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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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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생물의 구조·발달 및 기능을 연구하는 생물학의 역사.

모든 과학의 역사에 있어서 비교적 짧은 기간 내에 현저한 발전이 이루어질 때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이와 같은 지식적 도약은 대부분 2가지 요인에서 비롯되는데, 그 하나는 고정된 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가설을 내세우는 창조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적절한 실험으로 가설을 검증하는 기술상의 능력이다(→ 실험과학, 계기화). 이들 2가지 요인들의 상호관계에 관한 한 예로는 세포의 발견을 들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식물과 동물의 기본 구조에 관해 추측해왔었다. 그러나 광학기구가 세포를 관찰할 만큼 충분히 발달되고 나서야 동물의 몸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를 만족스럽게 설명하는 일반적인 가설, 즉 세포학설이 성립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G. 멘델의 완두에 대한 유전 방식에 관한 연구가 지닌 의미도, 기술의 발전으로 염색체가 발견되고 또 염색체가 세포분열과 유전에서 수행하는 역할을 발견하기까지 여러 해 동안 무시되었다.

전자현미경·초원심분리기 등과 같은 정교한 기구들의 발달은 생물학을 세포나 개체 전체에 관심을 둔 기술적 학문에서, 세포 수준 이하의 분자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하면서 생물 체제의 구조와 기능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생물학의 초기 역사

멘델의 유전법칙

ⓒ Madprime/wikipedia | CC BY-SA 3.0

개요

옛 사람들은 독이 없는 식물들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어야 했고 위험한 육식동물의 습성을 알고 있어야 했다.

고고학상의 기록에 따르면, 인류는 문명발달 이전에 유용한 동물들을 가축화했고 농사 방식을 발달시켜왔다. 그러므로 생물학의 오랜 역사는 인류가 약 5,000년 전에 문자를 쓰고 기록을 보존하기 시작한 시대보다 앞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의 생물학적 기록

최초로 기록된 생물학사의 많은 부분은 아시리아인과 바빌로니아인이 재배식물에 관해 만든 얕은 부조와 그들의 가축 의술을 묘사한 조각에 나타나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대추야자가 유성생식한다는 것과 꽃가루를 수 식물에서 얻어 암 식물의 수정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대추야자 수확에 관한 기록은 BC 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소포타미아). 또한 그들이 남긴 파피루스의 기록 중에는 BC 1600년경의 의학과 관련되는 해부학적인 설명과 BC 1500년경에 기록된 심장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은 옛 기록에는 사실과 미신적인 것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한편 무덤과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와 고기품(古器品)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인들도 상당한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잘 보존된 미라는 그들이 부패를 방지하는 식물을 보존제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또한 출토된 다양한 식물성 목걸이와 얕은 부조들은 이집트인들이 이미 BC 2000년에 식물들을 약초로 이용하고 약용 가치를 잘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중국에서는 BC 2880년경에 신농(神農)이 여러 약초들의 효능과 콩과 같은 중요 식용식물들에 관해 기술했다.

고대 중국인들은 명주를 생산하기 위하여 누에를 길렀고, 나무에 구멍을 뚫는 곤충을 죽이기 위해 곤충을 먹는 개미를 이용하는 생물학적 방제의 원리도 알고 있었다. BC 2500년경의 인도 서북지방 사람들은 농학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며, BC 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문서에는 약 960가지 약초의 이용이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는 해부학·생리학·병리학·산과학(産科學) 등에 관한 정보도 함께 들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지방의 고대인들은 생물학상의 정보를 많이 축적했지만 예측할 수 없는 귀신들과 영혼들이 지배한다고 믿었던 세계에 살았기 때문에, 지식인들도 자연적인 것보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해하려는 연구를 지향했다.

그리스·로마 시대

그리스 문명의 출현으로 그리스에서는 신비적인 태도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BC 600년경에는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하나의 특정한 원인은 특정한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학파가 생겨났다. 이와 같은 인과율(因果律) 개념은 훗날 과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더 나아가서 이 철학자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이 있고 사람들은 관찰력과 추리력으로 이러한 자연법칙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인은 생물학을 확립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과학에서 이룩한 가장 큰 공헌은 합리적 사고방식이었다.

① 생명의 기원과 인간에 대한 이론:그당시 그리스에는 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알크마이온·히포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테오프라스토스 등 많은 자연철학자들이 나타났다. 탈레스는 우주에 피시스(physis)라는 창조력이 있으며, 세계와 그 속에 있는 모든 생물은 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생물은 물, 흙, 아페이론(apeiron)이라는 체온에 관여하는 기체성 물질로 되어 있다고 믿었으며, 이런 물질들이 다양하게 혼합되어 흙·기(氣)·불·물의 4원소가 생겼다고 믿었다. 그는 생명체가 진흙 속에서 자연발생하고, 처음 생겨난 동물은 물고기였으며, 이 물고기들의 후손들이 물을 떠나 건조한 육지로 이동한 뒤 변형되어 다른 동물들이 되었다고 주장하여 초기의 진화설을 완성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제자인 알크마이온은 동물의 구조를 연구하여 동맥과 정맥의 차이를 기술하고, 시신경을 발견했으며, 뇌를 지능의 장소로 인식했고, 배(胚)의 발생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의 시조로서 한 학파를 이룩했다. 그는 환자를 관찰하여 인체 내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인식했다. 이 학파 사람들은 모든 생물체는 4가지의 체액 즉 혈액·흑담(黑膽)·점액(粘液)·황담(黃膽)으로 만들어진다고 믿었는데, 혈액은 심장에서, 흑담은 비장에서, 점액은 뇌에서, 황담은 간에서 각각 유래한다고 생각했고, 이 체액들이 조화를 잃으면 사람들에게 다혈질·우울·냉담 또는 화를 잘 내는 증세가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②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고대 그리스의 과학은 BC 4세기 중반에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전성기에 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을 포함하는 모든 분야의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물의 형태·분류·생식·발생·운동 등 생물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동물연구 Historia animalium〉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남겼다.

그는 실증적 관찰의 시범을 보였고, 생물에 관한 지식을 체계화했으며, 여러 생물학적 원리를 공식화했다. 예컨대 그는 모든 생물은 습성과 서식지에 적응되어 있고, 구조상의 상동성과 기능상의 상사성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동물의 분류에 있어서도 외부구조상의 차이가 아닌 보다 기본적인 분류기준을 설정하고자 했으며, 생물계가 하나의 조직체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발생의 과정도 문화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식물학적 연구: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의 생활 조건과 일반 형태를 고려한 최초의 과학적 연구를 했고, 〈식물 연구 Historia plantarum〉·〈식물 역사 De historia causis plantarum〉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이 저서들에서 식물의 형태, 박물학, 약물 작용, 식물의 성장 및 식물과 토양 또는 기후와의 관계를 기록했으며, 500여 가지의 식물을 기재했다.

④ 그리스 시대 이후의 생물학 연구: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 이후 학문의 새로운 중심지 중 가장 유명했던 곳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과 박물관이었다. BC 3세기 이후 300년 동안의 중요한 생물학적 발전은 알렉산드리아의 의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학자는 헤로필로스였다.

그는 인체를 해부하여 다른 큰 포유동물들의 구조와 비교했으며, 뇌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고 뇌는 신경계의 중심이며 지능의 장소라고 인식했다(→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해부학).

로마인들은 큰 자연과학적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자연의 연구 Historia naturalis〉(37권)를 편찬한 플리니와 의학자이자 최초의 실험생물학자라고 할 수 있었던 갈레노스를 배출했다.

아랍과 중세 유럽

갈레노스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생물학의 연구는 더이상 진전이 없었다.

중세(476~1453) 유럽에서의 자연과학은 경제적인 정체와 신학적 논리 및 종교적 억압으로 인해 거의 1,000년 동안 암흑시대였고, 생물학에서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중세, 이슬람교).

① 생물학에 대한 아랍의 우위:9세기에 스페인까지 진출한 아랍인들은 과학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3~11세기의 생물학은 본질적으로 아랍인들의 과학이었다.

그들은 위대한 혁신자는 아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 등의 저작물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연구했으며 그 내용에 관해 주석을 달았다. 868년경에 사망한 알자히즈의 저서 중 하나인 〈동물에 관한 책 Kitāb alhavawān〉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면도 있지만 주로 아랍적인 작품이었다.

식물학과 동물학의 발달:중국의 제지술은 8세기부터, 인쇄술은 13세기부터 아랍과 유럽에 전파되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고안된 아라비아 숫자가 아랍을 통해 유럽에 전해져 유럽의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십자군 원정(1096~1291)을 통해 아랍의 철학과 과학이 유럽에 소개되었다. 13세기 중반에는 영국의 M.스콧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고, 중세의 위대한 박물학자인 독일의 A.마그누스는 〈식물에 관하여 De vegetabilibus〉(7권), 〈동물에 관하여 De animalibus〉(26권)를 라틴어로 저술했다.

마그누스의 저작은 그리스 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바탕을 두었지만 그 자신이 새로 관찰한 사실들도 포함했다. 그결과 식물학과 동물학이 발달했으며, 해부학은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

14세기에 이르러 유럽의 중세 봉건제도가 동요되면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과 더불어 모든 문화의 융합으로 학문의 재탄생을 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를 계기로 중세기의 아랍에 의해 중계된 자연과학은 유럽에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생물학 분야에서는 우선 해부학에서 새로운 발전이 이룩되었고, 식물이나 동물의 관찰과 기재를 통해 분류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해부학에서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갈레노스의 방법을 타파하고 가축과 인체를 해부하여 비교한 결과, 사람과 말 사이의 뼈와 관절의 배열에 상동성이 있음을 처음으로 지적했다.

벨기에 태생의 이탈리아 파도바대학교 교수였던 베살리우스는 혁신적인 해부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식물학 연구의 근원은 약용식물에 대한 연구였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식물학자인 O. 브룬펠스는 독일의 식물을 기재하여 식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브룬펠스). 16세기를 통하여 네덜란드·스위스·이탈리아·프랑스 등의 나라에서도 식물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고, 이 기간에 식물에 대한 분류체계가 크게 향상되었다.

스위스의 식물학자 G. 보앵은 식물을 속명과 종명으로 명명함으로써 이명법의 선구자가 되었다. 동물학에서 영국의 E.워튼, 프랑스의 P.블롱, 스위스의 C.게스너, 이탈리아의 U.알드로반디 등이 나왔으나 식물학의 발전을 따르지는 못했다.

16세기에 중국에서는 본초학자 이시진(李時珍)이 〈본초강목 本草綱目〉(1552~78)을 편찬했는데, 이 책은 식물 약 1,100가지, 동물 약 410가지가 기재된 훌륭한 박물서였다.

20세기를 향한 생물학의 진전

개요

17세기에 생물학 분야에서는 학문의 교류를 위한 과학학회가 창립되고, 현미경의 발달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세계를 관찰할 수 있게 됨에 따라 생물학에 커다란 발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17~18세기에 걸쳐 체계화와 분류가 생물학을 지배했으며, 사람을 포함한 생물의 비교 연구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18세기에 생물이 무생물에서 생겨난다는 오랜 자연발생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연발생설은 19세기 중엽에 L. 파스퇴르에 의해 반증되었다. 대양을 건넌 생물탐사는 식물과 동물의 종류에 관한 지식을 더욱 늘리고 19세기 진화설의 토대가 되었다.

19세기는 생물학이 크게 발전한 시대로 진화설의 구체화와 세포설이 수립되고, 현대 발생학을 위한 기반이 구축되었으며, 유전의 법칙들이 발견되었다.

혈액순환의 발견

영국의 W. 하비(1578~1657)는 실험을 통하여 혈액순환을 연구한 결과를 〈동물의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한 해부학적 연구 Exercitatio anatiomica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 에 정리했다.

그는 동맥과 정맥을 연결하는 모세혈관을 예견했으며, 후에 M.말피기가 이것을 발견했다.

과학학회의 창립

학회는 학자들의 모임으로서 연구 결과의 발표 및 정보 교환을 통해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가장 먼저 창립된 학회는 1603년경 로마에서 창립된 이탈리아 스라소니 아카데미(Italian Academy of the Lynx)였다. 이후 기존의 작은 학회들을 1662년에 통합한 영국 런던의 왕립학회, 1666년 창립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를 비롯해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과학학회가 설립되었다. 학회의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는 출판물을 내는 일인데, 그 첫번째 것은 프랑스에서 1665년에 출판된 〈학술잡지 Journal des Savants〉였으며, 3개월 후에 런던의 왕립학회는 〈철학회보 Philosophical Transactions〉를 창간했다.

현미경의 발달

확대경은 기원전에 아시리아인들도 사용했지만, 복합현미경이 발명된 것은 1590년경이다.

그후 기술의 발달에 따라 복합현미경이 개량되어왔으며 관찰기술도 발달했다. 그결과 생물의 미세구조를 밝히고 매우 작은 생물들을 관찰할 수 있는 길이 열렸으며, 말피기·레벤후크·스왐메르담·그루·훅 등의 현미경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말피기는 생물의 미세구조 연구를 창시했고, 레벤후크는 세균·원생동물의 발견과 동물의 정자를 처음으로 관찰했으며, 스왐메르담은 동식물의 미세해부를 시도했다.

또한 그루는 식물해부학의 창시자였고, 훅은 1665년에 식물의 세포를 발견하고 명명했다.

분류학 원리의 발달

17~18세기의 가장 저명한 분류학자는 J.레이와 C. 린네였다.

레이는 박물학자로서 처음에는 주로 식물을 연구했으며, 〈일반식물지 Historia generalis platarum〉(1686~1704)에서는 1만 8,600가지의 식물을 기재했다. 또한 처음으로 쌍떡잎식물과 외떡잎식물을 구분했으며, 그후 동물을 해부학적인 유사성으로 분류했다. 그는 여러 세대 동안 특성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종(種)이라 하여 처음으로 종의 개념을 명확하게 했다. 반면에 린네는 식물과 동물의 체계적인 분류에 필요한 분류학적 범주로서 강(綱)·목(目)·속(屬)·종·변종(變種)의 5계급을 설정하고, 각 종의 학명을 이명법으로 명명하는 방식을 확립했다.

실제로 식물 약 1만 8,000종과 동물 4,162종을 명명했고, 그 분류계급에 맞추어 분류했으며, 동식물의 분류를 체계화하는 데 일대 전기를 마련했다.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연구

구더기가 썩은 고기에서, 물고기가 진흙 속에서 생겨난다는 식으로 생물이 무생물에서 생겨날 수 있다는 생각이 자연발생설이다.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도 이 설을 믿었고 17세기 중엽까지 사람들은 이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자연발생설에 대한 학자들의 시비가 계속되었다. 하비는 "모든 생물은 알에서 생긴다"고 하면서도 자연발생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1860년에 이르러서야 프랑스의 미생물학자 파스퇴르가 실험을 통해 종래의 자연발생설을 완전히 부정했다.

그후 새로운 각도에서 최초의 간단한 생명체가 어떻게 지구상에서 발생했는지를 논할 수 있게 되었다.

생물학상의 탐험

16~17세기에 많은 유럽 여행자들이 아시아·아메리카·아프리카 등지의 식물과 동물에 관한 정보를 제공했지만, 과학적 탐험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8, 19세기였다.

이러한 노력들 중에서 잘 알려진 것은 영국 정부가 후원한 엔데버호(1768)·인베스티게이터호(1801)·비글호(1831~36)·챌린저호(1872~76) 등의 항해인데, 비글호 항해에는 C. 다윈이 참여하여 여행중 많은 연구 재료를 수집했고, 시간과 공간의 격리에 의하여(자연선택) 새로운 종이 형성된다는 생각을 착상했다.

세포설의 발전

1665년 훅의 세포 발견 이후 세포에 관한 연구가 계속되었다.

1830~40년 독일의 H. 을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세포분열을 연구했고, 1838, 1839년에는 독일의 M. 슐라이덴과 T. 슈반이 식물이나 동물의 구조 및 기능상의 단위는 세포라는 세포설을 제창했다. 그후 원형질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고, 감수분열 현상도 밝혀져 생물현상을 세포 수준에서 연구하려는 방향이 설정되었다.

생물의 진화설

린네는 종의 불변성을 믿었지만, 16세기 이후 식물과 동물의 종류에 관한 지식이 많이 축적됨에 따라 생물의 종들에 대한 조상 문제를 숙고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C. 다윈(1809~82)의 할아버지 E. 다윈(1731~1802)은 그중 한 사람이다. 프랑스의 J.라마르크는 진화문제를 적극적으로 다룬 첫번째 인물이었다. 라마르크는 저서 〈동물철학 Zoological Philosophy〉(1809)에서 진화론을 전개했으며 계통수(系統樹)의 개념을 정립했다.

C. 다윈은 1836년 비글호 항해를 마친 후 장기간의 연구 끝에 1859년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 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를 출판했다. 그는 연구 과정에서 영국의 경제학자 T. R. 맬서스와 영국의 지질학자 C. 라이엘의 영향을 받았다.

과잉번식된 자손 중에 적자가 생존하는데, 지질학적인 시간이 경과되면 이같은 자연선택을 통하여 새로운 종이 형성되어 나온다는 다윈의 진화사상은 A. L. 월리스에 의해서도 동시에 발표되어 생물학 발전의 지도이념이 되었으며, 철학·사회과학 분야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종분화). 한 예로 생물학 분야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분류학상의 계통탐구를 들 수 있다.

생물의 생식과 발생에 관한 연구

"배는 형체가 미리 형성되어 있어서 발생중에는 단지 커질 뿐인가? 아니면 형체가 없는 상태로부터 분화하는 것인가?" 이것은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던진 의문이다.

전자와 같은 생각의 학설이 전성설(前成說)이고 후자와 같은 것이 후성설(後成說)이다. 18세기까지는 전성설이 지배적이었으나 19세기에 들어와서 전성설에 대한 반증들이 많아졌다. 에스토니아의 K. E. 베어는 배엽설(胚葉說)을 확립해 전성설에 종지부를 찍었다.

1823~30년에 꽃피는 식물에서 유성생식 과정이 밝혀졌고, 1879년에는 동물의 수정과정이 관찰되었다. 1880~90년에 벨기에의 E.베네당과 기타 여러 학자에 의해 생식세포 형성시의 감수분열 현상이 밝혀졌다.

유전의 연구

유전의 기본법칙은 1865년 오스트리아의 멘델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1900년에 그 법칙이 재발견될 때까지 무시되었다.

그렇지만 멘델 이전이나 이후에 유전에 관한 논의는 계속 있었다(멘델 법칙). 예를 들면 그리스의 철학자들 중에 개체의 특징은 환경과 접촉함으로써 얻을 수 있고 이런 획득형질은 유전된다고 믿는 사람이 있었다. 라마르크는 그의 진화설에서 획득형질의 유전을 지지했다. 1885년 독일의 A.바이스만은 유전형질이 생식질에 의해 유전된다고 생각했다.

영국의 F.골튼은 형질의 유전적 본질을 연구하여 우생학(優生學)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19세기말에는 염색체와 유전과의 관계가 밝혀지기 시작했는데, 독일의 T.H.보베리는 그러한 공헌자 중 한 사람이었다.

생리학의 발전

17세기에 하비가 혈액순환의 원리를 발견하면서 실험생물학을 탄생시킨 후 18~19세기에 식물생리학과 동물생리학이 꾸준하게 발달했다.

19세기 중엽까지는 생물현상에 관한 종래의 생기론적 견해를 없애고 물리화학적 방법을 생물학연구에 적용하여 생리학이 크게 발달했다. 특히 프랑스의 C. 베르나르는 간의 글리코겐 형성 기능을 비롯해 동물생리학에 관한 많은 연구를 했으며, 기계론적 입장에서 실험생물학의 방법론을 수립한 공이 크다.

20세기의 생물학

개요

19세기를 세포생물학 시대였다고 본다면 20세기는 분자생물학이 발전해온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개념의 발전

X선 회절과 전자현미경 등의 현대적 방법을 이용함으로써 세포의 초미세구조를 탐구하여 세포 기능에 관한 새로운 개념들이 생겨났다.

세포 분자구조에 관한 연구는 20세기의 생물학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으며, 생명현상의 깊은 이해를 위하여 여러 가지 과학분야가 함께 이런 연구에 집중되고 있다. 20세기의 또다른 발전은 사람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지구의 천연 자원에 의존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산업의 발전과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 등으로 말미암은 물리적인 환경 파괴와 각종 화학물질로 인한 오염이 가속화되어 생태계의 안정을 위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생물학자들은 생물과 환경과의 관계, 즉 생태학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인구폭발, 공해).

생물학의 연구분야

생물학에는 여러 중요한 분과가 있다.

연구 대상 분류군에 따르면 식물학·동물학·미생물학의 세 분과로 크게 나눌 수 있고, 더 세분하면 조류(藻類)를 연구하는 조류학, 어류를 연구하는 어류학, 세균을 연구하는 세균학, 바이러스를 다루는 바이러스학 등이 있을 수 있다. 미생물학은 19세기 후반에 프랑스의 파스퇴르에 의해 기초가 세워졌으며, 20세기에 들어와서 눈부신 발전을 해왔다. 또한 생물의 성질들을 대상으로 하여, 생리적 기능을 연구하는 생리학, 발생현상을 다루는 발생학 등 여러 가지 분야도 함께 발전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에 생리학과 발생학이 많이 발달했는데, 이것은 세포생물학·생물물리학·생화학의 연구성과에 기인한다.

이것은 세포생리학·세포화학·초미세구조의 연구를 불러일으켜 구조와 기능을 연관시키고자 했다. 또한 생물의 체제에 분자·세포·조직·기관·개체·집단 등의 수준이 있다는 관점에서 생물학을 분자생물학·세포생물학·개체생물학·집단생물학 등으로 구분하는데, 집단생물학은 동식물들의 집단과 그 환경과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연구대상으로 한다.

생물학과 다른 과학 분야와의 관계

17세기에 현미경의 발명이 생물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게 된 것은 생물학이 물리학 발전의 혜택을 받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18세기에는 생물학의 연구에 중요한 산소·이산화탄소·물의 성질에 관한 화학이 발달했다. 오늘날에는 생화학생물물리학의 형태를 통하여 화학과 물리학이 생물학, 특히 분자생물학 분야에 계속해서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다. 생물학이 의학 및 농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지질학도 고생물학의 생물학적 연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새로운 분야인 우주생물학은 우주 탐험에 관련된 과학자들과 기술자들의 연구활동을 통하여 생겨났다.

사회 및 과학적 가치의 변화

새로운 발견과 개념의 발달에 따른 도덕 및 윤리적 책임과 더불어 사회에서 생물학자들의 역할은 결국 그들의 사회 및 과학적 가치 체계에 관한 재평가를 불러일으켰다.

과학자는 그의 발견으로 인해 생겨나는 결과를 더이상 방치할 수 없다. 즉 자신이 포함되어 있는 기초연구에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발견한 것에 있을 수 있는 오용과도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은 생물학자와 기타 모든 과학자들의 사회적·정치적 역할은 실험실의 저울과 같이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그 가치는 평가되어야만 한다.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생물학자는 사회의 점진적 발전을 위하여, 특히 윤리상의 문제와 인간 환경의 인위적 조절이나 유전자의 인위적 조작 등에 관한 판단 영역에서 자기의 사회적 의무와 기능을 재정의할 필요가 있다.

미래 문제에 대한 대처

우리는 장차 대응해야 할 많은 생물학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특히 유전공학의 발전으로 나타날 수 있는 위험, 산업발전이 가속됨에 따라 물리적으로 자연환경이 심하게 파괴되고 폐기물로 환경이 심하게 오염되는 문제, 인구의 증가와 한정된 지구자원의 문제들은 매우 심각하다. 이와 같은 많은 문제들의 해결책은 머지 않아 발견되겠지만, 건강하고 생산적인 지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설정하기 위해서 생물학자들은 사회과학자들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함께 일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생물학사

한민족의 현재 영토인 한반도와 과거 영토였던 만주지방에서는 지방에 따라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BC 70000년 이전에 구석기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후 중석기문화(BC 10000년 이전에 시작)·신석기문화(BC 6000년 이전에 시작)·청동기문화(BC 2000년 이전에 시작)·철기문화(BC 700년 이전에 시작)를 거쳐오는 동안, 조상들도 의식주 해결 및 치료 등을 위한 여러 가지 활동 과정에서 주변의 식물과 동물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고 응용해왔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19세기까지 생물학이 독립된 학문 분야로서 연구되고 전승되어온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고고학상의 자료, 농업·의학·어업·식품에 관한 고문헌, 사서(史書) 등에 산재하는 생물학 관련 기록들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생물학사적인 고찰을 해야 하지만 중세(고려시대) 이전의 남아 있는 관련 고문헌은 거의 없다.

예로부터 한국의 문화는 대륙(주로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아 발전했는데, 농업과 의학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생물학(주로 분류학) 분야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은 고조선시대에 유입된 본초학(의학의 일부)이었다. 중세 말기부터 근세(1392~1863)에 들어와서 자주적으로 향약(鄕藥)을 연구, 이용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1236경), 조선시대의 〈향약채취월령 鄕藥採取月令〉(1431)·〈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1433)·〈동의보감 東醫寶鑑〉(1613) 등이 발간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한국에서 자라는 식물이나 동물이 연구되었다. 해부학은 동양의학이 실질적으로 해부를 수반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발전이 거의 없었고, 생리작용의 설명은 일관되게 음양오행설에 의존해왔다. 한편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1470~94)에 실린 팔도 각 고을의 토산품은 그시대 생물의 지리적 분포를 이해하는 데 유익하다.

18세기에 실학이 진흥되면서 많은 박물서와 경제서가 발간되었는데, 생물학(주로 분류학)과도 관계가 있다.

대표적인 것들로 이수광의 〈지봉유설 芝峰類說〉(1633), 홍만선의 〈산림경제 山林經濟〉(1715경), 정약전의 〈자산어보 玆産魚譜〉(1814), 김려의 〈우해이어보 牛海異魚譜〉(1803 탈고, 1882 출간),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1834~45)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자산어보〉는 저자가 흑산도에서 다년간 해양생물을 직접 관찰하면서 분류·기재한 최초의 해양동식물조사 보고서이다.

산림경제(山林經濟)

ⓒ Hong Mannseok/wikipedia | Public Domain

19세기 중엽 유럽인들이 한국의 식물이나 동물을 대상으로 연구 발표한 예들이 있었으나, 유럽식 생물학은 조선 말기인 1896~1910년에 각급 학교의 교육을 통해서 도입되었다.

한편 학교 교육과는 별도로 1880년대에는 일본을 통하여, 1900~05년에는 중국을 통하여 진화사상이 한국에 도입되었다. 1896~1910년에는 유럽인들이 한국의 식물과 동물을 연구하는 주역을 담당했고, 일본인들도 이런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한국의 산림자원과 수산자원의 조사도 시작했다. 1910~45년에 일본인들은 한국에서 생물학 및 그 관련 분야의 교육과 연구의 주역을 담당했지만, 고등교육 기관에는 생물학 관련 전공학과가 없었고, 단지 농학·임학·수산학·의학 관련 전문학교나 경성제국대학 예과의 교과과정에 약간의 생물학 관계 교과목이 있을 뿐이었다.

사실상 한국인 생물학자들의 대부분은 수원고등농림학교(1922 창립) 출신이었다. 이의경(또는 이미륵)은 플라나리아의 재생에 대한 연구로 독일 뮌헨대학교에서 1928년 이학박사학위를 받았지만, 그외에 1910~45년에 생물학과·식물학과·동물학과를 졸업한 사람은 일본에서 유학한 6명뿐이었다.

1923년경 일본인들이 주동하여 조선박물학회(朝鮮博物學會)를 창립하고 〈조선박물학회잡지〉(1924~44)를 제40호까지 발간했다.

여기에는 분류학 관계 논문이 비교적 많이 실렸다. 조선총독부는 산림·수산 자원을 계속 조사하여 1945년까지 한국의 식물상과, 척추동물 및 일부 무척추동물(연체동물, 갑각류·십각류, 곤충 등)의 동물상이 어느 정도 밝혀졌다. 한편 조선의학회(朝鮮醫學會:1910 창립)가 발행한 〈조선의학회잡지〉와 기타 의학 분야 학술잡지 등에는 임상 논문 이외에도 생리학·형태학·기생충학에 관한 것들도 실려 생물학 발전에 기여했다.

이런 사이에도 정태현·도봉섭·이덕봉·이휘재와 같은 한국인 식물학자들은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 朝鮮植物鄕名集〉을 발간했고, 동물분류학에서 조복성(곤충)·원홍구(조류)·석주명(나비류)·백갑용(거미류), 동물세포학에서 강영선의 논문이 나왔다.

1945년 8·15해방 이후 남북으로 분단된 한국은 생물학 분야에서도 각자의 길을 걸어왔으므로 여기서는 남한에서의 발전만을 다루도록 한다. 1945년 12월 조선생물학회가 창립되고 1946년 9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최초로 생물학과가 신설되었으나 1960년경까지는 8·15해방 후의 사회혼란, 6·25전쟁과 그 후유증, 산업의 후진성, 과학 및 기술의 낙후성, 학자의 부족 등으로 생물학은 제대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신설 생물학과의 증가, 유학생의 증가, 생물학 관련학회의 창설과 학회지의 창간 등으로 점차 생물학 발전의 기틀이 잡혀 조선생물학회는 1951년 대한생물학회로 개칭되었고, 1956년 〈생물학회보〉를 창간했다. 이 학회는 1957년 한국식물학회와 한국동물학회로 분리되어 한국생물과학협회를 구성했다. 1959년에 한국미생물학회가 창립되어 이 협회 산하에 들어갔다.

문교부가 1959년부터 〈한국동식물도감〉을 발행하도록 함에 따라 분류학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국가가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자 1967년 과학기술진흥법의 제정과 과학기술처를 발족시켰으며, 과학교육진흥법도 제정했다. 1976년에는 한국과학재단법이 마침내 제정되었다. 처음에는 이런 시책들이 기술적 측면에 너무 치중되어 왔으나, 점차 기초과학을 중요시 여기게 되어 1977년 서울대학교에는 자연과학종합연구소가 설치되었고, 다른 여러 대학교에도 기초과학연구소가 설치되었다.

1983년에는 유전공학육성법이, 1989년에는 기초과학연구진흥법이 제정되었다. 그결과 기초과학의 발전을 위한 교육·연구·시설에 대한 투자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으며, 생물학 분야도 나름대로 발전의 길을 걸어왔다. 1960년대까지는 선진국에서 이미 많이 발전된 주요분야들(분류학·형태학·생리학·발생학·유전학·세포생물학·생태학·미생물학·분자생물학 등)이 거의 모두 부진 상태였으나,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발전이 점점 가속화되었다.

발전하는 양상은 생물학 관련 학과의 증설과 관련 학회의 창립에서 엿볼 수 있다. 1992년 2월 현재 관련학과의 수는 생물학과 66, 미생물학과 20, 분자생물학과 6을 포함해 모두 92개 학과이며, 1학년 모집정원은 4,045명이다. 이밖에도 생물학의 응용학과로서 농생물학과·유전공학과 등의 72개 학과가 11개 대학교에 있으며 1학년 모집정원은 2,664명이다.

학회는 위에서 서술한 3개 학회 이외에 한국해양학회(1966 창립)·한국육수학회(1967 창립)·한국식물분류학회(1967 창립)·한국전자현미경학회(1967 창립)·한국곤충학회(1970 창립)·한국균학회(1972 창립)·한국생태학회(1976 창립)·한국유전학회(1978 창립)·한국동물분류학회(1984 창립)·한국분자생물학회(1989 창립) 등이 창립되어 각각 학술지를 발간하고 있다. 이 학술지들의 질은 연구 인력의 증가, 연구 분야의 다양화, 그리고 연구 여건의 향상으로 점점 향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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