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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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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95. 10. 15, 베를린 근처 쾰른
사망 1861. 1. 2, 프로이센 포츠담
국적 프로이센

요약 프로이센의 왕(1840~61 재위).
(영). Frederick William Ⅳ.

개요

그의 보수주의적 정책은 1848년 혁명에 불을 붙이는 한 요인이 되었다.

실패한 혁명 직후에는 반동의 길로 접어들었다. 1857년 발작으로 무능하게 된 그를 대신해서 그의 동생이 섭정을 맡았고(1858~61) 후에 빌헬름 1세가 되었다.

초기생애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메클렌부르크 슈트렐리츠의 루이제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주로 경험 많은 공직자인 가정교사들에게서 교육받았다. 천성적으로 전혀 군인답지 않았으나 나폴레옹에 대항한 독일 해방전쟁(1813~15)에 참여한 경험은 그의 정치적·지적 발달에 지속적인 흔적을 남겼다. 그는 중세에 대한 향수를 느끼며 독일 낭만주의운동에 입문하여 그 추종자로 남았다. 낭만주의는 그의 극도로 민감한 아마추어 예술가적 천성에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

건축과 조경에 흥미를 가진 화가였던 그는 유명한 조각가 크리스티안 다릴 라우흐와 건축가이며 도시계획가인 카를 프리드리히 싱켈을 후원했다. 1823년 루터교로 개종한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으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왕세자로서 그는 낭만적 보수주의 사상을 발전시켜나갔는데 이러한 견해로 정치조차 엄연한 현실 문제로 여기기보다는 하나의 사상적 문제로서 접근하게 되었다.

그의 친구 및 존경하는 사람들 중에는 보수주의적 철학자·문필가·정치가 들이 있었다. 20세가 되었을 때 그는 벌써 영향력을 행사해 약속되었던 1815년 헌법을 제한해 구신분회와 지방 신분회를 창설했다. 이들 신분회에서는 지주 귀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그에게 자유주의란 혁명을 뜻했다. 근대적인 헌법은 가부장적이고 신에 의해 권력을 부여받은 왕과 그 백성들 사이의 참을 수 없는 장벽으로서 끼워넣어진 '종이조각'에 불과했다.

그 자신은 전혀 절대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남을 지배하려 하는 진정한 의지도 없었으나 신비성을 낭만화하려는 경향과 중세 신분회가 '유기적 성장'을 했다는 근거 없는 주장을 끝없이 동경하는 태도를 보였고, 19세기의 정치사상과 프랑스 혁명의 유산에 단연코 반대하게 되었다. 그 개인적인 성실한 충심 때문에 긴장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문화적 동질성이 정치적 통일보다 중요한 것이었으므로 그는 독일 통일을 위한 운동에는 근본적으로 반대했다.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점령한 뒤 그는 자기 나라가 오스트리아와 긴밀하게 제휴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우월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었는데, 그는 합스부르크 제국을 역사에 의해 신에게 봉헌된 국가로 보았다. 그는 프로이센 왕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장군'으로서 군사적 가치만을 지니고 있다고 선언했다.

즉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840년 그의 즉위와 함께 자라났던 국민들의 엄청난 기대를 곧 무너뜨렸다.

그는 결코 자유주의자들의 헌법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켜주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42년 그는 지방 신분회의 '통합위원회'만을 허용했고 1847년에는 오랫동안 미룬 끝에, 민중의 대표의회가 아닌 모든 지방 신분회를 집결시킨 연합의회를 소집했다. 그는 이 의회에 과세권과 대부권을 부여했으나 정기적으로 회의를 소집할 권한은 주지 않았다. 조금밖에 양보하지 않으려고 한계를 설정한 것이 즉시 불화를 일으켰고(이 의회는 베를린-쾨니히스베르크 철도 건설을 위해 제시되었던 대부권을 거부했음) 또 프로이센 전역에서 소집된 최초의 이 의회가 1848년 혁명 전야에 민중들의 자신감을 크게 증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다루기 까다로운 이 의회는 그의 이상으로 남았다.

1848년 혁명

독일 연방 내 각 정부의 공동 저항을 조직하려는 때늦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결국 앞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혁명에 영향 받은 1848년 3월 혁명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는 마지막 순간의 양보 조처로도 베를린 가두투쟁을 미연에 막지 못했고, 이 물결을 따를 수도 없었다. 군대를 병영으로 철수시킨 뒤 그는 혁명에 순종하는 척 속여 통일 독일의 상징인 흑색·적색·황금색의 삼색기가 휘날리는 가운데 베를린 시가행진을 하도록 했고 희생된 군인들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이후 프로이센은 독일에 흡수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마침내 그는 프로이센 국민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그러나 측근의 영향력을 받은 그는 분기하여 완고하게 저항했다. 자신의 아저씨뻘 되는 브란덴부르크 백작(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마지막 결혼에서 낳은 아들)을 총리로 임명했고 의회를 베를린 외곽으로 몰아낸 뒤 해산했다.

그리고 벨기에 헌법을 모델로 한 적당히 자유주의적인 최초의 헌법 초안을 강요했다. 이러한 조치들은 국왕과 그의 도구인 군대 및 관리들의 주도권을 재확립시켜주었으며 최근에 구성된 보수당의 확고한 지지를 받았다.

1849년 4월 3일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국민의회에서 제안한 독일 제국 황제의 관을 거절했고(그 이유는 진정한 보수주의자로서 단지 독일 연방의 군주들이 주는 제관만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음) 이 의회가 만들어낸 헌법을 쓸모없게 만들어버렸다.

그는 러시아와 영국의 압력을 받아 홀슈타인 공국과 슐레스비히 공국에서 덴마크의 통치를 타도하기 위해 일으킨 봉기에 대한 지원을 철회했다(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 그러나 다음에 그는 자신의 이전 정책을 크게 거스르면서 프로이센 주도하에 통일 독일을 건설하려 애썼다(1849~50). 그러나 이 '소독일' 연방은 오스트리아를 포함하는 '대독일' 연방으로 남아 있어야 했다. 오스트리아가 이 통일 독일에 도전해오자 그는 올뮈츠 협약에서 조건부 항복문서를 제시하며 전쟁에서 발을 뺐다.

비록 프로이센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의 연방의회로 되돌아가야 했으나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독일 관세동맹에서 프로이센의 우위는 위협받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종교 문제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841년에 '쾰른 종교 분쟁'을 로마 가톨릭교에 매우 유리하게 종결지었다.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애착이 크게 작용해 그는 로마 가톨릭교에 대해 대단히 공감하고 있었다.

또한 쾰른 대성당을 복원하는 작업을 더욱 장려했다. 한편으로 영국 성공회와 루터 교회의 예루살렘 합동 주교관구 창설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말년

그의 통치 말기는 반동의 시기였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총리 오토 폰 만토이펠의 관료주의적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1848년의 헌법을 보수적인 헌법으로 바꾸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여기에는 보통선거권 대신 소득에 따라 선거권을 3등급으로 나눈 1850년의 파멸적인 선거법을 도입하고, 군대와 관료 조직을 왕이 보유하며, 보수적인 구의회와 지방의회를 부활시키고, 의회의 제1원을 상원으로 바꾸어(1854) 압도적인 다수의 지주귀족이 지배하는 기구를 만드는 등의 조치가 따랐다.

그는 이 상원이 영국 상원을 본보기로 삼게 될 것이라 믿었으나 후계자들에게 남긴 정치 유언장에서는 프로이센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맹세는 거절하라고 호소했다. 1857년부터 중풍으로 인한 발작이 일어났다. 드문드문 괜찮을 때도 있었지만 이때부터 그는 계속 정신이 혼란해져 후에 황제가 된 동생 빌헬름이 국사를 떠맡았고 1858년에는 섭정이 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861년 장수시 궁전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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