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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22. 2.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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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11. 1. 17, 서레이 헤이절메어 그레이샷 하우스 |
국적 | 영국 |
요약 프랜시스 골턴은 지능분야의 선구적인 연구로 유명하며, 우생학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캠브리지 대학에서 의학과 수학을 공부했으나 여행에 대한 열망이 높았다. 아프리카 남서부 미탐험 지역을 탐험한 후 9권의 책과 200여 편의 논문을 썼으며 신원확인을 위한 지문이용법, 미개발 국가를 여행하는 법, 기상학을 비롯해서 수많은 주제를 다루며 연구했다. 골턴은 특히 우생학에 가장 큰 관심을 두어 우수한 자질을 갖춘 남녀들이 짝을 지어 자식을 낳도록 해서 인간의 신체 및 정신 구조를 개량한다는 생각을 널리 전하는 일에 생애 후반부 대부분을 바쳤다. 우생학은 평균 이상의 유전자질을 지닌 인간의 비율을 높이려는 과학적인 노력을 의미했으나, 히틀러 나치정권에 의해 대량 학살에 악용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후에는 혐오스러운 단어가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유전공학의 발달과 함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개요
프랜시스 골턴은 지능분야의 선구적인 연구로 유명하며, 1909년 기사작위를 받았다.
젊은시절
프랜시스 골턴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그 자신도 기꺼이 인정했듯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많은 은혜를 입고 자랐다.
그러나 학교와 교회에서 받은 틀에 박힌 고전 및 종교 교육은 프랜시스 골턴에게 거의 쓸모가 없었다. 훗날 골턴은 실제로 찰스 다윈에게 편지를 보내 전통적인 성서논쟁 때문에 "비참한 기분이 되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프랜시스 골턴의 부모는 그가 의학을 공부하기 바랬다. 그래서 10대에 유럽에 있는 의료기관들을 돌아보게 하고(그 나이 또래 학생으로서는 드문 경험이었음)버밍엄과 런던에서 의사훈련을 받게 하는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러나 골턴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그때 "마치 철새처럼 여행을 하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화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 기센대학에 가려던 것을 그만두고 유럽 동남부지역 여행에 나서 빈에서부터 콘스탄자·콘스탄티노플·스미르나·아테네 같은 곳을 돌아다녔다.
그뒤 지금의 유고슬라비아에 있는 아델스베르그의 동굴에서 발견한 종류를 알 수 없는 프로테우스속의 양서류 표본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 왔다. 이 표본을 영국에 가져 온 것은 프랜시스 골턴이 처음이었다. 귀국한 뒤 케임브리지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들어 갔으나, 지나치게 공부에 열중한 나머지 3학년 때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
생활방식을 바꾸면서 곧 건강을 되찾았으며, 그후 여러 번 쓰러졌을 때에도 이런 방식으로 곧 회복될 수 있었다.
여행과 탐험
학위를 받지 못하고 케임브리지대학교를 그만둔 뒤, 런던에서 의학공부를 계속했다.
공부를 마치기도 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지만, 직업을 갖지 않고도 살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재산을 남겨주었기 때문에, 그후 여행을 하고 싶은 열망을 한껏 충족시키며 살 수 있었다. 1845~46년 친구들과 함께 나일 강을 한가로이 여행하고, 혼자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성지순례를 했으며,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남서부 미탐험 지역을 체계적으로 돌아보는 본격적인 탐험에 나서게 되었다.
왕립지리학회와 협의한 뒤, 프랜시스 골턴은 남서부 지역에서 응가미 호(湖)까지 조사하기로 결정했다.
응가미 호는 왈비스 만 동쪽으로 약 880㎞ 떨어져 있는 칼라하리 사막 북쪽에 있었다. 이 탐험여행은 같은 기지에서 떠나 한 조(組)는 북쪽으로, 또 한 조는 동쪽으로 가게 되어 있었는데, 어려움도 많았으며 위험도 만만치 않았다. 탐험대는 응가미 호에 닿지는 못했지만 값진 정보를 얻어냈으며, 그결과 프랜시스 골턴은 1853년 겨우 33세에 왕립지리학회 회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3년 후에는 왕립협회 회원이 되었고 결혼도 했으나, 결혼생활에서 자녀를 얻지는 못했다.
9권의 책과 200여 편의 논문을 썼으며 신원확인을 위한 지문이용법, 상관미적분학(응용통계학의 한 부분)―프랜시스 골턴은 이 두 분야를 새로이 개척했다―쌍둥이, 수혈, 범죄성, 미개발 국가를 여행하는 법, 기상학을 비롯해서 수많은 주제를 다루며 연구했다. 대부분의 저서를 보면 골턴이 수치로 나타내는 방법을 특히 좋아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기도(祈禱)의 효과를 통계로 다룬 초기 논문이 있을 정도였다. 34년 동안 도량형을 개량하는 일에 힘쓰기도 했다.
우생학 주창
프랜시스 골턴은 여러 지식 분야에 이바지했으나 우생학에 가장 큰 관심을 두었으며, 우수한 자질을 갖춘 남녀들이 짝을 지어 자식을 낳도록 해서 인간의 신체 및 정신 구조를 개량한다는 생각을 널리 전하는 일에 생애 후반부 대부분을 바쳤다.
찰스 다윈의 사촌이었던 프랜시스 골턴은 다윈의 진화론이 인간과도 깊은 연관이 있음을 처음으로 인정한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서 진화론이 그 시대 이론의 대부분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고, 인간을 계획적으로 개량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우생학이라는 말을 만든 것도 프랜시스 골턴이었는데 이 말은 배우자를 가려내어 짝을 짓는 방법으로 평균 이상의 유전자질을 지닌 인간의 비율을 높이려는 과학적인 노력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프랜시스 골턴은 〈유전하는 천재 Hereditary Genius〉(1869)라는 책에서 천재성을 '극히 뛰어날 뿐 아니라 태어나면서부터 타고 나는 능력'으로 표현하면서 정신적인 특질과 신체적인 특질은 물려받는 것이라는 주장을 폈으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은 다윈이 프랜시스 골턴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낸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나는 당신 의견에 찬성하지 않지만 1가지 점에 대해서 만큼은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언제나 바보가 아니라면 인간의 지능에는 큰 차이가 없으며, 열의와 부지런함에만 차이가 있다고 주장해 왔으니까요." 골턴이 쓴 책의 영향으로 다윈은 인간에까지 진화론의 의미를 넓히게 된 것이 틀림없다.
다윈은 〈종의 기원 Origin of Species〉(1859)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인류의 유래 Descent of Man〉(1871)라는 저서에서는 프랜시스 골턴의 말을 여러 차례 인용하고 있다.
신체적인 특질과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특질도 물려받는다는 믿음이 너무 강했던 나머지, 프랜시스 골턴은 나름대로 종교철학의 체계를 세울 정도가 되었다. 골턴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이해하고 적용하는 법을 배우는 즉시 아주 유익한 방향으로 쓸 수 있는 위대한 힘이 존재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유전학)
프랜시스 골턴의 저서 〈인간능력에 대한 연구 Inquiries into Human Faculty〉(1883)에는 2~30쪽에 이르는 글이 40여 편 실려 있는데, 대부분 1869~83년에 쓴 과학논문에 바탕을 두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능력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추려 모은 것으로 볼 수 있는 이 책에서 프랜시스 골턴은 상당히 독창적이고 흥미로운 주제들을 명료하고 간결하며, 독특한 방식으로 소박하게 설명하고 있다. 골턴의 유언에 따라 런던대학교에 우생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명성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프랜시스 골턴의 이름이 주로 우생학에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다.
인간 사이의 '타고난' 차이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문화적인(사회·교육적인) 요소들이 선천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요소들보다 사람들의 차별성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생학을 믿을 수 없는 이론으로 취급해 왔다. 따라서 우생학을 계급적인 편견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겨 프랜시스 골턴을 반동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골턴의 사상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골턴은 귀족적인 엘리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남녀로만 이루어진 집단을 만드는 데 목적을 두었기 때문이다.
다윈과 마찬가지로 프랜시스 골턴의 사상도 충분한 근거가 있는 유전이론을 갖추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멘델의 연구성과에 대한 재발견이 너무 늦게 이루어져 골턴의 작업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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