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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군주는 각자 의무와 특권을 가진 계급과 자치단체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권력을 행사했다.
의회에 대표를 보내는 사회계급은 첫번째가 성직자, 2번째가 귀족, 그리고 3번째가 평민이었다. 이것을 약간 변형한 형태도 있었다. 상급 귀족과 하급 귀족을 나누는 경우도 있었고 일부 도시는 제3신분을 대표했다. 스웨덴에는 특이하게도 농민계급이 따로 있었다. 16세기와 같이 이런 사회제도가 발전하자 의회는 개개인이 모인 국민 전체가 아닌 '정치적 국가'의 중요한 구성원들을 대표하기 위해 열렸다.
귀족계급은 여전히 의회를 지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자기 영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대표할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주장은, 모든 개인은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법적 근거가 충분했고 대중도 그것을 충분히 납득했다. 신성 로마 제국에서는 의회가 자금을 통제했기 때문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군주의 세력이 그 나라의 지방 세력가보다 약한 곳에서는 지방 세력가가 자신의 이익을 더욱 추구하기 위해 의회를 이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군주의 힘은 주로 즉위할 때의 상황에 달려 있었고 대의기구의 힘은 이런 군주의 힘에 비례했다. 군주를 선출한다는 원칙은 형식적으로는 지켜질 수 있었지만 세습원칙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원칙은 대체로 시들어버린 상태였다.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면 특권층의 지지를 얻을 필요가 생겼고 이런 필요성 때문에 군주는 특권층이 지배하는 의회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에서는 의회가 헨리 8세의 종교개혁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막강한 권력을 얻었는데, 이 경우는 군주와 대의기구가 권력을 나누어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사례였으나 유럽 대륙에서는 대체로 사정이 전혀 달랐다.
프랑스의 삼부회는 파벌의 앞잡이로 여겨졌기 때문에 평판이 떨어졌다. 종교적 견해 차이는 권력의 본질에 대한 토론을 자극했지만, 저항권을 극단적으로 해석해 1589년에 프랑스 왕 앙리 3세의 암살사건을 불러일으킨 것 등은 폭군을 살해하는 것이 옳다는 신조를 폭로했을 뿐 아니라, 정권은 종교적 해결책을 강요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위그노에게 신앙의 자유만이 아니라 그들 자체의 학교와 법정 및 요새화한 도시까지 가질 수 있도록 허용한 1598년의 낭트 칙령은 이런 해결책 가운데 하나였다. 이 칙령은 처음부터 군주제에 대한 도전이자 군주의 통치력에 대한 시험대였다. 따라서 리슐리외가 위그노의 가장 강력한 요새인 라로셸을 점령한 것은 절대군주국으로 가는 이정표였다. 절대군주제는 프랑스로선 중요했을 뿐 아니라 프랑스의 세력이 점점 커졌기 때문에 유럽 전체에도 매우 중요했다.
프랑스
프랑스에서 절대주의의 이상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구체제인 앙시앵 레짐 동안 내내 손상을 입었고, 지속적인 모순이 절대주의의 발전을 방해했다.
국왕의 재정 수요는 상업과 산업을 촉진해야 할 끊임없는 필요성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로마 가톨릭이 이상으로 삼는 통일성과 국가 이익이라는 실리주의적 견해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감돌았다. 1685년 루이 14세는 낭트 칙령을 폐지했는데 이것은 프랑스의 위신과 경제를 손상시킨 조치였다. 국가 강화에 대한 귀족들의 반대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화조치가 필요했지만 귀족들에게 너무 많이 양보함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될 필요도 있었다.
이 2가지 필요성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었다. 루이 15세(1715~74 재위)와 루이 16세(1774~92 재위) 같은 허약한 왕들 때문에 정부가 약해졌을 때도, 융통성 있는 소규모 위원회에서 일하는 유능한 장관들을 거느린 부르봉 정부는 인상적인 업적을 이룩했다. 18세기에 프랑스는 훌륭한 도로망을 건설했고 항구들을 새로 세웠으며 교역을 확대했으며 번영하는 부르주아지는 활기찬 문화를 촉진했다.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절대주의의 특징은 2원적 상황에서 유래했다.
오스트리아 왕가의 수장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황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를 직접 다스렸는데, 이 영토는 알프스 산맥에서 도나우 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으로, 오스트리아·보헤미아·모라비아·슐레지엔과 투르크의 빈 공격(1683)이 실패한 뒤 오스트리아가 다시 점령한 헝가리 일부지역, 그리고 벨기에와 밀라노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스트리아 주민의 대부분은 로마 가톨릭교를 믿는 게르만족이었고,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및 슐레지엔 주민들은 대부분 슬라브어를 사용하는 슬라브족이었다.
각 지역은 그 나라에 딸린 칭호와 권리를 황제에게 제공했고, 그 나라 국민의 특별한 권리로 황제의 권한을 제한했다. 프로이센이 제국에서 독립해 따로 왕국을 이루었고 보헤미아는 슬라브족 국가였지만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 연방국가였다.
게르만 국가는 제각기 자치를 누렸고 외국 열강들과 협상할 자유도 갖고 있었다. 군주는 성직자이든 세속군주이든 제국의회(Reichstag)에서 자기 나라를 대표할 권리를 누렸다. 제국의회를 이루는 세 부류의 의원단 가운데 첫번째는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단이었다.
2번째는 공작과 백작, 남작 및 성직자 군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3번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도시들로 구성되었다. 약한 충성의 의무와 강한 민족 의식으로 묶여 있던 이 제국은 중세의 보편성을 유지하면서 초기 근대국가의 몇 가지 측면을 갖고 있었지만, 중세에도 근대에도 완전히 속해 있지 않은 세계를 상징했다. 종교적 분열은 새로운 경계를 만들었고 정책을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졌다. 그래서 팔츠 선제후가 30년전쟁을 일으킨 반란자들에게 보헤미아 왕권을 받기로 결정한 것도 이 달라진 기준에 따라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다.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권한을 확대하거나 복종을 강요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 페르디난트 3세는 '쿠이우스 레기오, 에이우스 렐리기오'(cuius regio, eius religio:영토를 지배하는 자가 종교를 결정한다)라는 원칙을 다시 인정한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그후 페르디난트 3세와 그의 후계자 레오폴트 1세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에 대한 권한을 강화하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았다.
그러나 이들과 18세기의 황제들이 무력한 존재였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영토 분열은 제후가 자기 나라를 다스리는 행정관 역할과 제국 안에서 자기 나라를 대표하는 대표자 역할을 동시에 맡는 것을 의미했다. 여기에는 헌법 개념을 발달시킬 수 있는 자극제는 있을 수가 없었다. 게르만족은 정치적 자유와 통치자의 권력을 결부시켰다. 게르만족은 '조국'인 자기 나라에 충성을 바쳤고, 다른 제후국은 '외국'이었다.
판결이 필요할 때면 제후는 여전히 제국대법원(Reichskammergericht)으로 가곤 했다. 단순한 법원 이상의 존재인 제국대법원은 치안·채무·파산·세금 등의 문제에서 연방의 행정부 구실을 했다. 마인츠 같은 약소국가들은 국내의 제반 문제를 잘 처리해 계몽사상을 유리하게 이용할 수 있었지만, 독일의 미래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좀더 큰 나라의 통치자들이었다. 이들은 황제를 주목했기 때문에 황제의 불안정한 지위는 중대한 문제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황제 카를 6세의 지배를 인정하고, 베르크 공국에 대한 자신의 상속권이 정당함을 확인했다. 그 대가로 프로이센 왕은 황제의 딸이 제국을 상속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카를 6세의 국사조칙(Pragmatic Sanction)을 승인했다.
그러나 카를 6세는 1738년에 프랑스와 조약을 맺을 때 프로이센의 권리 주장을 부인했다. 1740년에 두 군주가 죽자, 프로이센 왕위를 물려받은 프리드리히 2세는 오스트리아의 슐레지엔을 공격해 아버지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의 슐레지엔 침공에 뒤이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다.
보헤미아의 귀중한 지역인 슐레지엔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계속된 싸움의 중심부였다. 마침내 슐레지엔을 잃은 신성 로마 제국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의 측근들은 무찌를 수 없으면 그것을 모방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 정부를 따로 두는 대신 그것을 하나로 통합해 좀더 효율적인 중앙정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요제프(1765년에 황제가 되어 어머니와 공동으로 제국을 다스렸고,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1780~90년 혼자 제국을 다스림)는 중앙정부를 무자비한 방식으로 발전시켰다. 요제프는 교육과 좀더 생산적인 경제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을 계속 촉구했고 권리의 균등과 영토의 통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갈리치아를 얻기 위해 폴란드 분할에 참여했고 제국 통치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바이에른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프리드리히 2세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결과 '감자전쟁'이라고 부르는 바이에른 왕위계승전쟁(1778)이 일어났고 이 전쟁이 끝난 뒤 제국의 앞날은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제국이 멸망(1806)하는 데에는 나폴레옹의 모욕적인 개입이 있었다.
프로이센
1640년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선제후령을 물려받은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60년에 프로이센 의회의 저항을 우격다짐으로 억눌렀다.
그가 좀더 안정된 경제력과 군사력 및 관료체계를 갖추게 됨에 따라 의회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더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다른 나라의 모범이 되는 프로이센 체제가 확립되었다. 이것은 간단히 말하면 봉사하는 귀족정치이자 군사적 요구에 따라 지배되는 관료정치였다. 대선제후의 아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대의명분을 지지하겠다고 맹세한 뒤 신생 프로이센 왕국의 왕위에 올라 프리드리히 1세가 되었다(1701).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1713~40 재위)은 권력의 중앙집중을 완성하고, 경제의 신중한 관리를 통해 유지되는 군대를 창설했다.
프리드리히 대왕(1740~86 재위)은 폴란드로부터 서프로이센을 획득해 병합하고, 새로 점령한 슐레지엔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개발해 산업의 토대를 확립했다.
스웨덴
스웨덴의 젊은 국왕인 구스타프 2세 아돌프는 1611년에 즉위할 때 '왕의 보증'(Konungaförsäkran)을 강요받았고, 이때문에 공식적으로는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자문위원회(Råd)와 의회(Riksdag)에 의존해야 했다.
하지만 이같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그와 총리 악셀 옥센셰르나는 대담한 외교정책과 중요한 내정 개혁을 과감하게 수행함으로써 30년전쟁의 결과 독일의 영토, 특히 서(西)포메라니아와 브레멘을 얻는 데 이바지했다. 카를 12세(1697~1718 재위)는 폴란드와 러시아를 공격해 그가 그토록 훌륭하게 지휘한 군대만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위험에 빠뜨렸다. 카를이 노르웨이에서 전사했을 때, 스웨덴은 이미 독일에 가지고 있던 영토마저 빼앗겼고 성인 인구의 1/3을 잃은 뒤였다.
귀족계급의 반발로 스웨덴에서는 의회의 여러 위원회가 모든 결정을 내리는 제한군주제 시대가 열렸다.
덴마크
덴마크 의회는 국왕 프레데리크 3세를 지상의 최고 우두머리로 선언하고, 국왕을 인간이 만든 모든 법률보다 높은 위치로 끌어올렸다(1661). 크리스티안 7세 시대는 요한 슈트루엔제가 왕을 유폐하고 자유주의적 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슈트루엔제가 1772년에 몰락할 때까지 2년 동안 1,000개가 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이 사건은 왕이나 신하가 독재권력을 얻었을 경우, 계몽적 절대주의가 가져올 수 있는 이익만이 아니라 그 위험도 분명히 보여주었다.
스페인
스페인의 쇠퇴는 로마 가톨릭과 스페인의 패권을 지나치게 옹호한 펠리페 2세(1556~98 재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만 스페인이 다스린 카스티야·아라곤·포르투갈·밀라노·나폴리·네덜란드·프랑슈콩테 지역의 사회 구조 및 정치체제에서 비롯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이들 나라의 구조는 왕국 연합(1479년의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결합)과 그후에 얻은 영토가 가지고 있는 개별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었다. 카스티야는 스페인이 신세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은으로 번영을 누리게 되었을 때에는 그 번영의 가장 큰 몫을 차지했지만, 멕시코와 페루가 자립하게 되자 그 최악의 결과로 고통을 받았다. 은 수입은 급속히 줄어들었고, 유럽의 다른 지역을 대상으로 한 수출입은 심한 불균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세금 부담은 주로 카스티야가 짊어졌다.
1659년에 스페인은 루시용과 세르다뉴 및 아르투아를 프랑스에 할양할 수밖에 없었고, 1667~68년에 프랑스군이 침공하자 플랑드르의 스페인 요새들은 곧바로 투항했다. 1680년대에 약간의 영토를 되찾긴 했지만 스페인은 굴욕적인 분할조약의 대상이 되었다. 1759년에 자비로운 카를로스 3세가 즉위하자, 국립은행을 창설하고 농업을 개선하고 새로운 도로와 공장 및 병원을 세우는 등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포르투갈
스페인과 이웃해 있는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지만, 세습 재산을 지키겠다는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의 완강한 결심 때문에 오랫동안 전쟁을 치른 뒤 1668년에야 독립을 얻었다.
이 작은 나라는 스페인 왕이 포르투갈 왕을 겸하게 된 1580년부터 스페인과의 관계 때문에 고통을 받았다. 포르투갈이 반란을 일으킨 주요원인은 브라질의 일부 지역과 동아시아 지방에 있는 식민지의 대부분을 스페인에 빼앗긴 데 대한 원한에서였다. 포르투갈인들은 스페인처럼 오스트리아와 손잡고 프랑스 및 네덜란드와 싸우는 것이 포르투갈에 이익이 된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포르투갈은 외교정책의 방향을 바꾸어 영국과 손잡고 미슈인 조약(1703)을 맺었지만 이것은 부흥보다는 잠시 숨 돌릴 여유를 가져다주었을 뿐이다. 세바스티앙 폼발은 주세 1세의 총리로서 사실상 포르투갈의 독재자가 되자, 철저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1755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된 리스본을 재건한 것이 그의 기념비적 업적이라면, 예수회에 대한 탄압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스페인과 프랑스 및 오스트리아는 그를 본받아 이 강력한 수도회를 추방했다.
'계몽된'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교육을 장악하고 있는 예수회는 진보를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영국
17세기의 영국에서는 왕(행동보다 말이 더 절대적인 왕)과 의회 사이에 충돌이 반복되었다.
영국의 참정권은 극소수 특권층에 불균형하게 치우쳐 있었고 이들의 손으로 뽑힌 의회는 개인보다 특권층의 이익을 대표했다. 의회는 법적 선례와 권리에 관심이 많았다. 찰스 1세는 1629~39년에 의회를 소집하지 않고 나라를 다스리려고 애썼지만 유력자들을 멀리함으로써 내란(청교도혁명)을 일으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내란으로 그는 결국 왕위에서 쫓겨났고 그후 처형당했다(1649). 의회정치의 실험은 올리버 크롬웰의 호국경 정치로 절정에 이르렀다.
크롬웰이 죽은 뒤(1658) 찰스 2세가 국가 재정에 대한 권리를 제한받는다는 조건으로 왕위에 올랐다(1660). 휘그당은 로마 가톨릭과 프랑스에 대한 백성의 편견을 이용해 왕의 절대주의적 경향을 억누르려 했지만 이 위기(1678~81)가 끝난 뒤 찰스 2세는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러나 제임스 2세(1685~88 재위)의 짧은 통치는 그를 배제하려 했던 사람들의 두려움을 정당화했다. 로마 가톨릭교도를 구제하려는 제임스 2세의 정책은 국가 경영에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자부하는 가문들뿐만 아니라 군주제를 지지하는 성공회 지도자들한테도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명예혁명으로 네덜란드 총독인 빌렘이 영국 왕위에 올라 윌리엄 3세(1689~1702 재위)가 되었다.
영국에는 성문법이 없었기 때문에 군주는 장관을 임명하고 외교정책을 수립하고 군대를 관리하거나 지휘하는 권리를 보유했다.
1714년에 조지 1세가 즉위한 뒤 총리(prime minister)라는 관직이 생겨났다. 장관들은 법적으로 군주에게 주어진 권한을 행사했으며 의회에 대한 책임도 졌다. 동료 장관들을 선택할 수 있는 총리의 권한이 문제가 되었지만 조지 1세와 조지 2세는 관직 임명과 관련된 복잡한 사항들에 무관심했고 장관들의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기 때문에, 1688년에 이루어진 세력균형은 돌이킬 수 없었다.
중앙집권화한 입법부는 지방분권화한 행정부와 공존했다. 궁정의 관직임명권이 정치적 수완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자 중앙과 지방의 대립이라는 주제는 새로운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대부분의 법률은 법률적·도덕적 원칙이 아니라 행정의 세부적인 항목에 관한 것이었다. 정책은 왕과 장관들의 합의에 따라 수립되는 경향을 보였다.
국왕은 1708년 이후로는 한번도 법률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고, 어떤 내각도 총선에서 패배하지 않았으며, 거의 모든 의회가 임기를 끝까지 채웠다.
네덜란드
네덜란드 북부의 7개 주가 연합해 세운 네덜란드 공화국의 헌법은 시민적 자부심을 보여주고 형태와 우선권에 관심이 많다는 점에서 부르고뉴의 전례를 반영하고 있었다.
주권은 7개 주가 개별적으로 가지고 있었다. 각 주의 통치권은 주 의회가 가지고 있었으며 의회에서는 도시 대표가 우세를 차지했다. 네덜란드 전체의회(State-General)는 외교문제와 군사적 조치 및 세금문제를 다루었다. 홀란트는 7개주 가운데 가장 부유했기 때문에 지도적 지위를 누렸다. 네덜란드 총독(stadthoider)의 자리는 1650년~72년에 비어 있었다.
그동안 네덜란드 국무장관 얀 데 위트(1653~72 재임)는 교역을 늘리고 세금을 낮추려고 애썼다. 그가 1672년에 프랑스 침략군에게 살해당하자 빌렘 3세가 정권을 잡았다. 영국 왕 찰스 1세의 외손자이자 프랑스 왕 앙리 4세의 외증손자인 빌렘 3세는 영국 왕녀 메리 스튜어트와 결혼했고 1689년에는 메리와 함께 영국의 공동군주가 되어 윌리엄 3세라는 칭호를 받았다.
1747년에 네덜란드의 빌렘 4세는 내정개혁안을 발표해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7개 주 전체의 총독으로서 중앙집권화에는 성공했지만, 업적은 거의 없었다. 네덜란드가 논리적 결론에 따라 공화제를 폐지하고 빌렘 1세를 왕위에 앉힌 것은 1815년에 이르러서였다.
러시아
끝없이 넓은 러시아 땅의 개방적 성격은 서양 특유의 2가지 과정(뚜렷한 윤곽과 튼튼한 뿌리를 가진 공동체에서 이루어진 소중한 권리의 신장, 통치기술이 능란한 중앙 권력의 발전)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국가의 정당성은 농민으로 하여금 땅을 경작하게 만드는 능력에 달려 있었다. 권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회에서 농노제도는 지극히 논리적인 소산이었다. 영주에 대한 충성이라는 봉건적 개념, 계약의 효력, 법률의 창조물인 자유라는 사상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독일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은 지방의회나 시의 자치단체는 물론 동업조합도 발견하지 못했다.
상인들은 국가 공무원이었다. 절대주의는 러시아 사회의 초기 발달 단계와 물리적 상황에 내포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절대주의는 전통적 방식에 도전할 만큼 강력한 통치자를 만나야만 비로소 서양과 비슷한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힘이 될 수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는 1613년에 미하일 황제가 즉위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표트르 1세(1689~1725 재위)는 허약한 군대, 무질서한 정부, 잠재적 관료인 교육받은 계층의 부족, 서양의 과학기술을 접하지 못한 원시적 경제를 개혁해야 했다.
표트르는 우선 병역의무제도에 바탕을 둔 군대를 창설했다. 그가 만든 관등표(Table of Ranks:1722)는 사회를 3가지 범주(궁정·정부·군대)로 분류했다. 군대 계급 가운데 위에서 8번째 등급까지는 모두 임관장교였는데 이들은 귀족보다 한 계급 낮은 젠트리 계급이 되었다. 표트르는 새로운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고 여기에 1711년에 창설한 상원과 40개의 자문위원회를 대신한 9개 위원회를 두었다. 그의 명령으로 건설된 주철 공장들은 러시아의 수출이 수입을 초과하는 데 이바지했다.
예카테리나 2세(1762~95 재위) 때에는 새로운 땅을 얻으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이 노력은 크림 반도의 획득(1783)으로 절정에 이르렀지만 이것은 지배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켰다. 경험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예카테리나는 젠트리에게 몫을 나누어주고 발언권을 주면서 정부를 강화하려고 애썼다. 1775년의 대개혁을 통해 러시아 땅은 50개 현으로 나뉘었다. 귀족들은 선거를 통해 지방학교와 병원을 운영하기 위해 설치된 위원회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들이 모여서 집회를 여는 것도 허용되었다. 러시아의 발전은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졌다. 예카테리나 말년에 유럽에서 일어난 사건과 러시아 역사는 그녀의 업적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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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유럽 군주제 시대의 절대주의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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