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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70. 8. 3, 프로이센 포츠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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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40. 6. 7, 베를린 |
국적 | 프로이센 |
요약
프로이센의 왕(1797~1840 재위).
(영). Frederick William Ⅲ.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아들로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이로 인한 열등감을 극복할 수 없었다. 1793년 결혼한 아내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의 영향을 받아 이따금 본질적으로 평범한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행동을 했다.
그는 제2·3차 대(對) 프랑스 동맹전쟁 때 중립을 지켰으나 이것이 프로이센의 우위를 퇴조시키는 가속제 역할을 했다.
예나 전투 이전에 행한 몇몇 국내 개혁은 절대주의 체제를 바꾸지 않을 훗날의 개혁을 예시한 것이었다. 1807년까지 그는 평범한 인물들의 영향을 받고 있던 재래의 내각정치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었다. 1806~07년의 나폴레옹 전쟁에서 참패하고 엘베 강 서쪽 지방을 모두 잃게 되자, 그는 마침내 프로이센이 결정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카를 슈타인과 카를 폰 하르덴베르크 등 프로이센 정치가들이 제안한 개혁을 재가했으나, 이것은 고급 관료정치의 개혁이었을 뿐 왕의 특권에 대한 개혁은 아니었다. 왕은 개혁이 '자코뱅주의'로 귀결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했고 뛰어난 인물을 고문관으로 삼는 아량도 없었다. 해방전쟁(1813~15) 기간 내내 그는 국민들의 열의와는 동떨어져 있었고, 항상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를 받들며 오스트리아의 정치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의 견해에 동조했다. 빈 회의에서 작센 분할을 둘러싼 위기 때는 알렉산드르 1세의 편을 들어 영국·프랑스·오스트리아와 전쟁으로 치달을 뻔했다(1815. 1). 그러나 최종적인 화해를 통해 프로이센은 라인 지방과 베스트팔렌, 그리고 작센의 대부분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토 획득과는 대조적으로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통치 마지막 25년간은 그의 인격적 결함이 큰 요인이 되어 프로이센의 운명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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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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