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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의 초기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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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델의 유전법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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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옛 사람들은 독이 없는 식물들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어야 했고 위험한 육식동물의 습성을 알고 있어야 했다.

고고학상의 기록에 따르면, 인류는 문명발달 이전에 유용한 동물들을 가축화했고 농사 방식을 발달시켜왔다. 그러므로 생물학의 오랜 역사는 인류가 약 5,000년 전에 문자를 쓰고 기록을 보존하기 시작한 시대보다 앞서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의 생물학적 기록

최초로 기록된 생물학사의 많은 부분은 아시리아인과 바빌로니아인이 재배식물에 관해 만든 얕은 부조와 그들의 가축 의술을 묘사한 조각에 나타나 있다.

바빌로니아인들은 대추야자가 유성생식한다는 것과 꽃가루를 수 식물에서 얻어 암 식물의 수정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대추야자 수확에 관한 기록은 BC 35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소포타미아). 또한 그들이 남긴 파피루스의 기록 중에는 BC 1600년경의 의학과 관련되는 해부학적인 설명과 BC 1500년경에 기록된 심장의 중요성에 관한 내용이 있다.

이와 같은 옛 기록에는 사실과 미신적인 것이 혼합되어 나타난다.

한편 무덤과 피라미드에서 발견된 파피루스와 고기품(古器品)에 따르면, 고대 이집트인들도 상당한 의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잘 보존된 미라는 그들이 부패를 방지하는 식물을 보존제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또한 출토된 다양한 식물성 목걸이와 얕은 부조들은 이집트인들이 이미 BC 2000년에 식물들을 약초로 이용하고 약용 가치를 잘 알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중국에서는 BC 2880년경에 신농(神農)이 여러 약초들의 효능과 콩과 같은 중요 식용식물들에 관해 기술했다.

고대 중국인들은 명주를 생산하기 위하여 누에를 길렀고, 나무에 구멍을 뚫는 곤충을 죽이기 위해 곤충을 먹는 개미를 이용하는 생물학적 방제의 원리도 알고 있었다. BC 2500년경의 인도 서북지방 사람들은 농학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으며, BC 6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한 문서에는 약 960가지 약초의 이용이 기술되어 있다.

여기에는 해부학·생리학·병리학·산과학(産科學) 등에 관한 정보도 함께 들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지방의 고대인들은 생물학상의 정보를 많이 축적했지만 예측할 수 없는 귀신들과 영혼들이 지배한다고 믿었던 세계에 살았기 때문에, 지식인들도 자연적인 것보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이해하려는 연구를 지향했다.

그리스·로마 시대

그리스 문명의 출현으로 그리스에서는 신비적인 태도가 변화되기 시작했다.

BC 600년경에는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고, 하나의 특정한 원인은 특정한 결과를 낳는다고 믿는 그리스 철학자들의 학파가 생겨났다. 이와 같은 인과율(因果律) 개념은 훗날 과학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더 나아가서 이 철학자들은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법칙이 있고 사람들은 관찰력과 추리력으로 이러한 자연법칙을 알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스인은 생물학을 확립하기도 했지만, 이들이 과학에서 이룩한 가장 큰 공헌은 합리적 사고방식이었다.

① 생명의 기원과 인간에 대한 이론:그당시 그리스에는 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알크마이온·히포크라테스·아리스토텔레스·테오프라스토스 등 많은 자연철학자들이 나타났다. 탈레스는 우주에 피시스(physis)라는 창조력이 있으며, 세계와 그 속에 있는 모든 생물은 물로부터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탈레스의 제자 아낙시만드로스는 생물은 물, 흙, 아페이론(apeiron)이라는 체온에 관여하는 기체성 물질로 되어 있다고 믿었으며, 이런 물질들이 다양하게 혼합되어 흙·기(氣)·불·물의 4원소가 생겼다고 믿었다. 그는 생명체가 진흙 속에서 자연발생하고, 처음 생겨난 동물은 물고기였으며, 이 물고기들의 후손들이 물을 떠나 건조한 육지로 이동한 뒤 변형되어 다른 동물들이 되었다고 주장하여 초기의 진화설을 완성했다(→ 소크라테스 이전 시대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제자인 알크마이온은 동물의 구조를 연구하여 동맥과 정맥의 차이를 기술하고, 시신경을 발견했으며, 뇌를 지능의 장소로 인식했고, 배(胚)의 발생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의 시조로서 한 학파를 이룩했다. 그는 환자를 관찰하여 인체 내의 복잡한 상호관계를 인식했다. 이 학파 사람들은 모든 생물체는 4가지의 체액 즉 혈액·흑담(黑膽)·점액(粘液)·황담(黃膽)으로 만들어진다고 믿었는데, 혈액은 심장에서, 흑담은 비장에서, 점액은 뇌에서, 황담은 간에서 각각 유래한다고 생각했고, 이 체액들이 조화를 잃으면 사람들에게 다혈질·우울·냉담 또는 화를 잘 내는 증세가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② 아리스토텔레스적 개념:고대 그리스의 과학은 BC 4세기 중반에 아리스토텔레스와 더불어 전성기에 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을 포함하는 모든 분야의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동물의 형태·분류·생식·발생·운동 등 생물학의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동물연구 Historia animalium〉를 비롯한 여러 저서를 남겼다.

그는 실증적 관찰의 시범을 보였고, 생물에 관한 지식을 체계화했으며, 여러 생물학적 원리를 공식화했다. 예컨대 그는 모든 생물은 습성과 서식지에 적응되어 있고, 구조상의 상동성과 기능상의 상사성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고 동물의 분류에 있어서도 외부구조상의 차이가 아닌 보다 기본적인 분류기준을 설정하고자 했으며, 생물계가 하나의 조직체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발생의 과정도 문화의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다.

식물학적 연구: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는 식물의 생활 조건과 일반 형태를 고려한 최초의 과학적 연구를 했고, 〈식물 연구 Historia plantarum〉·〈식물 역사 De historia causis plantarum〉 등의 저서를 남겼다.

그는 이 저서들에서 식물의 형태, 박물학, 약물 작용, 식물의 성장 및 식물과 토양 또는 기후와의 관계를 기록했으며, 500여 가지의 식물을 기재했다.

④ 그리스 시대 이후의 생물학 연구: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토스 이후 학문의 새로운 중심지 중 가장 유명했던 곳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과 박물관이었다. BC 3세기 이후 300년 동안의 중요한 생물학적 발전은 알렉산드리아의 의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중 가장 유명한 학자는 헤로필로스였다.

그는 인체를 해부하여 다른 큰 포유동물들의 구조와 비교했으며, 뇌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했고 뇌는 신경계의 중심이며 지능의 장소라고 인식했다(→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해부학).

로마인들은 큰 자연과학적 발전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자연의 연구 Historia naturalis〉(37권)를 편찬한 플리니와 의학자이자 최초의 실험생물학자라고 할 수 있었던 갈레노스를 배출했다.

아랍과 중세 유럽

갈레노스 이후 여러 세기 동안 생물학의 연구는 더이상 진전이 없었다.

중세(476~1453) 유럽에서의 자연과학은 경제적인 정체와 신학적 논리 및 종교적 억압으로 인해 거의 1,000년 동안 암흑시대였고, 생물학에서도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중세, 이슬람교).

① 생물학에 대한 아랍의 우위:9세기에 스페인까지 진출한 아랍인들은 과학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3~11세기의 생물학은 본질적으로 아랍인들의 과학이었다.

그들은 위대한 혁신자는 아니었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 등의 저작물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연구했으며 그 내용에 관해 주석을 달았다. 868년경에 사망한 알자히즈의 저서 중 하나인 〈동물에 관한 책 Kitāb alhavawān〉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면도 있지만 주로 아랍적인 작품이었다.

식물학과 동물학의 발달:중국의 제지술은 8세기부터, 인쇄술은 13세기부터 아랍과 유럽에 전파되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고안된 아라비아 숫자가 아랍을 통해 유럽에 전해져 유럽의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십자군 원정(1096~1291)을 통해 아랍의 철학과 과학이 유럽에 소개되었다. 13세기 중반에는 영국의 M.스콧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아랍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고, 중세의 위대한 박물학자인 독일의 A.마그누스는 〈식물에 관하여 De vegetabilibus〉(7권), 〈동물에 관하여 De animalibus〉(26권)를 라틴어로 저술했다.

마그누스의 저작은 그리스 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바탕을 두었지만 그 자신이 새로 관찰한 사실들도 포함했다. 그결과 식물학과 동물학이 발달했으며, 해부학은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대

14세기에 이르러 유럽의 중세 봉건제도가 동요되면서, 그리스 문화의 재발견과 더불어 모든 문화의 융합으로 학문의 재탄생을 보았는데,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이다.

르네상스를 계기로 중세기의 아랍에 의해 중계된 자연과학은 유럽에서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생물학 분야에서는 우선 해부학에서 새로운 발전이 이룩되었고, 식물이나 동물의 관찰과 기재를 통해 분류학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해부학에서 이탈리아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갈레노스의 방법을 타파하고 가축과 인체를 해부하여 비교한 결과, 사람과 말 사이의 뼈와 관절의 배열에 상동성이 있음을 처음으로 지적했다.

벨기에 태생의 이탈리아 파도바대학교 교수였던 베살리우스는 혁신적인 해부학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식물학 연구의 근원은 약용식물에 대한 연구였다. 독일의 신학자이자 식물학자인 O. 브룬펠스는 독일의 식물을 기재하여 식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브룬펠스). 16세기를 통하여 네덜란드·스위스·이탈리아·프랑스 등의 나라에서도 식물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고, 이 기간에 식물에 대한 분류체계가 크게 향상되었다.

스위스의 식물학자 G. 보앵은 식물을 속명과 종명으로 명명함으로써 이명법의 선구자가 되었다. 동물학에서 영국의 E.워튼, 프랑스의 P.블롱, 스위스의 C.게스너, 이탈리아의 U.알드로반디 등이 나왔으나 식물학의 발전을 따르지는 못했다.

16세기에 중국에서는 본초학자 이시진(李時珍)이 〈본초강목 本草綱目〉(1552~78)을 편찬했는데, 이 책은 식물 약 1,100가지, 동물 약 410가지가 기재된 훌륭한 박물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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