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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헬레나 섬은 브라질 해안에서 3,500킬로미터, 아프리카 해안에서 1,900킬로미터나 떨어진 대서양의 섬으로 당시 약 4천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었다. 연합군이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이 섬을 선택한 것은 엘바 섬에서와 같은 탈출 사건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려는 비상조치였다. 한마디로 나폴레옹일지라도 탈출할 수 없는 절해의 고도다.
나폴레옹의 유형지까지 따라간 사람들로는 총보좌관인 베르트랑 백작, 몬트론 백작, 글루고 장군, 한때 수상이자 비서였으며 저술가인 라스카스 백작 등이 있다. 베르트랑과 몬트론은 각각 아내를 동반했고 그 외에 시종장인 마르샹을 비롯해 하인 10여 명도 함께였다.
1815년 10월 15일, 프랑스 · 이탈리아의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후 세인트헬레나 섬에 도착했을 때의 나폴레옹은 비록 유배라고는 하지만 매우 활기 있고 건강했으며 규칙적인 생활에 곧바로 적응했다. 아침 9시에 일어나서 10시에 아침 식사를 하고 별로 외출하지 않으면서 한때 비서 라스카스에게 자신이 구술하는 것을 받아쓰게 했다. 저녁 7시에 식사를 하고 11시까지 소리 내 고전을 읽다가 잠자리에 드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그런데 이렇게 정력적이고 활동적인 나폴레옹이 1821년 5월 5일, 유배된 지 5년 반 만에 사망하였다. 그는 자신이 명대로 죽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즉 자신이 사망한다면 자신의 죽음이 정상적이 아니며 특별한 이유가 있다는 말을 분명하게 적었다.
나는 내 명을 다 살지 못하고 죽으며, 영국의 소수 권력 집단과 그들이 고용한 암살자들의 손에 의해 살해된다.
그러므로 나폴레옹은 죽기 얼마 전부터 자신이 사망하면 반드시 해부하고 어떤 하찮은 것이라도 절대 놓치지 말고 기록하라고 했을 정도다. 결국 그의 희망대로 그가 죽은 다음 날 그가 최후의 날을 보낸 롱우드 하우스의 별실에서 시의들이 시체를 해부했다. 해부를 집행한 의사 일곱 명 가운데 여섯은 영국인 군의관이었고 나머지 한 명인 안톤 마르키는 코르시카인 의사로 마지막 일 년 동안 시의로서 나폴레옹을 섬긴 사람이었다. 집도는 나폴레옹의 희망에 따라 마르키가 맡았다. 약 두 시간이 지나 검시(檢屍)를 마친 의사 일곱 명은 서로 다른 의견을 보였다.
위에서 십이지장 사이에 궤양이 있다는 것은 모두 인정했지만, 안톤 마르키는 ‘암성 궤양’으로 보았고, 영국인 군의관들은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악성 종양’으로 판단했다. 의사 두 명은 나폴레옹의 간장이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데 비해 상당히 늘어나 있다는 데 관심을 보였다. 결국 일곱 의사들은 나폴레옹이 위암이나 유문(幽門, 위의 아래쪽 끝의 십이지장에 연결되는 부분)암으로 죽었다고 기록했다. 당시의 사망 소견서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추가되었다.
첫째, 나폴레옹은 체질적으로 위암의 유전적 소인이 있었다.
둘째, 나폴레옹 스스로 자신의 암 증세를 인정했다.
셋째, 시신을 부검했을 때 이미 그의 위에는 상당한 궤양이 진행되어 있었고 간장도 부어 있었다. 그 밖의 장기는 양호한 상태였다. 다만 특이한 것은 나폴레옹은 날이 갈수록 체구가 비대해졌다.
사실 나폴레옹이 위궤양으로 사망했다는 데는 아무런 의문이 없다. 나폴레옹의 집안은 유달리 위궤양 환자가 많았으며 그의 아버지도 위궤양으로 38세에 세상을 떠났다. 사실 당시의 의학적인 소견으로는 위궤양으로 병명이 적혀있지만 현대 의학적으로 볼 때 말기 위암과 간암으로 추정하는데 이 병은 현대 과학으로도 고치지 못하는 병이다.
1821년 봄부터 시작하여 나폴레옹은 위와 간의 통증으로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게다가 발작적인 구토에다 세인트헬레나에서 옮은 아메바성 이질로 급성 설사가 겹쳐서 심한 탈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의 주치의 안톤 마르키는 그에게 토주석(구토제로 독성이 강함)을 레모네이드에 타서 주었다.
주석 구토제는 유독한 안티몬 혼합물로 당시 의사들이 표준으로 사용하는 설사약이었다. 이 약을 마시고 나폴레옹은 방바닥에서 고통스러워했으나 의사는 아랑곳없이 투약을 계속했다. 두 번째 주치의였던 군의관 아치볼드 아노트는 설사약을 더 많이 쓰는 것이 황제에게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 당시 의사들은 죽어가는 허약한 환자들에게 대량의 설사 출혈을 유도하는 발포관장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현재의 의학자들은 나폴레옹에 대한 이런 치료가 고의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위암 환자에게 설사약을 투여하여 위를 비우도록 시도하는 것은 의도적인 살인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나폴레옹의 고통이 심해지자 아노트는 설사약으로 사용하는 유독성 염화 제1수은 열 개를 투약했는데, 이는 최대 허용치를 세 배나 초과하는 분량이었다. 나폴레옹은 몇 시간 내에 의식을 잃고 1821년 5월 5일 오후 5시 49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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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키류 미사오, 홍성민 옮김, 『뒤바뀐 세계사의 진실』(베텔스만, 2004).
- ・ 시앙스신, 임지영 옮김, 『세계 역사 속의 49가지 미스터리』(집사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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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나폴레옹은 독살되었다 – 미스터리와 진실, 인물편, 이종호, 북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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