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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스터리와
진실, 인물
폴 포트

공포 정치가 초래한 지구촌 최대의 킬링 필드

역사 인물 미스터리

크메르루주 치하의 만행을 생생하게 증언해주는 곳이 프놈펜 시내에 자리 잡은 투슬렝 보안서 건물이다. 정치범을 잡아다가 취조하는 장소로 쓰였던 이곳의 명칭은 S-21. S는 캄보디아 말인 ‘살라’의 머리글자로 ‘회관’이란 뜻이고, ‘21’은 크메르루주의 보안경찰을 뜻하는 ‘산테발’의 암호명이었다. 크메르루주군이 프놈펜을 접수하기 전 이곳은 3층 목조건물 4개와 단층 건물 한 개로 이뤄진 여자고등학교였다.

크메르루주가 이곳에 남기고 떠난 서류뭉치와 흑백 필름들로 미뤄볼 때 모두 1만 4,500~2만 명이 이곳을 거쳐 간 것으로 추정된다. 1976년부터 수용소에서 근무했던 직원은 자신이 아는 한 살아서 수용소를 나간 수감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확언했다.

    • 1~2캄보디아의 악명높은 투슬렝 감옥 입구와 내부 모습

그런데도 그들 중에서 일곱 명이 살아남았다. 생존자 중 한 명인 화가 반 나트(Vann Nath)는 그의 수기 『크메르루주의 S-21에서 1년(One Year in the Khmer Rouge’s S-21)』에서 당시 크메르루주의 만행이 어떠했는지를 낱낱이 폭로했다.

특별히 독방에 수감된 사람을 제외하고 모든 수용자들은 큰 방에서 족쇄에 서로 발이 채워진 채 바닥에 그대로 누워서 잠을 자야 했다. 작은 족쇄의 길이는 0.8미터에서 1미터로 몇 명이 묶였고(독방에 있는 사람들도 사용) 기다란 족쇄는 6미터에 달하는데 20명에서 30여 명이 함께 묶였다. 수감자들은 차례로 조사받기 위해 방을 나갔는데 대부분 구타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오거나 전혀 돌아오지 않았다. 거의 모든 사람이 자신이 왜 체포되었는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체포되었는데, 수감자들에게 지급되는 식량이 적어(30여 명의 식량으로 쌀 500~700그램을 제공) 수감자들은 차츰 쇠약해져 사망하기 일쑤였다.

반 나트는 새로운 법에 따라 농장에서 일했는데 1977년 12월 29일 벼 농장에서 일하다가 체포되어 1978년 1월 7일 투슬렝 감옥에 수용되었다가 정확히 1년 후인 1979년 1월 7일 탈주에 성공했다. 그의 책은 자신이 수용되어 있는 동안 자신이 보고 겪은 것만 적었기 때문에 투슬렝 감옥의 전반적인 정황을 낱낱이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의 책은 투슬렝에서 세기적인 만행이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없다.

투슬렝 감옥의 생존자인 반 나트가 그린 수용소 모습

ⓒ 북카라반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투슬렝에 수감된 희생자들은 캄보디아 전역에서 왔다. 투슬렝에 도착하자마자 사진을 찍고 어린 시절부터 체포될 때까지 자신의 경력 등을 상세히 고백해야 했다. 심문 도중에 조금이라도 반항하거나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무조건 채찍이나 몽둥이로 때리고 고문했다.

체포된 사람들 대부분은 캄보디아인이지만 베트남, 라오스, 태국, 파키스탄, 인도, 영국,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용자 중에는 노동자, 농부, 엔지니어, 기사, 학생들도 있었고 교수들은 물론 외교관, 정치가, 장관 등 고급 관리들도 있었다. 특히 고급 관리들은 가족이 함께 들어왔으며 간혹 갓난아기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 모두 처형되었음은 물론이다.

자료에 의하면 1977년에서 1978년까지 투슬렝 감옥에는 항상 1,200명에서 1,500명 정도의 수용자가 있었다. 그들의 생존 기간은 일반적으로 두 달에서 네 달이며 아주 중요한 죄수인 경우는 6개월에서 7개월이었다. 앞에 설명한 생존자인 반 나트는 무려 일 년을 지냈는데 이는 매우 특수한 경우였다.

투슬렝 감옥에서 살아서 나온 생존자 일곱 명

한 가운데가 반 나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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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고등학교 건물을 개조한 투슬렝 감옥은 교실을 모두 감방으로 변경하고 각 창문에는 철망을 설치했다. 1층 교실은 가로 0.8미터, 세로 2미터의 작은 방으로 나뉘었고 2층부터 가로 8미터, 세로 6미터의 감옥으로 만들어 죄수를 한꺼번에 수용했다. 여자 죄수들은 중간층에 수감했다.

    • 1투슬렝 감옥 내부 모습

      각종 고문기구가 비치되어 있다.

놀란 표정을 한 투슬렝 감옥의 소년 죄수

ⓒ mendhak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수감자들의 기상 시간은 새벽 4시 30분이었다. 하루에 네 번 점호를 하는데 두 손은 뒤로 하고 족쇄에 채워진 발을 보여준다. 30분 정도 손과 발을 움직이는 운동을 허락했는데 이때도 발에 채워진 족쇄는 풀어주지 않았다. 대소변용으로는 조그마한 플라스틱 통을 줬다. 그들은 감방에서 대소변을 볼 때는 무조건 허락을 받아야 했다. 허락을 받지 않으면 몽둥이로 20~60대씩 맞았다.

중요 인물은 독방에 수용되었는데 작은 방임에도 바닥에 족쇄를 걸고 있어야 했다. 특별히 중요한 인물은 철로 된 침대에 역시 족쇄를 차고 있어야 했다. 자료에 의하면 투슬렝이 포기되기 직전까지 중요 인물 여러 명이 살아있었는데 모두 마지막 날 살해되었다. 각 방에는 붙어 있는 수감자들이 지켜야 할 주의사항은 투슬렝 감옥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장소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1. 너는 나의 질문에 따라 답해야 한다.
2. 네가 나에게 항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진실을 숨겨서는 안 된다.
3. 혁명에 반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마라.
4. 나의 질문에 시간을 끌지 말고 곧바로 대답해야 한다.
5. 혁명의 이념 등에 대해서 나에게 말하지 마라.
6. 전기고문을 당하거나 채찍을 맞을 때 소리 지르지 마라.
7. 명령을 내릴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얌전하게 있어라.
8. 너의 반역을 감추기 위해 혁명을 팔지 마라.
9. 네가 이들 규칙을 어길 때에는 채찍 열 대와 전기 충격 다섯 번을 받는다.

가장 놀라운 것은 수용소에서 발견된 사진이다. 이들 각 수감자들이 수용된 첫날과 처형되기 직전에 찍은 것이다. 이들 사진은 현재 박물관에 모두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부모와 함께 처형된 갓난아이들도 적지 않았다.

처형되기 직전의 수감자를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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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이나 처형 방법은 그야말로 잔인했다. 죄수들의 손을 뒤로 묶고 채찍이나 몽둥이로 때리는 것은 보통이었으며 여자와 남자를 나체로 묶어놓고 유두를 자르는 것은 물론 집게로 손톱을 뽑기도 했다. 다양한 물고문을 상습적으로 하였고 고문당하다가 죽는 일이 다반사였다. 고문이 심하여 걸을 수 없는 경우 나무에 묶은 돼지를 옮기는 것 같이 사람을 묶어 옮겼다. 투슬렝 연병장에 철봉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것은 체조용이 아니라 수용자들을 묶어놓고 고문할 때 사용한 것이다.

처형이 확정된 사람들은 구덩이를 직접 파게 한 후 대나무를 뾰족하게 갈거나 날카롭게 만들어 때리거나 찔러 죽인 후 묻었다. 반 나트는 죄수들을 일렬로 세운 뒤 날카로운 꼬챙이로 처음과 마지막 사람의 배와 가슴을 한꺼번에 찔러 죽인 후 묻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수감자들을 상대로 인체 실험도 행했다는 점이다. S-21의 교도소장 두치는 소녀의 배를 가른 후 물속에 넣고 얼마나 오래 떠 있는지를 관찰했다고 기록했다. 이와 유사하게 목구멍을 찔린 네 살짜리 소녀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있다. 두치가 적은 일기 중에는 고문이 너무나 심해 정보를 얻기 전에 수감자들이 죽어버려 난처했다는 내용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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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를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이는 장면

반 나트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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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슬렝 학살 박물관은 현재 전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있는 캄디아의 명소 중 하나다. 특히 투슬렝이 포기되기 직전까지 여러 명의 중요 인물 여러 명이 수감되어 있던 감옥은 필자가 2005년에 방문할 당시에도 핏자국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당시의 정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려고 일부러 핏자국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은 것이다. 부모가 보는 앞에서 어린아이를 나무에 때려죽인 후 부모도 처형했는데 이때 처형에 사용된 나무는 이들의 잔혹함을 인식시키기 위해 특별히 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집단 처형된 희생자들의 유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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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킬링필드’ 대학살의 주동자를 심판하기 위한 크메르루주 전범 재판소가 2006년부터 열렸다. 1997년부터 9년 가까이 끌어온 킬링필드 전범 재판소 준비 작업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정부에서는 당초 협상에 따라 크메르루주군을 사면했지만 세계 여론에 굴복하여 크메르루주 정권 최고위직을 지낸 여섯 명에 한하여 국제 전범 재판을 해달라고 유엔에 청원했다. 유럽연합(EU)은 크메르루주 재판을 열기 위해 1억 달러를 지원하여 크메르루즈 전범 재판소(ECCC)를 발족시켰다.

재판에 회부된 사람은 모두 여섯 명으로 폴 포트에 이어 ‘브라더 넘버 투’로 불렸던 누온 체아 전 캄푸치아 공산당 부서기장, 타목 전 군사령관, 카잉 켁 이에브 전 검찰총장, 키우 삼판 전 국가수반, 이앙 사리 전 외무장관 등이다.

재판은 세 단계로 진행된다. 첫째는 검사팀의 혐의 조사와 기소, 둘째는 본격적인 심리와 선고, 셋째는 항소심이 진행될 예정인데 그들이 과연 유죄평결을 받을지는 의문시된다는 된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이들 전범자는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히 피고인 중 한 명이 자신의 죄를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크메르루주의 사상적 지도자였던 누온 체아와 키우 삼판 등 두 명은 캄보디아 인민을 위해 할 일을 한 것뿐이라며 잘못이 없다고 버티고 있다고 한다. 캄보디아 학살 사건, 범죄자들에 대한 법의 심판이 정의롭게 이루어져 당시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캄보디아 국민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릴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직 산 넘어 산이다. 시아누크 전 국왕이 크메르루주군과 협상하면서 모두를 사면한다는 조건에 합의했기 때문이다. 시아누크 왕은 2012년 사망했다.

전범 재판에 회부된 크메르루주의 2인자 누온 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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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Vann Nath, 『One Year in the Khmer Rouge’s S-21』(White Lotus Press, 1998).
  • ・ David Chandler, 『Voice from S-21』(Silkworm Books, 1999).
  • ・ 이종호, 『세기의 악당』(북카라반, 2011).
  • ・ 「크메르 루주 공산반군 근거지 관광지로 탈바꿈」, 연합뉴스, 2003년 8월 26일.
  • ・ 「안경 썼다고 외국어 쓴다고 학살··· 킬링필드 전범, 27년 만에 법의 심판대에」, 국민일보 쿠기뉴스, 2006년 1월 17일.

이종호 집필자 소개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Dr. Ing.)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Dr. d..펼쳐보기

출처

미스터리와 진실, 인물편
미스터리와 진실, 인물편 | 저자이종호 | cp명북카라반 도서 소개

람세스에서 메릴린 먼로까지 역사 인물에 얽힌 세계 미스터리의 진실과 거짓을 밝힌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정보에 입각하여 동서양을 넘나들며 신과 인류가 남기고 간 수많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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