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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신성 로마 제국 시대에 선제후령 가운데 하나였던 브란덴부르크는 왕조세력의 핵심으로서 프로이센 왕국의 토대가 되었다. 고대부터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게르만족과 다투던 슬라브족이 문화적·정치적·경제적으로 차츰 게르만족에 동화되면서 브란덴부르크는 13세기에 번영을 누렸다. 17세기에 이르러 선제후에서 왕으로 승격된 프리드리히는 교육과 건축에 심혈을 기울여 할레대학교와 예술과 과학을 위한 아카데미를 세우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브란덴부르크는 독일공화국 프로이센 주의 한 지방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로이센이 해체되자 오데르 강 서쪽에 있는 브란덴부르크는 별개의 주를 이루었다.
신성 로마 제국 시대에 선제후령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브란덴부르크는 왕조세력의 핵심으로서 프로이센 왕국의 토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브란덴부르크는 독일공화국 프로이센 주(Land)의 한 지방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로이센이 해체되자 오데르 강 서쪽에 있는 브란덴부르크는 별개의 주를 이루었지만 1952년에 동독의 주가 새로운 지구(Bezirke)로 해체되자 브란덴부르크를 하나의 행정단위로 여기던 예전의 시각은 사라졌다.
고대에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게르만족의 일파인 셈노네스족은 나중에 슬라브족에게 밀려났다.
이 지역에 대한 게르만족의 정복은 독일의 새사냥꾼 왕 하인리히 1세(919~936 재위)가 슬라브족의 일파인 하벨족의 수도 브라니보르(브레나보르 또는 브레나부르크)를 점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후 슬라브족은 다시 게르만족을 몰아냈지만 작센 공작(나중에 신성 로마 황제) 로타르와 알브레히트 1세는 110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 지역을 정복해 게르만족을 이주시키고 그리스도교화하기 시작했다.
로타르는 1134년에 알브레히트 1세를 북변경백으로 임명했다. 이 과정은 다음 세기에도 알브레히트의 상속인인 아스카니에르 가문의 지휘로 계속되었다.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슬라브족은 문화적·정치적·경제적으로 차츰 게르만족에 동화했고, 브란덴부르크는 13세기에 번영을 누렸다. 베를린은 새로 건설된 몇몇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브란덴부르크는 구변경과 엘베 강 서부지역, 중부변경, 엘베 강과 오데르 강 사이, 신변경으로 나뉘었고 오데르 강 동쪽지역도 브란덴부르크에 추가되었다.
12세기 중엽에 이르자 브란덴부르크 통치자는 선제후(신성 로마 황제 선출에 참여한 제후)로 인정되었고 이 권리는 황제 카를 4세가 발표한 금인칙서(1356)로 확인되었다. 아스카니에르 왕가의 혈통이 끊어진 1320년 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령은 내분에 시달렸다.
독일 왕인 룩셈부르크 왕가의 벤첼은 이 지역을 어느 정도 강력하게 다스렸지만(1373~78), 14세기에는 일반적으로 지방 귀족이 상당한 권력을 얻은 반면, 선제후와 옛날의 자유농민 계층은 권력을 빼앗겼다.
1415년에 신성 로마 황제 지기스문트가 호엔촐레른 왕가의 프리드리히를 선제후로 임명하자 좀더 강력한 중앙정부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2세(1440~70 재위)는 반항적인 귀족과 도시들을 억누르고 이웃의 포메른(포메라니아) 사람들과 주기적으로 전쟁을 벌였는데, 그의 동생이자 후계자인 알브레히트 3세 아힐레스(1470~86 재위)는 마침내 포메른 사람들에 대한 종주권을 확립했다.
요아힘 1세(1499~1535 재위)는 브란덴부르크에 로마 법을 도입했다. 그의 아들이자 상속자들인 선제후 요아힘 2세와 요한은 루터주의를 받아들였고 세속화한 주교 관할구의 땅을 접수했다. 요한 지기스문트(1600~20)는 클레베(클레브)와 마르크 및 라벤스부르크와 민덴을 얻었는데 민덴은 독일 서부지역에서 호엔촐레른 왕가 세력의 핵심이 되었다.
그 전에 호엔촐레른 왕가는 슐레지엔에 발판을 얻었다(1537).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폴란드 왕이 호엔촐레른 왕가를 프로이센 공작으로 인정한 것이었다(1569). 그후 17세기에 얻은 땅으로는 세속화한 주교 관할구인 할버슈타트와 마크데부르크 등이 있었다.
게오르크 빌헬름 선제후 시대(1620~40)에 브란덴부르크는 처음에는 30년전쟁(1618~48)에서 중립을 지켰다.
그런데도 스웨덴의 침입을 받아 오랫동안 점령당했다. 게오르크 빌헬름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1640~88)는 스웨덴으로부터 선제후령을 해방하고 질서를 다시 확립했다. 그는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프로테스탄트 군주가 되었으며 그의 시대에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은 건전한 재정과 효율적인 군대 및 관료 제도를 가진 중요한 유럽 국가로 자리를 잡았다.
1688년 5월 9일에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프로이센을 뒤에 거느린 브란덴부르크는 신성 로마 제국의 공국들 가운데 오스트리아에 이어 2번째로 강력한 나라가 되어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독일 프로테스탄트의 우두머리로 간주되었고 땅은 10만㎢가 넘었으며, 수입은 몇 배로 늘어났다. 그의 군대는 아직 소규모였지만 효율적인 훈련 덕분에 능가할 군대가 없을 만큼 막강했고, 당시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아울러 생각해볼 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이 막강한 군대를 바탕으로 일찍이 스웨덴이 차지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뒤를 이은 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1세)는 훨씬 유리한 여건에서 아버지의 정책이 낳은 성과를 수확했다.
그는 오라녜의 빌렘이 1688년에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도록 도와주었고 다른 독일 제후들과 힘을 합쳐 프랑스 및 투르크와 싸웠다. 이무렵 프리드리히의 주요조언자는 에버하르트 당켈만(1643~1722)이었다. 대선제후의 개혁작업을 계속한 그의 공로는 매우 값진 것이었지만 많은 적을 만들었기 때문에 1697년 실각하여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
프리드리히 3세 선제후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후손들을 위해 왕이라는 칭호를 확보함으로써 아버지의 노력에 보답한 것이었다.
1692년 처음 제기된 이 문제는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698년 다시 제기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인 레오폴트 1세와 그의 장관들은 스페인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에 직면하자 브란덴부르크를 회유하고 싶어했다.
마침내 황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내리기로 결정했는데 프로이센이 신성 로마 제국 영토 밖에 있었기 때문에 왕의 칭호는 브란덴부르크가 아니라 프로이센의 차지가 되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프리드리히는 8,000명의 병력을 보내 레오폴트를 돕기로 약속했다.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 왕'이 되는 대관식은 1701년 1월 18일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열렸다. 말년에 프리드리히는 주로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 참여하고 대(大)북방전쟁의 유동적인 상황 속에서 자기 나라의 이익을 지키는 일에 전념했다.
그의 시대에 브란덴부르크가 새로 얻은 영토는 하찮은 것이었고 그나마 별로 많지도 않았지만, 나라가 상대적으로 부유하고 번영했기 때문에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교육에 힘쓰고 건축에 많은 돈을 쓸 수 있었다. 1694년에 할레대학교가 세워졌고 예술과 과학을 위한 아카데미가 세워졌으며 베를린의 도시 환경이 크게 향상되었다.
프리드리히는 1713년 2월 25일에 죽었고 그후 브란덴부르크의 역사는 프로이센역사에 통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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