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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은 자신이 황제가 되는 데는 결정적인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중국 역사상 여자의 몸으로 황제가 된 예가 단 한 건도 없다는 점이다. 653년 당나라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을 때 여성인 진석진이 자신을 문가황제(文佳皇帝)라 칭한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곧 도적으로 몰려 진압당했다. 현대 학자들도 진석진이 왕조를 통치한 적이 없으므로 황제로 공인하지 않는다.
무측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여성도 순리에 따라 황제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시경』, 『서경』, 『예경』, 『역경』, 『춘추』는 물론 도가의 『도덕경』에도 남존여비를 조장하고 여성의 정치참여를 불허하는 계율만 있었다. 예컨대 『서경』에는 “암탉은 새벽을 알리지 못한다.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은 가정이 망할 때뿐이다”라고 적혀 있고 『시경』에는 “부녀자는 공무에 참여하지 말고 양잠과 방직을 훌륭히 해야 한다”라고 못을 박아놓았다. 그런데 설희의와 법명 등이 불교 경전에서 여자가 왕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찾아냈다. 『대방등무상대운경』(대운경이라 부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정광(淨光)이란 천녀가 있다. ······ 부처님이 정광 천녀에게 이르길 “너는 잠시 나의 대열반경을 들었다. 이러한 인연으로 지금 천상의 몸을 얻었다. 내가 속세를 떠날 때 (너는) 심오한 뜻을 다시 듣고 천상의 몸을 버리고 여자의 몸으로 왕이 되어 전륜왕이 통치하던 사방 중의 하나를 얻게 될 것이다. ······ 그때 너는 실제로는 보살이지만 중생을 위해서 여자의 몸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더할 수 없이 높고 무상한 ‘부처님’이 성모신황에게 천명을 내려 그녀로 하여금 왕조를 바꾸어 동방 세계를 통치하게 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뜻이기 때문에 어겨서는 절대 안 되며 부처님의 힘은 지극히 높아 미치지 않는 곳이 없어서 어기는 자는 기필코 멸망한다는 뜻도 갖고 있다.
690년 9월 9일 무측천은 당나라를 주(周)나라로 바꾸고 낙양을 수도로 하며 연호를 천수(天授)로 바꾼다고 선포했다. 신하들은 무측천에게 ‘성신황제(聖神皇帝)’라는 존호를 올렸다. 예종은 무씨 성을 내려받고 예전처럼 동궁에 거처하며 황태자의 예우를 받았다. 무측천이 황관을 쓰고 용포를 걸친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성황제가 된 것이다.
무측천이 국호를 ‘당(唐)’에서 ‘주’로 바꾼 이유는 두 가지이다. 우선 자신의 족보를 대외적으로 확실하게 공표한다는 것이다. 고종은 무측천의 아버지 무사확을 주국공(周國公)으로 봉했다. 아버지가 주국공이었으므로 국호를 ‘주’로 한 것은 자신의 가문에서 나라가 세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또 다른 이유는 고대 왕조인 주나라 때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므로 이를 본받아 새로운 기적을 만들겠다는 뜻이다.
황제가 된 후 그녀는 모든 면에서 자신감을 보였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무측천이 황제가 된 후의 기간은 중국 역사상 가장 안정되고 화려한 시기로 정치 경제 · 사회가 모두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녀가 황제가 된 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일은 인재들을 구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상벌을 분명히 했으며 관리들을 독려하고 감시할 사자들을 수시로 파견했다.
무측천의 공헌 중에서 가장 잘 돋보이는 것은 과거제도이다. 즉 과거제를 통해 선발한 인원수를 증가시키는 동시에, 황제 앞에서 과거시험을 치르는 전시제(殿詩制)를 설치하여 제도의 위상을 높였다. 이후 무측천이 세운 주나라가 멸망하고 당이 재건됐을 때 활약한 명신 중 상당수가 이 당시의 획기적인 인재 선발 정책을 통해 관계에 진출했던 인물들이다.
송나라 때부터 더욱 발전하기 시작한 과거제는 중국에서 통일 제국이 오랫동안 유지되는 비결 중 하나였다. 과거제는 관직 임용 시에 출신보다는 능력을 우선하여 우수한 인력이 황제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한 제도적 장치였다. 또한 일반 서민들에게도 사회적 신분 상승의 숨구멍을 터줌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 제국의 질서가 탄탄한 토대 위에서 유지되게 했다.
아울러 과거제의 실시로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이 중국 사회에 출현했다.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만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던 장안성 북문의 출입을 허용하여 이들을 ‘북문지사(北門之士)’라고 부른다. 이 북문지사라 불린 인재들의 활약으로 곧 이어지는 현종의 황금기인 ‘개원의 치’에서 당 문화는 활짝 꽃피게 된다.
여하튼 무측천 이후 중국의 지배층은 과거제를 통해 관료를 역임했거나 예비적인 관료군으로 올라선 사대부에 의해 구성됐다. 측천무후의 정책이 이후 중국의 역사를 움직인 지배층의 기본 뿌리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지배층은 실제로 토지나 상업 자본과 같은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형성됨으로써, 세 가지의 다른 얼굴, 즉 지주 · 상인 · 지식인의 면모를 동시에 지녔다. 이처럼 토지 · 상업자본 · 학식이 결합된 지배층 기반이 과거제를 통해 확립되면서 전제 왕정은 장기간 비교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중국 역사상 수많은 농민 봉기 등이 일어났는데, 무측천의 통치하에는 단 한 차례도 민란이 발생하지 않은 진기록이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와 같은 안정을 이룬 까닭은 사실 악명 높은 밀고 제도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소위 스파이 정치를 한 것인데 주로 반대 세력의 관리들이 희생물이었다. 이를 위해 그녀는 중국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혹리(酷吏)들을 조장하는 데 앞장섰다. 혹리는 잔인하고 포학하며 형벌을 남용하는 관리를 말한다. 이것은 무측천을 세기의 악당으로 당당하게 자리매김하게 할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오점이 된다. 밀고 제도를 전담한 기관이 추사원인데 추사원의 정문인 여사문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오는 자가 드물어 이곳의 부름을 받은 관리들은 아예 가족에게 유언을 하고 나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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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조문윤, 『무측천 평전』(책과함께, 2004).
- ・ 안효상, 『상식 밖의 세계사』(새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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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황제 등극 준비 – 미스터리와 진실, 인물편, 이종호, 북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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