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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돌아온 스탠리는 자신의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탐험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해야 했다. 1873년 리빙스턴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리빙스턴이 못다 한 탐험을 계속하겠다고 선언하자 자금은 곧바로 확보되었다. 1874년, 그는 빅토리아 호의 주변을 탐사하기 위해 바가모요를 출발한다. 1875년 2월경, 빅토리아 호에 도착한 그는 배로 호수 주위를 탐사했다. 그 결과 빅토리아 호에서 시작되는 강은 리폰 폭포에서부터 나오며 빅토리아 호가 나일 강의 수원임을 확인했다. 또한 1876년 탕가니카 호수를 조사하여 루알라바 강이 나일 강의 상류가 아니라 콩고 강의 상류임을 알아냈다.
스탠리 일행은 최신 소총과 대포로 무장하고 조그마한 빌미라도 생기면 마주치는 흑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해했다. 이와 같은 비인도적인 행위에 대해 함께 탐험에 참가한 사람조차 그를 ‘인간 사냥꾼’이라고 비난했다. 스탠리는 탐험 대원들의 생명을 보호하려는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지만 그에 대한 비난은 그가 사망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스탠리는 탐험 도중에 큰 마을 28곳과 작은 마을 60~80여 곳을 공격하고 파괴했다고 자신이 직접 기록을 남겼는데 그의 만행으로 얼마나 많은 아프리카인이 피해를 보았는지 알 수 있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스탠리는 자신이 본 것을 토대로 아프리카 개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한마디로 무인지경으로 깃발만 꼽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제일 먼저 호응한 사람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였다. 이 두 사람의 합작으로 아프리카 대륙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악몽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레오폴드 2세는 1865년에 부왕 레오폴드 1세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의 공식 명칭은 ‘벨기에 사람들의 왕(King of the Belgians)’이다. 1830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벨기에는 독일 왕족인 레오폴드 1세를 왕으로 옹립했다. 레오폴드 2세는 왕이 되기 전에 스페인의 세르비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도서관에서 에스파냐가 해외 식민지에서 거두어들인 이익이 막대하다는 것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식민지 확보야말로 벨기에가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대륙과 아시아는 이미 강대국의 식민지로 변한 지 오래였고 벨기에는 독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소국이므로 벨기에가 차지할 마땅한 땅이라곤 없었다. 그가 눈독을 들인 곳은 미지의 땅 아프리카였다. 남아프리카를 비롯해 비교적 접근이 쉬운 곳은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이 확보하기는 했으나 아프리카 전 영토의 약 80퍼센트에 해당하는 지역은 무주공산으로 남아 있었다. 광대한 영토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식민지화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프리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식민지를 개척하자는 스탠리의 제안은 레오폴드 2세에게는 구세주의 손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탠리는 레오폴드 2세의 지원으로 벨기에의 은행과 합작하여 1878년 ‘콩고회사’라는 사설 회사를 만들어 아프리카 진출에 착수한다.
스탠리의 원대한 계획은 아프리카에 도착하자마자 실행에 옮겨졌다. 그는 전 콩고 지방을 돌면서 원주민 추장에게 구슬이나 옷감 등을 선사하고 자신이 갖고 간 종이 위에 그 종족의 표시를 그리거나 X표를 찍게 했다. 족장들 대부분은 이전에 글로 된 문서를 본 일조차 거의 없었다. 아프리카인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호의의 표시로 찍어 준 종이가 뒷날 아프리카를 침략하는 통한의 전면 위임장으로 변하였다. 그들이 서명한 종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자발적으로 우리의 상속권과 계승권을 협회(레오폴드 2세가 위장으로 만든 국제 아프리카 협회)에 양도하고, 영토에 대한 모든 주권과 통치권을 영원히 포기한다. ······ 영토의 어느 지역에서든 당 협회가 시행하는 작업, 원정 사업에 언제라도 노동력이나 기타 수단을 지원한다. 이 나라를 관통하는 모든 도로와 수로의 통행료 징수권, 모든 수렵, 어업, 광산, 삼림 개발권은 당 협회가 절대적인 소유권을 갖는다.
그 종이에는 땅뿐 아니라 노동력까지 제공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계약은 맨해튼을 양도한 미국 인디언들의 조약보다 훨씬 조건이 나빴다. 스탠리의 속임수에 의해 만들어진 문서를 넘겨받은 레오폴드 2세는 500명의 원주민 추장들에게서 권리를 넘겨받은 증서를 갖고 있다며 본국의 수백 배나 되는 영토를 식민지로 지정하였다.
벨기에가 콩고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럽 열강은 앞을 다투어 탐험가를 후원하여 아프리카의 미개척지 진출을 서둘렀다. 아프리카는 불과 15년 만에 서구 열강의 식민지 혹은 보호령이 되었다. 프랑스는 사하라 사막을 중심으로 아프리카 서부, 북부, 중부 일대를 장악했고 벨기에는 콩고를, 이탈리아는 트리폴리와 리비아를, 독일은 카메룬과 토고를 손에 넣었다. 아프리카 대륙에 남은 독립국은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뿐이었다.
아프리카 지도를 보면 나라 간의 국경선이 다른 대륙과는 달리 일직선으로 곧게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유럽 열강들이 아프리카를 분할하면서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마음대로 경계선을 그었기 때문이다.
스탠리는 영국으로부터 작위를 받는 등 영국 제일의 명사 대우를 받으면서 1904년 5월 10일 사망했다. 스탠리는 밤중에 시계 소리를 듣고 “참 이상하구나! 때가 되었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스탠리에 의해 촉발된 아프리카 식민지화는 아프리카를 필요한 것을 수탈하는 장소로 만들었을 뿐 아프리카인들에게 어떠한 혜택이나 자산도 돌려주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원래 야만인으로 살아왔으므로 그들에게 문명을 이식하여 야만적인 행동을 교정하는 것이 그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아프리카인들이 갖고 있는 영토에서 나오는 재산을 수탈하는 것이 문제가 될 리 없다는 것이다.
현재는 수많은 나라가 독립하여 명목상 아프리카인들이 직접 통치하는 곳도 적지 않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에게 독립을 준 이유는 그렇게 하더라도 아프리카로부터 필요한 것을 얻는 데 큰 불편이 없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물질적인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한 유럽인들의 지배는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현재와 같은 상황을 만들게 된 근원적인 씨앗은 스탠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탠리는 전제군주도 아니고 권력자도 아닌 사업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계의 역사가 한 개인의 영달과 물욕에 의해 얼마나 변질될 수 있으며 또 큰 파장을 갖고 올 수 있는가를 알 수 있게 한 장본인이다. 스탠리와 같은 인물이 또다시 나타나지는 않을지 역사를 예의 주시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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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아담 호크쉴드, 이종인 옮김, 『레오폴드왕의 유령』(무우수, 2003).
- ・ 와타히키 히로시, 윤길순 옮김, 『질투하는 문명』(자작나무, 1995).
- ・ 이종호, 『세기의 악당』(북카라반,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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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식민지를 찾아라 – 미스터리와 진실, 인물편, 이종호, 북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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