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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90. 5. 17, 안스바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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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68. 3. 20, 동프로이센 타피아우 |
국적 | 프로이센 |
요약 튜튼 기사단의 마지막 단장(1510~25), 프로이센의 초대공작(1525~).
독일 출신의 프로테스탄트로 동프로이센에서 튜튼 기사단의 지배를 마감하고 세습 공국을 세웠다.
안스바흐 바이로이스 변경백인 호엔촐레른가의 프리드리히의 셋째 아들로, 1510년 튜튼 기사단 단장에 임명됨으로써 동프로이센의 영주가 되었다. 당시 폴란드의 종주권 아래 있던 튜튼 기사단은 폴란드인들과의 불화로 1519~21년 전쟁을 치렀으며 그결과 동프로이센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어 휴전이 성립되었으나 분쟁의 요인은 해소되지 않았다.
1523년 알브레히트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로부터 튜튼 기사단을 해체하고 프로이센에 보유하고 있던 영토를 폴란드 지배하의 세습공국으로 만들 것을 권유받았다. 1525년 폴란드 왕 지그문트 1세는 이 해결책을 받아들였다. 1530년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당시 프로테스탄트가 되어 있었던 알브레히트를 파문하고 동프로이센을 튜튼 기사단에 반환할 것을 요구했으나 독일의 여러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진 기사단의 나머지 세력들은 알브레히트에 전혀 대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알브레히트는 반황제동맹에 가담했으며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속했던 덴마크, 스웨덴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국내적으로는 동프로이센 정부를 교회정부와 분리시켰다. 그러나 귀족들로부터 통치권을 인정받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귀족에게 상당한 정도의 특권을 양보해야만 했다.
통치 후반기에 그는 신학자들과 정치적 책략가들의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그의 치세기는 격렬한 논쟁으로 얼룩졌다. 1544년 그의 발의로 설립된 쾨니히스베르크대학교는 이런 논쟁의 와중에서 오래도록 진통을 겪었다. 그러나 다시 평온이 회복되었으며 정통 루터주의 신앙이 정착되었고 공국의 계승문제도 타결되었으며 알브레히트가 죽자 책략가들은 추방되거나 처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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