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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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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601. 9. 27, 프랑스 퐁텐블로
사망 1643. 5. 14, 생제르맹앙레
국적 프랑스

요약 총리 리슐리외 추기경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프랑스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키워나갔다. 리슐리외는 정신적인 불안정과 병약한 체질을 가진 루이 13세를 도와 국내에서 왕권을 공고히 하고 대외적으로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를 견제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610년 부왕 앙리 4세가 암살당한 후 왕위에 올랐으나, 성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했다. 어머니의 섭정에 분개한 루이 13세는 어머니를 블루아에 유폐시켰다. 이 사건으로 두 사람은 평생 적의를 숨긴 채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루이 13세는 1624년 리슐리외를 총리로 세워, 위그노 반란세력의 라 로셸 요새를 점령하고 이탈리아로 진군하는 등 무리한 원정을 추진해 친 스페인 가톨릭 열성당원들의 원성을 샀다. 1642년 리슐리외가 사망했을 무렵 프랑스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루이 13세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로 추앙받았다.

루이 13세(Louis XIII)

프랑스의 왕이다.

ⓒ Philippe de Champaigne/wikipedia | Public Domain

총리 리슐리외 추기경과 긴밀히 협력하면서 프랑스를 유럽의 강대국으로 키워나갔다.

앙리 4세와 마리 드 메디시스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1610년 5월 부왕이 암살당한 후 왕위를 계승했다.

1614년 성년이 될 때까지 어머니 마리 드 메디시스가 섭정을 했고 그후로도 3년간 어머니가 통치권을 계속 행사했다. 스페인과 동맹을 맺고자 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마리 드 메디시스는 스페인 왕 펠리페 3세의 딸인 오스트리아의 안과 루이 13세의 혼인(1615. 11)을 준비했다. 1617년 무렵 권력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에 분개한 루이 13세는 야심에 찬 샤를 달베르 드 뤼네를 총애하고 있었으며 드 뤼네는 곧 정부의 유력인사가 되었다.

루이 13세는 어머니를 블루아에 유폐시켰고 그뒤 1619~20년 마리 드 메디시스가 2차례에 걸쳐 반란을 시도했으나 실패로 끝났다. 1620년 8월 그녀의 특별고문인 리슐리외(당시 추기경에 임명되지는 않았음)가 이들 모자 사이의 화해를 주선했으며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적의를 숨긴 채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1621년 12월 뤼네가 사망했을 당시 루이 13세는 프랑스 남부의 위그노 반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1622년 봄 그는 전투를 시작해 그해 10월 반란세력들과 휴전을 맺기까지 위그노 세력의 몇몇 성채를 점령했다. 이러한 가운데 그해 9월 리슐리외가 추기경이 되었고 루이 13세는 과거 리슐리외가 모친 마리 드 메디시스와 협력했던 사실 때문에 여전히 리슐리외를 불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리슐리외의 정치적 판단력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1624년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위그노 전쟁).

루이 13세는 전장에서는 대단한 용기를 발휘했지만 정신적인 불안정과 병약한 체질 때문에 계속해서 국사(國事)에 집중할 만한 역량이 모자랐다.

따라서 리슐리외가 국내에서는 왕권을 공고히 하고 대외적으로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도권을 깨려고 노력하면서 신속하게 정부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1628년 10월 위그노 반란세력의 라 로셸 요새를 점령한 직후 리슐리외는 루이 13세에게 이탈리아로 군대를 진군(1629)시키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이같은 원정이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왕가 사이의 긴장을 고조시켰는데 당시 합스부르크가는 프로테스탄트 국가들과 싸움을 벌인 30년 전쟁의 와중에 있었다. 이윽고 마리 드 메디시스가 이끄는 친(親) 스페인 가톨릭 열성 당원들이 루이 13세에게 리슐리외의 프로테스탄트 국가 지지정책을 거부할 것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뒤프의 날(1630. 11. 10~12)로 알려진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면서 마리 드 메디시스는 루이 13세에게 리슐리외의 해임을 요구했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루이 13세는 리슐리외의 편에 서기로 결심했고 루이 13세에 반기를 든 동생 오를레앙 공(公) 가스통과 마리 드 메디시스는 망명길에 올랐다. 이후 루이 13세는 불만을 품은 귀족들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리슐리외의 방법을 그대로 채택·시행했다.

1635년 5월 프랑스는 스페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1636년 8월경 스페인 군대는 파리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리슐리외는 국왕에게 파리에서 철수할 것을 권고했으나 루이 13세는 놀라운 대담성을 보이면서 그의 충고를 묵살하고 군대를 소집해 스페인 군대를 물리쳤다. 1638년말 그는 프로테스탄트 국가들과의 동맹문제를 둘러싸고 도덕적인 갈등을 겪었으나 리슐리외가 그의 회의를 해소시켰다. 한편 루이 13세로부터 오랜 세월 동안 멸시를 받아온 왕비 오스트리아의 안이 1638년 5월 첫아들 루이 왕세자(뒤에 루이 14세가 됨)를 낳았다(프랑스-스페인전쟁). 1642년 루이 13세의 총애를 받던 생 마르 후작이 스페인 궁정과 짜고 리슐리외를 축출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이 음모는 루이 13세 재위중 가장 마지막에 일어났던 주요한 반역음모였다. 생 마르 후작의 반역음모가 탄로나자 루이 13세는 예전보다 더 리슐리외에게 의지했다. 그해 12월 리슐리외가 사망했을 무렵 프랑스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루이 13세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5개월 후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며 왕위는 아들 루이 14세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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