는 책 중에서 1377년(우왕 3) 7월에 청주목 밖의 흥덕사에서 주자로 찍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활자본이다.
고려 때부터 나무활자 인쇄술이 발달했으며, 금속활자도 발명되었다. 고려시대 인쇄술의 전통은 조선시대로 이어져, 1403년(태종 3) 2월 13일 주자소를 설치했고, 구리로 계미자를 주조하여 책을 찍었다. 그로부터 중앙의 관서나 지방의 관아, 민간에 이르기까지 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는 일이 흔해졌다. 이러한 전통은 개화기를 전후하여 서양의 근대적 활자 제조의 기술이 들어온 뒤에도 이어졌으며, 오늘날 알려진 활자의 종류는 약 350종이나 된다. 한국의 활자는 도장을 파듯이 글자 하나하나를 새기는 나무활자와 오지활자가 발달했으며, 해감 모래에다 나무활자로 자국을 찍어서 그 자리에 쇠물을 부어 만드는 주조법으로 금속활자를 만들었다.
모래에다 찍은 자국은 한 번의 활자 주조가 끝나면, 또다시 글자 자국을 찍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활자 주조의 속도가 매우 느렸다. 이것은 짜놓은 판틀 위에 종이를 얹고, 말털다리게로 문질러서 찍어내는 수작업의 인쇄술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양의 근대식 활자 주조는 강철로 만든 글자틀에다 납물을 부어 여러 번 계속하여 쉽게 주조하는 방법을 썼으며, 또 포도주를 짜내는 압축기를 활용한 기계 방식의 인쇄술로 책을 찍었다. 따라서 서양에는 대량 인쇄와 고속 인쇄가 가능해졌다. 서양에서 활자를 처음 만든 것은 금속세공업자라고 한다.
그들이 화폐나 메달을 조각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하여, 강철에다 글자를 새겨 활자를 주조했다고 한다. 서양 인쇄술의 시조라고 불리는 독일의 요한 구텐베르크가 1445년경 발명한 활자의 주조 방법과 인쇄술을 보면, 먼저 쳐서 누르는 법으로 활자의 모형을 만들고, 2개의 L자 모양의 주형(鑄型)에다 쇳물을 부을 구멍을 만든 다음, 이 주형에다 모형의 위치를 정확하게 맞추고, 납을 주원료로 하는 합금을 흘려넣어 활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원고에 맞추어 활자를 배열하여 판틀을 짠 다음, 그 판면에다 유지성(油脂性) 잉크를 바르고, 그 위에 종이를 얹고 종이 전부를 세게 누르면, 종이에 잉크가 묻어서 인쇄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썼다.
종류
활자의 종류는 그 재료에 따라 나누어진다. 활자의 재료가 나무일 때는 나무활자 또는 목활자라 한다. 이를 우리나라에서는 목주자라고 쓴 일도 있다. 나무활자의 재료로는 새기기 쉽고 잘 이그러지지 않는 화양나무가 많이 쓰인다. 우리나라에는 〈개국원종공신녹권 開國原從功臣錄券〉을 찍은 서적원활자,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를 찍은 서찬 각자를 비롯하여 많은 종류의 나무활자가 있다. 정조 때는 중국에서 나무활자를 수입하여 쓴 일도 있었다.
활자의 재료가 금속일 때는 금속활자라 한다. 금속활자는 주자라 부르기도 하는데, 나무활자를 목주자라고도 하기 때문에 주자를 모두 금속활자라 하면 틀린 경우가 많다. 금속활자는 그 재료에 따라 다시 나누어진다. 즉 구리가 주된 재료일 경우에는 구리활자 또는 동활자라고 하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관에서 가장 많이 주조된 활자이다. 즉 계미자·경자자·갑인자·광해군동자·갑진자 등은 기록이 분명한 구리 활자이다. 동활자로 불린 활자 중에는 두석·놋쇠가 재료인 경우도 있다. 구리 활자로 찍은 책이 동활자본이다.
무쇠가 재료인 활자는 무쇠활자이며 철활자라고도 부른다. 운각인서체자·교서관필서체철자·희현당철자와 같이 기록이 분명한 무쇠활자가 그 예이다. 무쇠활자로 찍은 책이 철활자본이다. 재료가 주석이면 주석활자이며, 줄여서 석활자라고도 부른다. 중국의 경우에는 예가 많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아내지 못했다.
활자의 재료가 납이면 납활자이며 연활자라고도 부른다. 세조 때의 강목대자, 즉 병진자가 납활자로 알려지고 있으나 이설이 있다. 납활자는 개화기에 일본이나 중국을 거쳐 근대적 인쇄술이 들어온 후부터 본격적으로 쓰인 것 같다. 특히 일본의 요코하마[橫浜]에서 찍어온 가톨릭 계통의 종교서적은 납활자로 찍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 책들을 신식 연활자본 또는 기독교 연활자본이라 부르고 있다. 서울의 광인사, 용산의 인쇄국에서도 본격적으로 납활자를 썼으며, 〈한성주보〉·〈한성순보〉와 같은 신문들과 한말의 잡지·신문들은 납활자로 찍었다.
국립중앙박물관과 성암고서박물관에는 진흙을 아교로 굳혀서 새긴 활자가 남아 있다. 이것을 교니활자라고 부른다. 경상북도 상주지방에서 출토한 활자에는 진흙을 벽돌처럼 붉게 구운 오지활자, 즉 도활자와 자기처럼 하얀 자기활자가 있다. 이런 도활자로 찍은 책으로 1722년(경종 2) 3월에 청해에서 찍은 〈삼략직해 三略直解〉가 있는데 정확하지 않다.
우리나라의 특이한 활자로 바가지활자가 있다. 이 활자로 찍은 책을 처음에는 일본 사람이 조작한 것으로 알았으나, 6·25전쟁 직후까지도 바가지로 도장을 임시로 만들어 쓴 예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존재 가능성이 입증되었다. 바가지활자는 포활자라고도 부르며, 이 활자로 찍은 책에는 〈경사집설 經史集說〉·〈논어집주대전 論語集註大全〉 등이 있다. 인쇄한 기록에만 남아 있는 활자로 토활자가 있다. 아마도 흙으로 만든 활자인 것 같다.
활자체와 타이포그래피
타이포그래피는 근래에 들어 널리 사용되는 용어로 각종 출판물에 사용되는 글자체를 선정·운용·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다양한 활자체와 타이포그래피는 오랫동안 활판인쇄술의 발전과 서적문화 발달에 이바지했다.
1445년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한 이래 활판인쇄공·인쇄공·발행인·편집자라는 출판의 모든 업무기능이 오랫동안 1명에 의해 단독으로 운영되어왔다. 그후 점차 다양한 기능의 분업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글자체 도안가, 조각공, 지면 도안가, 제본도안가 등이 등장했고, 전문 편집자나 발행인은 기술적인 업무분야로부터 서서히 분리되었다. 위에 나열된 기술적인 업무담당자들은 모두 어떠한 기능으로든지 인쇄된 서적의 외형에 관계된다는 점에서 활판인쇄기술자에 속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활판인쇄의 우월성을 탁월하게 증명시켜준 뛰어난 수작들은 타이포그래피 연구가와 발행인·인쇄기술자의 공동노력에 의해 탄생되었다는 것이다.
활판인쇄된 지면은 미적 관점에서 볼 때 2가지 특성을 갖는다. 그중 하나는 분위기·느낌·인상 등의 단어로서 표현되는 것으로 서술적이기보다는 감각적이며, 글자체의 크기나 지면에서의 위치, 제목·머리기사·소제목 등에 사용된 전시용 글자체의 종류, 여백의 정도에 의해 좌우된다. 뛰어난 활판인쇄기술자는 이 모든 요소들을 가장 적절하게 활용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해당 지면의 인쇄내용에 대해 특정의 기대감을 갖게 하며, 인쇄물의 중요성과 그 역할, 그리고 그 시대의 시대적 감각을 인지할 수 있게 한다. 2번째의 미적 특성은 활판의 명암이라는 색상과 관련된 것이다. 즉 활판으로 인쇄된 지면이 개별적인 여러 글자체의 집합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통일체로 느껴지면서 갖는 명암적 특성을 가리킨다. 이 명암은 글자체의 종류, 글자와 단어 사이의 간격, 행과 행 사이의 간격, 글자체의 잉크 농도, 인쇄방법, 종이 등에 의해 결정된다.
이상의 활판인쇄의 미적 특성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활자체이다. 이같은 사실은 활판인쇄술의 발명 이전에는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빨리 필사할 수 있는 서체의 개발에 노력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15세기 중엽 유럽에서 금속활자와 인쇄술이 발명된 이래 수세기 동안 서구에서는 수천 가지의 활자체가 개발되었지만 로마체·이탤릭체·고딕체로 대별되는 3가지 종류의 활자체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3가지 활자체는 사실상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이 발명되기 이전부터 사용되던 서체들이었다.
영국과 독일에서는 대칭형에 길게 늘어지고 끝이 뾰족하며 매우 장식적이지만 읽기에는 불편한 서체가 사용되고 있었다. 이것은 오늘날 고딕체라 불리는 서체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사실상 고딕체의 시조로 여겨진다(→ 흑자체).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시원스러우면서 부드럽고, 직각에 세리프가 없는 서체가 사용되었는데, 이 서체는 8세기말 샤를마뉴 대제의 포고령에 의해 공식적인 서체로 지정된 카롤링거체와 유사한 것으로서 로마체의 원조로 간주된다. 그리고 비스듬하게 기울어진 같은 서체의 필기체는 빠른 속도로 필사를 해야 하는 공문서 보관소의 필경사에 의해 크게 발전되었는데, 오늘날 이탤릭체의 원형이 되었다. 이와 같이 활판인쇄의 3가지 주요활자체는 모두 필경사들의 서체에 기원을 두고 있다.
타이포그래피의 역사
구텐베르크로부터 18세기까지의 활자체
샤를마뉴 대제는 서체의 표준화를 장려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모든 교육용 서적들은 로마체의 대문자와 독특한 형태의 소문자로 이루어진 카롤링거체로 필사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같은 통일화 정책은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으며, 각 나라와 각 지역에서 직접 알파벳으로 필사하는 필경사들의 영향을 받아 더욱 깨끗하고 단순한 형태의 서체들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대부분의 서체는 점차 옆으로 퍼져 납작한 모양을 띠게 되었고, 11세기경에 곡선부는 끝이 뾰족해지고 각도를 가지게 되었으며, 글자의 선은 더 두꺼워졌지만 글자의 몸통은 더 가늘어졌다.
이것이 바로 고딕체의 시조인 흑자체(black letter)로서 계속 발전하여 15세기에는 전형적인 직각의 고딕체로 자리잡게 되었다(카롤링거 왕조 미술, 카롤링거 미너스큘).
사실상 인쇄술이 발명되었을 때 인쇄기술자들이 개발한 활자체들의 모델이 되었던 것이 바로 이 고딕체이다.
고딕체는 독일에서는 널리 사용되었지만, 그무렵 인문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던 이탈리아의 인쇄기술자들은 주로 라틴어로 된 서적의 출판에 몰두하면서 끝이 뾰족하고 장중한 느낌의 고딕체가 인문주의의 성향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새로운 서체를 찾기 위해 역사적인 서체를 뒤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 원래의 카롤링거체보다 시원스러운 감은 덜하지만, 끝이 뾰족하고 몸통이 가늘고 짙은색의 고딕체보다는 더욱 둥그런 형태의 서체를 찾아냈다.
1465년 이탈리아의 인쇄기술자 콘라드 스웨인헤임과 아르날도 판나르츠는 이 새로운 서체로 필사하여 키케로의 작품을 발간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15세기에 들어와 더욱 현대화되어진 고딕체와 구별하여 이 서체를 '안티쿠아'(Antiqua)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로마체라 불리는 안티쿠아는 독일을 제외한 서부 유럽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독일에서는 종교개혁운동에 대한 반감으로 인해 인문주의 운동이 크게 전개되지 못했으며, 1940년에 고딕체의 사용중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고딕체는 공식적인 활자체로 인식되었다. 한편 고딕체·로마체와 함께 3대 주요활자체를 구성하는 이탤릭체는 필사의 속도를 내기 위해 공문서 보관소의 필경사들이 개발해낸 것으로 속도가 빠르고 비형식적이며, 곡선으로 연결해서 쓰던 필기체에서 유래되었다.
인쇄술은 독일에서 서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독일인과 독일에서 기술을 습득한 장인들이 많이 활동하던 이탈리아에서 가장 먼저 자리 잡게 되었다.
1469년 베네치아에서 인쇄소를 설립한 스페이어 형제는 깨끗하면서도 쉽게 읽을 수 있는 활자체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수비아코에서 스웨인헤임과 판나르츠가 사용했던 안티쿠아보다 시대적인 감각에서 더 앞선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뒤를 이어 독일에서 인쇄술을 익혀 역시 베네치아에 인쇄소를 설립한 프랑스인 니콜라 장송은 앞서 등장한 로마체의 활자체를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개발하여 1470년 키케로의 작품을 발간했다.
장송의 활자체는 대부분의 현대 비평가들 사이에서 가장 우아한 로마체로 평가받고 있으며, 특히 스탠리 모리슨 같은 사람의 활자체는 이제까지 개발된 로마체 중 가장 완벽한 로마체 활자로 지목한다.
15세기말 타이포그래피를 주도하던 인물로는 베네치아의 인쇄업자 알도 마누치오를 꼽을 수 있다. 편집자였던 마누치오는 활자도안가, 조각공으로서 프란체스코 그리포를 고용하고 있었다.
그리포는 카롤링거체 이전의 필사체로부터 영향을 받아 보다 정통적인 로마체를 도안했고, 오늘날 이탤릭체로 불리는 곡선형의 활자체를 최초로 개발했다. 마누치오는 인문주의 운동으로 인해 확대된 새로운 독자층을 겨냥하여 휴대가 간편하고, 읽기 쉬우며, 한쪽에 많은 내용을 인쇄할 수 있는 활자체를 사용하여 세심하게 편집함으로써 가능한 한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는 연재물을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리포가 개발한 이탤릭체를 사용하여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마누치오의 이러한 연재물은 사실상 베스트셀러의 기록을 세운 최초의 포켓형 서적이었다.
마누치오가 사용했던 활자체나 인쇄상의 여러 방법들은 토리·콜린을 비롯한 몇몇 인쇄업자들에 의해 프랑스에도 전파되었다. 특히 콜린은 활자조각공 가라몽을 고용하여 새로운 이탤릭체·로마체·그리스체의 활자체를 여러 벌씩 제작했는데, 이 로마체를 기본으로 하여 후에 '가라몽체'라 불리게 된 활자체들이 탄생되었다.
또한 가라몽은 훌륭한 활자조각공을 독자적으로 고용할 여력이 없는 인쇄업자들을 위해 도안이 뛰어나고 완벽하게 조각된 활자체를 제작·배급함으로써 세계 최초의 상업적 활자주조공이 되었다. 가라몽이 변형시켜 개발한 새로운 로마체와 이탤릭체는 16세기말까지 유럽의 타이포그래피를 지배했다. 특히 1540년 수 년 간의 실험과정을 거치며 만들어낸 완벽한 로마체는 기계로 재생산할 수 있게끔 주도면밀하게 도안된 것이었다.
윤곽이 뚜렷하면서도 우아한 이 활자체는 곧 활판인쇄 역사의 새 장을 열게 되었으며, 활판인쇄된 서적이 필사본 서적을 추월하는 기점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윌리엄 캑스턴이 흑자체를 사용하여 1477년 최초의 활판인쇄 서적을 발행했으며, 1518년 리처드 핀슨이 처음으로 로마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탤릭체는 캑스턴의 조수였던 데워드에 의해 1524년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인쇄업자들은 활판인쇄가 발명된 지 100년도 채 안 된 15세기말에 이미 서적출판에 관련된 모든 기본적인 형식과 관행들을 정립했다. 3대 주요활자체가 표준 활자체로 정형화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오고 있는 대부분의 출판업무와 기능적인 요소들이 이때 조직화되고 세분화되었다.
16세기말 유럽의 활판인쇄가 보편적으로 쇠퇴일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1640년 프랑스에서 루이 13세가 루브르 궁에 황실출판청을 설립하고, 1692년에는 루이 14세가 과학적 원칙에 근거하여 새로운 활자체의 개발을 전담하게 될 위원회를 조직함으로써 활판인쇄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었다. 여기에 참여했던 활자조각공 필리프 그랑장은 위원회가 제시한 기본적인 도안을 참조하고 여기에 수학적 정확성의 원칙을 고려해 가라몽체와 유사한 활자체를 독자적으로 개발했다.
'로맹 뒤 루아'(Romain du Roi)체로 알려진 이 활자체는 정형성과 함께 수학적인 정확성으로 크게 주목받았다.
이후 타이포그래피는 3명의 탁월한 활자도안가들의 영향 아래 커다란 변환기를 거치게 되었다. 먼저 영국의 윌리엄 캐즐런은 가라몽체를 다듬어 수많은 변형 활자체를 만들었는데, 이중 상당수가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이 변형 활자체는 기본적으로는 딱딱하고 무미건조하지만,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균형미를 갖추고 있으며, 읽기에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이 활자체는 특히 식민지 아메리카에서 인정을 받아 널리 사용되었다. 이보다 약 25년 뒤에 등장한 영국의 존 배스커빌은 활판인쇄술의 형식에 보다 중대한 변화를 일으킨 공로자로 인정받고 있다. 서체를 가르치고 있던 배스커빌은 캐즐런과 취지를 같이하면서도 더 많은 변형을 시도했다. 우아함을 강조하는 그의 활자체는 미적인 우수성이 뛰어났다.
그의 로마체는 시원스러우면서 읽기가 쉬웠고, 반면 이탤릭체는 섬세하면서도 밀도 있게 보였다. 대체로 시원스러우면서 둥그런 형태를 하고 있는 그의 활자체는 눈에 피로감을 주지 않는 가장 편안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탈리아의 잠바티스타 보도니는 배스커빌의 경향과 원칙에 열렬하게 동조하면서 가라몽체를 변형시켜 활자체의 몸통 두께를 기계적으로 세분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의 활자체는 캐즐런이나 배스커빌의 활자체보다 훨씬 가늘었으며, 심지어는 더이상 가늘게 만들 수 없을 정도의 활자체를 만들기도 했다. 그의 활자체는 다소 읽기에 불편했으나 그 자신은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활판인쇄의 귀재로 평가받았으며, 그가 미적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단순하고 평범하게 제작한 서적들은 종래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서적의 형식을 대신하여 현대적인 서적 형식의 원형이 되었다.
19세기 이후의 활자체와 서적의 도안
산업혁명으로 인해 작업과정이 기계화되고 서적의 수요가 증대되자 인쇄과정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보다도 기계로 식자를 하게 됨으로써 서적의 외형이 영향을 받게 되었는데, 식자기를 이용할 수 있는 활자의 종류가 제한되어 이전과 같이 한 권의 서적에 다양한 활자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공예가이자 열정적인 사회운동가였던 영국의 윌리엄 모리스는 산업혁명이 노동이나 작업에서 얻어지는 인간의 즐거움을 빼앗아갔으며, 수공업을 파괴시킨 기계화가 미적 아름다움을 상실시켰다고 주장하고 수공업을 근본으로 하는 미술공예운동을 주도했다.
모리스는 인쇄기술자 에머리 워커와 함께 켐스콧인쇄소(1891~96)를 설립하고 워커에게 중세의 필사체에 의거했던 초기 활자체의 아름다움과 영향력을 되찾을 수 있는 새로운 활자체를 도안하도록 했다. 또한 그는 과거로의 복귀가 더좋은 사회를 실현시킨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결과 손으로 만든 종이에 수동식 인쇄기를 사용하고 손으로 제본을 했다.
켐스콧의 최고 서적으로 손꼽히는 〈초서 Chaucer〉(1896)는 인쇄술의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서적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데, 당대의 인쇄기술자나 도안공들로 하여금 완벽한 제작과정을 통해 서적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노력하도록 자극시키는 역할을 했다.
곧이어 영국·독일을 비롯한 유럽 대륙과 미국에서 모리스의 출판활동을 전형으로 한 민간 출판사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영국의 도브스출판사는 장식이나 그림 등을 배제하고 주로 활자체의 아름다움과 여백의 활용, 인쇄과정 등의 방법을 이용하여 단순하고 소박한 서적을 발행했다. 독일에서는 워커의 활자체와 손으로 만든 종이를 사용하여 주로 고전문학과 독일·영국의 문학작품을 발행하던 크라나흐출판사가 널리 명성을 얻게 되었다.
한편 출판에도 장식미술과 마찬가지로 생명력과 도덕성이 겸비되어 있으며, 동시에 시대적 감각을 반영하는 새로운 미술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아르 누보(Art Nouveau) 운동이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특히 벨기에의 H. 반 데 벨데가 그 선두주자로 꼽힌다.
민간 출판사의 성장으로 일반 서적의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는데, 독립적인 소규모의 출판사들은 독특한 제목과 고급스럽고 특이한 출판형식으로 독자를 확보하고자 했다.
그결과 장서가들을 위해 고급스럽게 제작되던 특수서적과 일반서적 사이의 큰 격차가 점차 해소되기 시작했다. 20세기초에는 더욱 많은 인쇄업자들이 식자기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 초기단계의 기계활자체들은 손으로 주조한 활자체같이 뛰어난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다른 여러 나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영국의 활판인쇄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
모리스의 사상에 기반을 두면서도 동시에 새롭게 등장한 대량 생산방식에 적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신세대의 활판인쇄기술자들이 점차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스탠리 모리슨은 활판인쇄에 합리적인 접근법을 개발하여 영국 활판인쇄의 독자성을 확보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모리슨은 타이포그래피란 기능적인 것이며, 저자의 사상을 독자에게 명쾌하게 전달하는 것이 인쇄기술자의 역할이라면 활자체 디자이너의 역할은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5년 모리슨은 케임브리지대학교출판사의 활판인쇄 고문이 되어 인쇄기술자 월터 루이스와 함께 활판인쇄의 방법에 일대 개혁을 불러 일으켰다.
케임브리지대학교출판사는 모리슨이 모노타이프 식자기를 사용하기 위해 의뢰한 대부분의 활자체를 확보함으로써 자동식자기를 사용해서도 기능적인 측면 외에 미적 특성도 갖춘 서적을 출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프랜시스 메이널 역시 자동식자기를 이용하는 인쇄방법으로 미적 특성을 지닌 서적을 출판한 또다른 인물인데, 그는 동시에 가격의 저렴화를 실현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에서 서적가격의 저렴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현대적 출판업자로는 펭귄 문고판(1935)을 발간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둔 앨런 레인을 들 수 있다.
그의 펭귄 문고판 시리즈는 보급판 서적의 혁명을 불러오는 계기가 되었고,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유럽 대륙 전역과 미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페이퍼백).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등장하여 서적의 도안에 영향을 끼친 문학·미술 운동으로는 다다이즘(dadaism)과 초현실주의(surrealism)를 들 수 있다. 다다이스트들은 포스터·팜플렛·서적을 출판하는 데 있어 자유분방하고 추상적인 지면 배치와 함께 활자체의 종류와 크기를 무차별하게 혼합사용하거나 활자체를 통해 다다이즘적인 경향을 표현하려고 했다.
기욤 아폴리네르와 앙드레 브르통 같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위해 함께 도안작업을 했는데, 그들 역시 활자체를 통해 자신들의 사조를 표현하고자 했다.
그밖에도 히틀러 정권수립 전에 독일에서 크게 부흥하여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간 바우하우스 운동을 들 수 있는데, 바우하우스는 특히 비대칭적으로 활자들을 배치하는 등 그래픽적인 요소에 크게 중점을 두어 이후 산업 디자인의 효시가 되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 비대칭체는 읽기 위한 서적 활자체로는 적합하지 않아 미술 서적이나 건축 서적을 제외하고는 현재 거의 사용되지 않고 있다. 20세기에 와서 서적 도안의 형식은 순수미술이나 응용미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점차 세계적인 특징을 갖게 되었다. 즉 어느 한 나라에서 새롭게 등장한 형식은 곧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어 무차별하게 사용되다가 소멸된다. 그결과 서적·잡지·의상·그림·음악 등 모든 분야에 있어 그것이 어느 나라에서 기원되었는가에 관계없이 전세계적으로 유사한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에 특정 국가의 독자적인 형식을 구별하기란 매우 어렵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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