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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타인

다른 표기 언어 (Heinrich Friedrich) Karl, Reichsfreiherr vom und zum 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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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57. 10. 26, 나사우(지금의 독일에 있음) 나사우안데어란
사망 1831. 6. 29, 베스트팔렌 슐로스카펜베르크
국적 프로이센

요약 라인란트 태생 프로이센의 정치가.

개요

프로이센 총리(1807~08)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1812~15 재위)의 개인고문을 지냈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프로이센의 광범위한 개혁을 추진했고, 나폴레옹에 맞선 마지막 유럽 동맹결성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년 및 청년시절

신성 로마 제국의 귀족인 그의 아버지는 개신교도였지만, 가톨릭교도인 마인츠 선제후의 시종이었다.

그의 가문의 전통은 그가 말한 것처럼 "독실한 신앙, 애국심, 계급과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고, 공동체의 요구에 자신의 생애를 바치며 근면과 노력으로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획득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가풍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는 자라면서 오랜 역사를 가진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왕조에 강한 애착을 느끼게 되었으며, 독일에 대해 열렬한 애국심을 품게 되었다. 아들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법원 판사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의 뜻을 따라 1773년 그는 괴팅겐대학교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법률만이 아니라 통계학과 경제학 및 역사도 공부했다. 그는 독일의 초기 역사와 영국문학 및 헌법 이론에 관한 책과 몽테스키외의 작품을 읽고 감명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나중에 정치가로 활동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아우구스트 레베르크의 영향

슈타인이 괴팅겐대학교에서 만난 아우구스트 빌헬름 레베르크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 그에게 학문을 가르친 어떤 교수보다도 큰 영향을 미쳤다.

레베르크는 자유주의적 보수주의 정책을 옹호하는 정치사상가였다. 옛것이 좋다는 사실이 입증된 경우에는 옛것을 그대로 보존하고, 상황이 개혁을 요구할 경우에는 개혁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슈타인은 1775~1800년에 레베르크와 끊임없이 의견을 나누면서 독자적인 개혁사상을 발전시켰다. 그는 전통과 진보를 결합시킬 수 있는 방법, 즉 혁명과 절대주의 사이의 중도노선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1777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독일 제국의 여러 기관, 즉 베츨라어에 있는 제국 법원, 빈의 제국법관회의, 레겐스부르크의 제국의회의 법률절차를 공부하느라 다시 3년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프로이센의 행정에 몸담기로 결심했다. 1780년에 그는 친구이자 프로이센의 광업장관인 프리드리히 안톤 폰 하이니츠를 통해 좋은 일자리를 구했다.

프로이센에서의 관리 생활

슈타인은 광공업부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베를린에서 근무하다가 그후에는 오랫동안 프로이센의 베스트팔렌에서 일했다. 그는 광업 활동을 감독하고 베스트팔렌의 지방행정을 담당하면서 지방 행정의 전문가가 되었다. 1796년 그는 라인 지방과 베스트팔렌의 최고 행정관에 임명되었으며, 1802~03년 뮌스터 및 파더보른 주교관할구를 프로이센 영토로 통합하는 일을 처리했다. 그는 행정가로서의 업무에 만족했고, 맡은 일을 아주 성공적으로 해냈다. 도로망을 개선하고, 강에 배가 다닐 수 있게 했으며, 직물 산업을 진흥하고, 세금 징수 체제를 개혁했다.

그는 1793년 빌헬미네 발모덴 여백작과 결혼했다. 부인은 하노버 가문 출신 장군의 딸이며, 영국 왕 조지 2세와 그의 정부 야머스 백작부인 사이의 손녀였다. 슈타인은 결혼 후 처음 몇 해 동안은 아내가 자기의 생활방식이나 목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했지만 해가 거듭됨에 따라 아내의 인격과 능력을 존경하게 되었다. 부부는 함께 두 딸의 교육에 헌신했다. 1807~15년에 슈타인이 가족과 오래 떨어져 지내는 동안 아내는 남편의 영지를 관리하고 그의 위탁사항을 실행하며 아이들을 양육했다.

슈타인은 아내보다 12년이나 오래 살았다.

장관과 총리로서의 업적

1804년 10월 27일 슈타인은 왕국의 수도 베를린으로 소환되어 제조업 및 물품세장관(경제 담당)에 올랐다.

이 자리에 있는 동안 그는 중앙정부 내 부처들의 활동을 속속들이 통찰하고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확신했다. 그는 국왕 참모진들이 행정 조직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이를 거부해 그와 국왕 사이에 한때 논쟁이 벌어졌으며, 1807년 1월 3일 장관직에서 해임되었다. 이 시기는 프로이센이 예나와 아우어슈테트에서 프랑스군에게 패배한(1806. 10) 뒤였고, 틸지트 평화조약(1807. 7)을 맺기 전이었다.

1807년 3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으로 돌아온 그는 이 뜻하지 않게 주어진 여가를 이용해 유명한 〈나사우 비망록 Nassauer Denkschrift〉을 썼다. 프로이센 왕국의 국가 개혁을 위한 포괄적 계획안을 담은 이 비망록은 그의 사상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글이다. 그의 기본 원칙은 건전하고 효율적인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국민과 정부 사이에 유기적인 관계가 확립되어야 하며, 국민이 국가 문제에 책임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시각은 영국 자치 제도에 대한 깊은 관심을 통해 오래 전부터 그의 마음속에서 형성·발전되고 수정되었으며, 경험을 통해 더욱 내용이 풍부해지고 약점이 보강되었다.

그는 국가가 국가에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면서 지방 자치를 실시하면 대중이 '시민 정신'(Bürgersinn)과 '공동체 의식'(Gemeingeist)을 갖게 되어 국가의 이익을 자신의 이익으로 생각하게 되리라고 기대했다.

프로이센의 팔다리를 잘라낸 틸지트 강화조약에 따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나폴레옹의 요구대로 카를 폰 하르덴베르크를 장관직에서 해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서 왕은 나폴레옹의 권고대로 슈타인에게 새 총리직을 맡겼다. 1807년 9월 30일 메멜에 도착한 그와 왕은 몇 차례 면담을 거친 뒤 10월 4일 새 총리에 임명되었다.

고집스럽고 타협할 줄 모르며 자신만만한 슈타인은 나라가 비상사태에 직면한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근본적인 개혁을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국가의 낡은 제도는 이미 외면당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평소에는 우유부단한 왕조차도 이제는 프로이센을 좀더 근대적인 발판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게다가 프로이센에 대한 나폴레옹의 요구 때문에 국내 제도에 영향을 미치는 과감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었다. 자유주의적 경향을 가진 일부 관료들도 그와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총리에 취임한 직후부터 슈타인은 개혁에 착수했다(나폴레옹 전쟁). 1807년 10월 9일 농노를 해방하는 '소유권 제약 철폐와 토지 재산의 자유로운 이용 및 주민들의 인간적 관계에 관한 법률'이 공포되었다. 이러한 '10월 칙령'은 수많은 문제(그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토지를 농민 소유로 차츰 이전하는 문제였음)에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마련해주지는 못했지만, 시민의 자유를 보장하고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칙을 천명한 결정적인 조치였다.

이 법률이 내포하고 있는 경제적 의미도 그에 못지않게 혁명적이었다. 이전에는 귀족들은 귀족이 아닌 사람에게 땅을 팔 수 없게 되어 있었지만 앞으로는 누구나 자유롭게 땅을 사고팔 수 있었다. 그리고 백성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

슈타인이 1808년 11월 19일에 공표한 '지방자치 조례'(Städteordnung)는 지속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이 조례는 도시에 지방자치를 도입했고, 봉급을 받는 행정관(시장과 치안판사)과 지방의회를 분리했으며, 따라서 각 도시가 지역 문제 대부분을 그 도시의 주민을 통해 자치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대도시는 내무장관이 직접 책임을 지는 경찰청장의 감독을 받았다. 슈타인의 조례는 독일의 지방자치 제도가 발전해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준 셈이었다. 슈타인은 프로이센의 행정 체계 전반을 효율적으로 근대화했다. 절대 권력을 가진 왕의 무책임한 조언자들, 이른바 내각 참모들은 그때까지 막후에서 일종의 비밀 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슈타인은 이들을 배제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시대에 권력의 핵심으로 창설된 '전체 각료 회의'도 폐지했다.

그 대신 슈타인은 프로이센 영토 전체를 관할하는 외무부·내무부·재무부·법무부·육군부 등 정부 부서를 창설했다. 그는 같은 원칙에 따라 중간 행정부(Regierungen : 주청)의 활동도 체계화했고, 중앙정부에 직접 책임을 지는 지방장관, 즉 주 전체를 대표하는 공식 수반인 지사(Oberpräsident)라는 직위를 창설했다.

그의 계획은 대부분 실행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의 농업 및 경제 개혁안은 하르덴베르크가 1810년부터 시행했지만, 하르덴베르크는 슈타인의 보수적 자유주의보다 계몽주의에 더 가까운 정신으로 이 개혁안을 다루었고, 슈타인과는 달리 교육이나 도덕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말년

1808년 8월 슈타인의 경솔한 편지, 즉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내용의 편지가 나폴레옹 첩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그해 11월 24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프랑스의 압력에 굴복하여 그를 공직에서 해임했다. 뒤이어 나폴레옹이 그를 공공의 적으로 선언하자(1808. 12. 16) 슈타인은 오스트리아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1812년 5월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초청으로 러시아를 방문, 황제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같은 해 겨울에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이 실패로 끝나자, 슈타인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러시아 국경 밖까지 추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13년초에 그는 동프로이센의 군 창설 계획을 돕는 한편,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칼리슈 조약을 교섭했다. 이 조약은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공식신호였다. 그는 해방전쟁과 빈 회의 때 자신의 도덕적 권위에 의지해 게르만 국가들의 정치적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1816년에 은퇴해 슈타인은 베스트팔렌에 있는 자기의 시골 영지 카펜베르크로 돌아왔다.

그는 고령임에도 여전히 정력적이었다. 독일 역사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출판 기획은 사실상 슈타인의 노력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초기 게르만 역사학회'가 1819년 1월 20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있는 슈타인의 집에서 창설되었고, 그는 회장과 총무를 겸임했다. 이 학회는 지금도 독일 중세사의 자료를 출판하는 가장 중요한 단체이다. 1826년에 시작된 방대한 실록 총서인 〈게르만 역사 Monumenta Germaniae Historica〉는 슈타인의 말년에 특히 열성을 쏟은 일이었다.

그 자신의 말처럼 그는 "게르만 역사의 향기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게르만 역사의 토대를 연구하도록 촉진하며, 그럼으로써 공통된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보존하는 데 이바지하기 위해" 이 출판 사업을 기획했다.

그의 동시대인들 가운데 학식이 있는 사람은 거의 모두 슈타인을 비범한 거물로 여겼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은 물론, 그의 꺾이지 않는 정력과 격한 성질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그의 위대함을 인정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이후 프로이센 국내 문제에 관여한 정치가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슈타인의 업적은 여러 세대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절대주의 국가에 자유주의적이고 입헌적인 요소를 도입했으며, 솔선수범과 영향력을 통해 공직에 참여하는 것을 도덕적인 의무로 삼았다. 그는 20세기에 접어 든 뒤에도 독일인의 정치적 사표로 추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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