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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오랜 기간 숙적이었지만 두 나라가 결정적으로 갈라서게 된 계기는 종교 때문이었다. 헨리 8세가 아름답고 야심만만한 앤 불린과 재혼하기 위해 교황청에 첫 부인과의 결혼을 파기해 달라고 요청했는데 교황이 이를 거부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러자 헨리 8세는 1534년 교황청의 잉글랜드 교구 관할권을 박탈하고 교회 재산을 몰수하는 한편 자신을 수장으로 하는 영국성공회를 만들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는 가톨릭을 고수했는데 이 틈새에 신교인 칼뱅파가 세력을 넓히면서 종교적인 갈등을 노출시켰다.
- 1헨리 8세
- 2앤 불린
결국 가톨릭으로서는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결혼은 무효였으므로 그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인 엘리자베스 역시 공식적으로는 사생아였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왕위는 당연히 헨리 7세(헨리 8세의 아버지)의 증손녀인 메리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교황청의 생각이었다.
이런 정황을 배경으로 메리가 다섯 살이 되자 프랑스 로렌 지방 출신인 어머니 마리 드 기즈는 딸을 프랑스로 보내 교육하기로 하고 이탈리아에서 시집온 카트린 드 메디시스 왕비의 장남인 프랑수와 2세와 약혼시켰다. 프랑스 왕세자인 프랑수와 2세가 열네 살, 메리가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둘은 결혼식을 올렸고 메리는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프랑수와 2세가 열여섯 살인 1560년에 사망하는 바람에 메리 스튜어트는 열일곱 살 어린 나이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자 프랑스 왕비이면서 과부가 되었다.
- 1마리 드 기즈
- 2프랑수와 2세
그녀가 프랑스에 있는 동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관계는 갈수록 악화되었다. 더구나 스코틀랜드 의회가 칼뱅파를 국교로 승격시키자 이에 격분한 가톨릭교도들이 내전에 버금갈 정도의 폭동을 일으켰다. 당시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파문되었음에도 여왕으로 등극했고 스코틀랜드의 칼뱅파를 적극 지원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왕비로 과부가 된 메리는 미망인으로 프랑스에서 계속 머무는 것보다는 스코틀랜드에 가서 여왕이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열아홉 살이 된 메리는 1560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메리는 백성으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문제는 태어날 때부터 스코틀랜드의 여왕이었던 메리가 가톨릭 편을 들면서 칼뱅파들을 억압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물론 처음에 칼뱅파 대부분이 막강한 대지주이므로 그들의 도움 없이는 통치가 어렵다는 것을 간파한 메리가 유연한 자세를 취했다. 강력한 적대자인 칼뱅파의 존 녹스를 초청하여 칼뱅파 지지자들에게 예배의 자유를 허용하겠다는 아량을 베풀기도 했다.
그런데 문제는 메리가 엘리자베스 1세와 달리 국정과 사생활을 말끔하게 관리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1565년 스물두 살이 된 메리는 엘리자베스 1세의 중매로 십 대 소년이자 사촌인 단리 백작(엘리자베스 1세와는 6촌)과 결혼하면서 그에게 ‘스코틀랜드 왕’이란 칭호를 부여했다. 단리는 키가 크고 천사처럼 새하얀 용모를 갖춘 미남으로 메리가 반할 만하기는 했지만 메리의 기대에 못 미치는 나약하고 허영심 많은 청년이었다.
메리가 가톨릭 의식으로 단리와 결혼식을 치르자 스코틀랜드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칼뱅파가 다시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에든버러로 진격하던 칼뱅파 군대는 왕궁의 대포에 막혀 결국 항복을 선언했고 주동자들 대부분은 잉글랜드로 피신했다. 당시 스코틀랜드 여왕의 군대는 보스웰 백작이 지휘했다.
봉기가 진압되는 동안 메리는 단리를 거부하고 수많은 남자를 거느리기 시작했다. 문제는 단리가 아무리 힘이 없더라도 명목상 스코틀랜드 왕이라는 사실이다. 메리가 피에르 드 샤토랄이란 시인을 정부로 삼자 단리는 여왕의 침실에 숨어들었다는 죄목으로 그를 참수했다. 메리는 드 샤토랄이 죽자마자 곧바로 젊은 음악가인 다비드 리치오를 선택했는데 단리는 부하 다섯 명과 함께 메리와 리치오가 식사하고 있는 방 안으로 난입하여 리치오를 옆방으로 끌고 가 죽여버렸다.
그러자 메리는 그녀를 위기에서 구한 적이 있는 보스웰 백작을 다시 끌어들였다. 그런데 공식적으로 왕의 신분이었던 단리가 비밀리에 칼뱅파를 지원한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왕의 지위를 평생 보장해 달라고 메리에게 요구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처럼 복잡하게 얽힌 정국 속에 메리가 선택한 카드는 그야말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잉글랜드로 피신했던 칼뱅파 지도자들이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공격해오자 그녀는 배신자인 단리를 처형하기보다는 단리와 함께 도주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행운의 여신은 메리 편이었다. 보스웰 백작이 이끄는 기병대가 1566년 3월 반란군을 진압했고, 국왕 부부는 당당하게 에든버러로 재입성할 수 있었다.
메리는 6월에 아들을 낳았다. 왕실도 평온을 되찾는가 싶었지만 그것도 잠시, 8개월 후인 다음 해 초에 단리가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국민들은 보스웰이 살인자이고 메리가 공범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보스웰은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때 메리는 또다시 악수를 두는데 단리가 사망한 지 겨우 넉 달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보스웰과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물론 이번에는 새 남편을 스코틀랜드 왕에 책봉하지 않고 오크니 앤드 셰틀랜드 공작에 임명했지만, 전남편의 살해범으로까지 의심받는 사람을 새 남편으로 맞았으니 이를 누가 달갑게 여길까? 게다가 왕실에 더 커다란 불씨를 갖고온 것은 보스웰이 가톨릭 결혼식을 거부하는 프로테스탄트라는 점이다. 이것이 메리를 파멸로 몰고 간 결정적인 요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국민들은 보스웰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메리와 보스웰이 단리 살해한 공범자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 곧이어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스코틀랜드는 또다시 내전으로 치달았다. 그들의 결혼식이 끝난 지 한 달 만에 왕궁 앞에서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번에는 반란군 측이 승리했다. 패전한 보스웰은 오크니 군도로 건너가 해적 두목이 되었으나 폭풍을 만나 노르웨이 해안에서 표류하던 중 덴마크 군함에 붙잡혔다. 포로 신세가 된 그는 사슬에 묶인 채 11년 동안 어두운 감옥 안에 수감되어 있다가 미쳐 죽었다고 전한다.
메리도 포로가 되어 호수 속에 있는 로크리븐 성에 감금되었는데, 전투에서 승리한 반란군은 이제 겨우 13개월이 지난 아들(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로 훗날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됨)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을 강요했다. 메리는 11개월 동안 감금 생활을 하면서도 퇴위 압력을 거부했고, 도주에 성공하여 다시 한 번 군대를 일으켰다. 그러나 1568년 메리와 이복 남매지간으로 스코틀랜드를 섭정하고 있던 제임스 스튜어트에 의해 진압당했다.
메리는 결국 잉글랜드로 피신하였는데 국경을 넘으면서 훗날 반드시 돌아와 스코틀랜드를 불바다로 만들겠노라고 폭언을 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메리의 호언은 실현되지 못했다.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때문이다.
메리보다 아홉 살 위인 엘리자베스 1세는 앞서 말했듯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그러나 앤은 그 후 2년이 지나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결국 처형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 1세가 만 세 살이 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목숨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서출 신분으로 남다른 권모술수를 발휘해 궁정에서 살아남는 묘수를 발휘했는데, 다행히 행운의 여신도 그녀 편이었다. 언니인 메리 튜더가 사망하면서 서출인 그녀가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일단 여왕이 되자 엘리자베스 1세는 강인하고 위압적이면서도 공사를 엄격히 구분할 줄 알았다.
문제는 메리 스튜어트가 프랑스의 왕비이므로 프랑스로 피해도 될 것을 정적인 엘리자베스 1세가 있는 잉글랜드로 피신했다는 점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이어받을 당시만 해도 막강한 프랑스의 왕비였던 메리에게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메리는 엘리자베스 1세가 왕위에 오를 때도 축하하지 않았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가 스코틀랜드에 감금되어 있을 때 그녀를 석방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용기를 잃지 말라는 뜻에서 반지를 보내기도 했다. 메리가 자신을 다소 박대하긴 했지만 어떻든 간에 같은 혈통을 갖고 있으므로 우군으로 생각한 것이다. 족보로 따진다면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는 5촌 간으로 엘리자베스 1세가 아주머니뻘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를 받아들인 것은 상당히 정략적인 의도가 다분했다. 난처한 상황에 빠진 메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의 명성을 높일 수 있음은 물론, 그동안 받은 모욕을 마음껏 되돌려줄 기회이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국경을 넘어온 메리를 환영하기 위해 신하 두 명을 보내 일단 요크셔의 볼튼 성으로 안내한 후 그곳에 유폐했다. 엘리자베스 1세로서는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인 메리를 굳이 죽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살려두는 것이 여러 면에서 유리했다.
메리가 잉글랜드로 피신한 것은 그야말로 악수 중의 악수였다. 아마 거기까지는 예상치 못했겠지만 그녀가 잉글랜드에 입국한 사실은 엘리자베스 1세에게도 커다란 위협이 되었다. 헨리 8세가 만든 성공회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던 잉글랜드 북부의 대지주들은 대다수가 가톨릭교도였는데, 메리를 잉글랜드의 여왕으로 만들면 그동안 신교와 구교가 대립하면서 야기된 문제점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반란을 모의하면서 엘리자베스 1세의 신임을 받던 노퍽 공작을 통해 메리에게 접근했고 메리도 그의 제안에 동조했다.
그러나 노퍽이 주도한 북부 귀족들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다. 노퍽은 1572년에 처형되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반란의 배후를 조종하던 스페인 대사가 잉글랜드의 혼란을 틈타 잉글랜드를 공격하려던 계획이 탄로 나면서 스페인 대사도 추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메리가 예측불허의 교만한 가톨릭교도이며 잉글랜드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메리는 사면초가에 몰렸지만 그럼에도 14년 동안이나 처형되지 않은 것은 엘리자베스 1세의 정략적 의도가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1572년 잉글랜드 의회가 메리를 처형하라고 요구했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정치적인 면을 고려하여 거부했다. 정치적인 면이란 메리를 처형하는 데는 동의하지만 자신이 직접 지시를 내리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대신 스코틀랜드에서 그녀를 처형한다면 메리를 넘기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인들 역시 메리의 처형만은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감금생활 13년째인 1581년, 메리는 서른여덟 살 나이에 다시 음모의 전선에 나선다. 시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시동생인 프랑스의 앙리 3세로부터 아들을 스코틀랜드 왕으로 옹립한 후 왕권을 아들과 나누라는 권고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를 공격해서 메리를 사지에서 구해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모의는 사전에 발각되었는데, 메리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초에 대한 책임이 순전히 엘리자베스 1세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만약을 대비해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의 숙소를 여러 번 옮겼다. 그러던 중 1585년에 메리가 스페인의 힘을 빌려 잉글랜드를 공격할 계획이라는 편지가 발각되었다.
1586년에는 엘리자베스 1세의 암살을 꾀하고 있던 앤서니 배빙턴과도 서신을 교환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가톨릭교도이자 북부의 부유한 지주인 배빙턴은 스코틀랜드와 스페인의 연합작전으로 메리를 구하려고 했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영국의 구교도 귀족들이 손을 잡고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시킨 뒤 메리를 옹립한다는 계획이었다. 음모가 발각되자 배빙턴은 체포되어 처형당했고 메리도 반란과 암살 공모 혐의로 체포되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의 간수장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보호하고 있는 사악한 살인자의 극악무도한 행위 때문에 무거운 마음으로 이런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녀에게 이해시키기 바라오. 오랫동안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의 생명을 지켜준 은인에게 그런 배신행위를 한 데 대하여 신의 용서를 간절히 빌라고 말해주시오.
메리는 1586년 10월에 사형선고를 받았다. 메리는 자신을 변호하며 반란 책동에 공모한 적이 없다고 강하게 부정했지만 대세는 사형으로 기울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의 사형 집행을 망설였다. 스코틀랜드 왕좌에 있는 메리의 스무 살 된 아들 제임스 6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계속 끌고 가는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엘리자베스 1세는 그에게 거래를 제안했다. 메리의 처형을 받아들이면 대신 자신이 죽은 후 그를 잉글랜드의 왕으로 삼겠다는 조건이었다. 마침 엘리자베스 1세에게 적자가 없었으므로 제임스 6세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그녀의 제안은 곧바로 승낙되었고 엘리자베스 1세는 안심하고 메리의 처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했다.
처형이 임박하자 메리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세 가지를 요청했다. 첫째, 자신을 비밀리에 처형해줄 것, 둘째 시신을 프랑스 땅에 묻어줄 것, 마지막으로 자신의 유품은 시종들에게 나눠주고 절대 처벌하지 말 것이었다. 사실상의 유서이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에게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피터버러 대교구의 수도원장은 처형장에서 마지막까지 메리를 영국성공회로 개종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메리는 자신은 가톨릭교도이고 가톨릭교도로서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수도원장의 기도는 자신에게 아무 소용이 없다고 호통쳤다.
여하튼 가톨릭교도인 메리를 처형한 데 대해 가톨릭계는 분노했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다음 해 무적함대를 출정시켰다. 메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잉글랜드를 징벌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스페인의 무적함대 원정은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잉글랜드는 무적함대를 꺾은 여세를 몰아 세계를 제패하는 대영제국의 기반을 마련한다.
엘리자베스 1세와 제임스 6세와의 거래는 약속대로 이루어졌다.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메리의 아들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로 왕위를 계승했다. 어머니인 메리가 당대에는 결코 이루지 못할 과업이었지만 결국 그의 아들인 제임스 1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하나의 국가로 통합된 것이다. 다소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의 차별화 정책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1651년 올리버 크롬웰이 우스터 전투에서 이를 진압한다. 이로써 1707년 두 나라는 마침내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완전히 통합되어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을 구성했다.
학자들은 메리가 조금만 덜 격정적인 여인이었다면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을지 추론해보지만 메리의 파국은 교만하고 분별없는 성격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승리자 역시 그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메리가 승리를 거둘 수 없었던 이유는 욕망을 절제케 하는 냉철한 목표 의식과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영국과 스코틀랜드는 인구도 적고 전력에도 큰 차이가 나므로 종국에는 소국 스코틀랜드가 탐욕스러운 잉글랜드에 패배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메리의 비극은 태어난 시대가 그녀를 비극으로 몰아갈 수 있는 요건을 충족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16세기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라는 두 여자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기에 자신의 통치권을 더욱 공고히 하고 영국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었다. 한편 메리는 죽음의 칼이 목에 들어오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이 결국 아들인 제임스 1세에 이르러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되는 계기가 된다. 물론 아들이 어머니를 처형하는 데 동조한 대가기는 하지만 말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엘리자베스 1세와 메리는 25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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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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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미,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눈과마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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