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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772년~95년까지 3차에 걸친 분할로 오랜 역사를 가진 폴란드가 소멸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후 1918년과 1945년 재수립된 폴란드 정부는 소련의 기도로 1952년에 스탈린의 전체주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되었다.
1980년 바웬사가 연대자유노조를 결성하여 반정부 운동을 전개했으나 1981년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지도층이 체포되었다. 1989년 정치체제 개혁이 이루어진 후 의회선거에서 연대자유노조가 압승을 거둬 1990년에 바웬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빈부격차의 심화와 연대자유노조 내부의 정치적 분열에 대한 좌절감이 확산되면서 1993년 의회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한 과거 공산주의자들에게 승리의 발판이 마련되었으며 1995년 사회민주주의 후보인 크바스니에프스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슬라브계 부족들이 일찍이 BC 2000년에 비수아 강 유역에 정착했다는 이론이 증명되었다.
슬라브 종족은 비수아 강 유역으로부터 여러 방향으로 이주하여 결국은 동슬라브족·남슬라브족·서슬라브족 등으로 차별화되었다. 800∼960년에 서슬라브계의 몇몇 부족은 서로 연합하여 작은 국가들을 이루었다. 이 국가들 가운데 하나를 통치한 피아스트 왕조는 오늘날의 포즈나인 주변지역을 통일했는데, 이 지역을 흔히 대(大)폴란드라고 한다.
폴란드의 건국연도로 인정되고 있는 996년은 피아스트 왕조의 미에슈코 1세(963∼992경)가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해이다. 그후 수십 년 뒤에 폴란드 남부에 거주하던 종족들이 연합하여 소(小)폴란드를 이루었다. 1047년 대폴란드와 소폴란드 모두 피아스트 왕조의 카지미에슈 1세를 군주로 인정했다. 피아스트 왕조는 1386년 리투아니아의 대군주 요가일라(야기에우오)가 피아스트 왕조의 왕위계승자인 야드비가 공주와 결혼하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같이 지배하는 야기에우오 왕조를 세울 때까지 폴란드를 통치했다.
야기에우오 왕조의 계승자들은 1572년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통치했으며, 폴란드는 리투아니아와 하나가 되면서 15세기와 16세기초에 중동부 유럽에서 세력을 떨칠 수 있었다. 야기에우오 왕조의 군주들은 그 당시 헝가리와 보헤미아에 대한 통치권도 확보했으며, 튜튼 기사단, 오스만 제국, 모스크바 대공국과 같은 강력한 적대세력도 물리쳤다. 그러나 폴란드의 왕들은 왕국 내의 토지를 소유한 귀족계급에게 점차 더 많은 특권을 베풀어야만 했으며, 귀족들은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농민들을 노예로 삼았다.
1572년 야기에우오 왕조가 몰락한 후 폴란드의 귀족계급은 유럽의 여러 왕가와 폴란드의 귀족 가문에서 왕을 선출했다. 이들은 일부러 유약하거나 무력한 인물을 왕으로 뽑았고, 그 결과 권력은 점차 이기적이고 논쟁적인 귀족계급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국가는 이웃 강대국들이 활기를 되찾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점차 약화되었다.
폴란드는 1650년대에 남동부의 변경지대(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 타타르인들과 카자흐족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했으나 1655년 스웨덴과 러시아의 침공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이들 국가들 사이에 지속적인 분쟁이 시작되었다.
안으로는 경제의 후퇴와 함께 로마 가톨릭교도와 그리스정교회교도 사이에 야기된 사회적 분규에 시달렸다. 1772년 폴란드 제1차 분할이 이루어져 폴란드 영토의 1/4 이상이 러시아(폴란드 북동부의 일부 지역)·오스트리아(남부의 갈리치아 지방)·프로이센(북서부의 폴란드령 포메른 지역과 에르멜란트 지방)에 넘어갔다. 1793년 제2차 분할이 진행되어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더 많은 영토를 빼앗겼다.
1795년 제3차 분할의 결과 주권국으로서의 폴란드는 완전히 소멸되었으며, 대신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가 그 자리를 메웠다(→ 폴란드 분할). 1815년 러시아 제국 내에 독자적인 정치체제와 군사력을 갖춘 폴란드 왕국이 수립되었으며, 폴란드인들은 1830, 1863년에 제정 러시아의 폭정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 두 반란을 겪은 후 러시아는 폴란드인들의 교육체제에 러시아화 정책을 반영했고, 이를 본떠 프로이센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 역시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엄격한 독일화 교육을 실시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에 합병된 폴란드령만이 다소나마 자치권을 누렸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과 러시아 혁명(1917)이 끝난 후 1918년 연합국에 의해 독립국가 폴란드가 재수립되었고 이후 3년에 걸쳐 독일·오스트리아·러시아가 영토를 반환함으로써 영토가 확대되었다.
제1·2차 세계대전 사이에 육군원수 요제프 피우수트스키가 폴란드의 정치를 장악했는데, 그는 1926∼35년에 독재정치를 실시했다. 동쪽의 소련, 서쪽의 나치 독일과 불편하나마 지속되던 공존체제는 1939년 독일이 침공하여 폴란드 서부지역의 2/3를 차지함으로써 끝이 났으며, 나머지 1/3은 소련이 점령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함으로써 폴란드 전역이 나치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다. 폴란드를 점령한 독일은 대량학살을 통해 폴란드의 문화를 말살시키고, 폴란드의 소수민족 집단인 유대인들을 멸족시키기 위한 정책을 실시했다(제2차 세계대전). 1944∼45년 겨울에 소련의 적군이 폴란드 땅에서 독일 세력을 몰아냈으며, 적군의 보호 아래 공산주의자들이 이끄는 폴란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당시 영국 런던에 있었던 폴란드 망명정부는 무시되었음). 1945년 폴란드의 국경선은 다시 변경되었는데 재수립된 폴란드 정부는 동쪽의 넓은 영토를 소련에게 빼앗겼지만 패망한 독일로부터 서쪽으로 상당한 영토를 획득했다.
한편 소련의 지도자 요시프 스탈린은 폴란드를 확실하게 소련의 세력권 안에 두고 싶어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볼레수아프 비에루트가 이끄는 폴란드의 공산주의자들은 자유선거를 축소하고 반공산주의자들의 대대적인 체포를 실시하는 한편 농장을 집단화하고 산업시설을 국유화했다. 1948년 PUWP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어 폴란드를 통치하기 시작했고, 1952년에 소련의 체제를 본떠 만든 헌법이 채택되었다. 결국 폴란드는 스탈린이 주도하는 전체주의 세력권 안에 놓이게 되었다.
스탈린이 죽고 3년 뒤인 1956년 폴란드의 노동자들이 총파업을 일으켰으나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계속되는 위기상황에서 부아디수아프 고무우카가 PUWP의 당수가 되었고, 그의 집권하에(1956∼70) 폴란드의 집단농장들이 해체되는 한편 공산정권의 전체주의적 통제가 많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1970년 고무우카의 경제정책이 계속 실패하자 노동자들은 다시 연속적인 파업을 일으켰고, 기에레크가 고무우카를 밀어내고 당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기에레크 역시 소련의 간섭 속에서 폴란드의 경제를 효과적으로 가동시키는 것에 실패함으로써 1970년대말 폴란드 국민들은 또다시 고물가와 식량난·주택난을 겪어야 했다. 1979년 크라쿠프 대주교였으며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이었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교황이 된 후 첫 방문지로서 모국 폴란드를 찾았다.
폴란드의 로마 가톨릭교도들은 교황의 방문을 맞아 열광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와 같은 교회에 대한 충성심의 표현은 소련식 정치체제에 대한 간접적인 시위이기도 했다.
1980년 8월 전기기술자 레흐 바웬사가 이끄는 파업이 그다인스크 조선소에서 일어나 다른 도시들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들은 바웬사의 지도하에 연합하여 불법적 노동조합인 연대자유노조를 결성했고, 연대자유노조는 그후 결국 정부의 양보를 얻어내 명백한 합법적 조직으로 인정을 받았다.
기에레크의 뒤를 이어 스타니수아프 카니아가 PUWP의 서기장이 되었으며, 카니아의 실각 이후에는 국방장관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이 서기장 지위에 올랐다. 연대자유노조는 계속되는 파업의 와중에서 정부에게 더 많은 양보를 요구했고, 야루젤스키는 이에 맞서 1981년 12월 계엄령을 선포했다. 연대자유노조는 다시 불법화되었고 지도층은 체포되었다.
계엄령은 18개월 후에 해제되었지만 정부는 계속해서 국내의 반대세력을 철저하게 통제했다. 그후 수년 동안 폴란드의 경제가 회복되지 않고 1988년 노동자들의 소요사태가 다시 일어나자 야루젤스키는 즉각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연대자유노조 운동세력과의 협상을 받아들였다.
1989년 4월 정부와 연대자유노조 간에 체결된 협상 결과 새로이 합법화된 연대자유노조가 양원제 국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자유선거에 참가하는 것을 허용하는 등 정치체제에 광범위한 개혁이 이루어졌다.
1989년 6월 의회선거에서 연대자유노조가 압승을 거둔 후 공산주의자들과 연립정부를 구성했고, 1990년에는 바웬사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정부의 경제 긴축 프로그램이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촉진시켰으나,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만 했다. 빈부격차의 심화와 연대자유노조 내부의 정치적 분열에 대한 좌절감이 확산되면서 1993년 의회선거에서 사회민주주의로 전향한 과거 공산주의자들에게 승리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1995년 사회민주주의 후보인 알렉산데르 크바스니에프스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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