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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유럽의 주축인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은 강력한 왕권을 가진 제국주의로 한껏 위세를 높이고 있었다. 그러나 해상국가이면서 유럽의 강자로 부상했던 베네치아는 조그마한 도시국가로 영토도 적은 데다 외국 식민지도 별로 없어 몰락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 시민은 점점 불만을 품기 시작했고, 도시 지도부는 이 불만을 어떻게든 해소해야만 했다.
베네치아가 택한 것은 유흥 산업이었다. 도시 곳곳에서 합법적인 도박판들이 벌어졌고 누구나 오락을 즐길 권리가 있었으며, 술을 마실 권리가 있었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유곽이 되었고, 모든 여성이 창녀와 구분되지 않을 정도였다. 유럽인들에게 베네치아는 유럽의 ‘환락가’ 또는 ‘퇴폐와 유흥의 중심지’였다.
1725년 베네치아의 산 사무엘라 극장 근처에 있는 칼레 델라 코메디아에서 도시의 명예를 한껏 드높이는 한 남자가 태어났다. 그가 바로 세계 최고의 바람둥이로 알려지는 카사노바다. 그는 희극배우였던 아버지 자에타노 주세페 카사노바와 유명한 성악가인 어머니 자네타 사이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유럽의 오페라 무대에서 빼어난 재능을 발휘했고 특히 그의 동생인 프란체스코 카사노바는 서양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가이다. 그가 그린 그림들은 오늘날 기독교 미술관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하며 그의 친척들도 변호사, 공증인, 사제로 활동하며 비록 귀족은 아니지만 모차르트나 베토벤과 같은 예술적 분위기에 젖은 시민계급이었다.
그러나 카사노바의 아버지는 여섯 남매만 남기고 서른여섯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외할머니 마르지아가 카사노바를 돌보았는데 할머니마저 세상을 뜨면서 카사노바는 귀족 미켈레 그리마니에게 맡겨져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카사노바에게 남다른 처세술과 재주가 있었던 이유는 그의 키가 2미터가 될 정도로 거인인 데다 파도바 대학에서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학업을 닦았기 때문이다. 그는 선천적으로 탁월한 언어 능력을 갖고 있어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에 능통했고 스페인어, 영어도 어렵지 않게 구사할 수 있었다. 더구나 대학교 때 학습 능력이 대단하여 고전 문학을 줄줄이 꿰었음은 물론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성적을 유지했다. 이는 훗날 경제, 정치,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엘리트들과 교류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특히 그는 춤, 펜싱, 승마 등 몸으로 하는 모든 궁중 예술과 카드놀이에서 여느 귀족 가문의 기사보다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다. 이러한 재능은 선천적인 신분상의 한계를 뛰어넘어 귀족 사회와 부유한 상류층의 언저리에서 견뎌가는 힘이 되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의 환상적인 기억력이다. 카사노바는 70년 평생 자기가 본 얼굴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고, 자신이 듣고 읽고 말하고 본 것을 모두 다 기억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평생 40여 편에 달하는 저서를 남기면서 인문학에 뛰어난 지식을 겸비한 저술가로 평가받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남다른 경력과 기억력 때문으로 여겨진다.
당대에 출세하려면 사제가 되든가 군인이 되는 것이 기본이므로 카사노바는 성직자의 길을 택했다. 그는 자신을 잘 알고 있는 성직자 알비세 말리피에로의 도움으로 1740년 2월, 즉 열다섯 살 때 성직에 입문하고 베네치아의 코레 대주교로부터 신품을 받았다. 또한 파도바 대학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면서 열여섯 살에는 비잔틴 성당에서 첫 신학 강의를 했고, 추기경의 비서로 일하는 등 전도유망한 젊은 사제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카사노바는 사제가 되지 못한다. 그가 적은 글에 따르면 로마로 가서 성직자로 자리 잡기 위한 절차를 밟다가 운명의 꼬임으로 그 길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무엇이 그의 운명을 꼬이게 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일흔 살인 성직자 말리피에로가 열일곱 살인 어린 가수 테레즈를 농락하는 걸 곁에서 지켜보면서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카사노바는 몽레알 백작 부인의 관리인 딸인 루시아를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사제라는 걸 인식하고 욕정을 절제한 채 그녀를 떠난다. 그런데 훗날 그녀가 어느 호색한에게 농락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다. 다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성으로 절제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그의 젊은 시기는 평범하지 않았다. 1742년, 즉 열일곱 살 나이에 파도바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는다. 그러나 그가 짧은 시간 겪은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자신은 성직자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절도있는 규범을 지키지 못하고 자주 일탈하곤 했다. 심지어는 설교를 하기 위해 단상에 올라갔는데, 너무 술에 취해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가 성직자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베네치아 사회가 돈이면 무엇이든 해결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간신히 성직자 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는 성직자가 깨끗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다. 도시 전체가 창녀촌인데 설교한다고 해서 그들이 도덕군자가 될 리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교회를 다니던 여성을 유혹하면서도 떳떳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여성들을 쉽게 유혹할 수 있었던 이유는 훤칠한 체구와 용모 덕이기도 하지만 남다른 바이올린 연주 실력 때문이기도 하다. 사실 그는 산 사무엘라 극장에서 일 년 동안 바이올리니스트로 일하며 생계를 해결한 적도 있었다. 열일곱 살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바이올린 천재라니 어느 여자가 넘어오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의 파격적인 생활이 계속 구설수를 몰고 다니자 참다못한 교회는 그를 쫓아낸다. 유명한 카사노바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가 도망간 곳은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는 오스만 제국이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다시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온 카사노바는 프리메이슨에 가입하고, 비밀 첩보 요원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그는 첩보의 왕국 베네치아 사람이면서, 교황청에서 일한 적이 있으므로 교회에 관한 비밀을 많이 알고 있었다. 이후 카사노바는 그 능력을 이용하여 예술의 도시 파리, 음악의 도시 빈을 돌면서 수많은 여성을 유혹했다. 카사노바가 여성들을 유혹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했던 것은 도박이었다. 그는 도박에도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물론 카사노바가 이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에게 든든한 자금줄이 있었기 때문이다. 1747년 4월 카사노바는 어느 귀족 집안의 결혼식에 갔다가 베네치아 귀족이자 상원 의원인 마테오 조반니 브라가딘과 우연히 같은 곤돌라를 타게 된다. 그런데 곤돌라 안에서 브라가딘이 갑자기 쓰러졌다. 카사노바가 간단한 응급처치를 하고 의사를 찾았는데 의사는 브라가딘의 가슴에 수은을 붙여주었다. 그런데 의사의 처방에도 브라가딘이 계속 고통을 호소하자 카사노바가 수은을 떼어내고 나름대로 치료를 했는데 놀랍게도 브라가딘이 회복되었다. 이에 감동한 브라가딘은 그를 양자로 받아들이면서 하인과 곤돌라 그리고 매달 10제키니의 용돈도 주었다.
브라가딘 가문의 양자가 된 카사노바는 거칠 것이 없었다. 자신의 출생에 대해 열등감을 갖고 있던 차에 귀족 중의 귀족 가문에 양아들이 되었으니 그동안 그를 억누르던 압박에서 벗어난 셈이다. 그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행을 했고 여행 중에 만난 모든 여인을 자신의 침실로 끌어들였다. 카사노바의 여인이 100명이 넘는다는 말은 과장이라는 설이 있지만, 그는 회고록에서 122명으로 기록했다. 특히 환락의 도시 베네치아는 일상적인 섹스 파티가 유행하였고, 카사노바는 수녀들까지 파티에 초대했는데 바로 이 섹스 파티 때문에 카사노바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다.
카사노바와 파티를 즐긴 여인 중에는 성직자의 부인, 종교 재판관의 애인 등 고위층들이 많았다. 카사노바에 반감을 품은 이들은 카사노바가 프리메이슨 등 이단과 연결되어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그를 체포하기로 한다. 1755년 서른 살의 카사노바는 금지된 이단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죄명으로 종교 재판관에 의해 체포된다. 여자를 유혹하는 그의 기술이 ‘악마의 속삭임’이란 뜻이다.
카사노바의 공식 죄목은 다소 혼란스럽다. 당시 카사노바는 베네치아 종교 재판관들에게 요시찰 대상이었다. 카사노바의 이단적인 지식과 파격적인 행동 때문이었다. 카사노바는 외국의 대사 및 정부 인사들과 자주 접촉하였는데 놀랍게도 이것이 국가에 위험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의 죄명은 난봉, 사기, 착취, 연금술 시도, 비밀 결사 단체인 프리메이슨 회원이라는 점 등이었다. 카사노바는 후일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나는 타인에게 잘못한 적이 없다. 사회 안정을 위협한 적도 없고 남의 일에 간섭한 일도 없다. 사적인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종교 재판관의 애인과 자주 만났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로부터 1년간 카사노바는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에 있는 피옴비 감옥의 가장 열악한 감방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수감생활을 해야 했다. 감옥의 지붕이 납으로 되어 있어 ‘납 감옥’이라고도 불렸는데 여름엔 더위로, 겨울엔 추위로 고생해야 했다. 특히 감옥의 지붕이 낮아 키가 거의 2미터나 되는 카사노바는 제대로 일어설 수도 없었다.
그가 갇혀 있었던 두칼레 궁전은 산 마르코 광장에 면해 있는 궁전으로 베네치아 공화국 총독의 주거지이자 공화국 정부 건물이다. 9세기에 처음 지어진 후 계속 확장되었는데 679년부터 1797년까지 1,100년 동안 베네치아를 다스린 120명에 이르는 베네치아 총독의 공식적인 주거지였다. 최초의 건물은 마치 요새 같은 고딕 양식의 건물이었지만 현재는 고딕 양식을 잘 나타내면서도 비잔틴,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복합된 모습을 하고 있다. ‘베네치아 고딕’이라고도 불리는데 베네치아 고딕 건물 중에서 조형미가 가장 빼어난 건축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재판을 담당하던 ‘10인 평의회의 방’이다.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유화 중 하나인 틴토레토의 대벽화 〈천〉과 베네치아의 주요 역사를 그린 그림, 76인 총독의 초상화 등이 있다. ‘10인의 평의회의 방’에서 소운하를 사이에 두고 ‘탄식의 다리’라고 불리는 다리를 건너면 감옥이 있는데, 카사노바가 갇혔던 곳이 바로 이 감옥이다. 탄식의 다리는 1600~1603년에 안토니 콘티노(Antoni Contino)의 설계로 만들어졌는데 ‘10인 평의회’에서 형을 받은 죄인은 누구나 이 다리를 지나 감옥으로 연행되었다. 탄식의 다리라고 이름 붙은 까닭은 죄인들이 이 다리의 창을 통해 밖을 보며 다시는 아름다운 베네치아를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탄식하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철장 신세가 된 지상 최대의 바람둥이는 일생의 황금기를 감옥에서 보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다고 공언했지만, 그가 투옥된 감옥은 누구도 탈옥할 수 없다는 악명 높은 피옴비 감옥이었다. 그럼에도 카사노바는 탈출에 성공한다. 탈출 과정은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졌다. 당시 감옥에 갇힌 죄수도 돈을 내면 요리를 주문할 수 있었으나 카사노바에게는 이런 권리조차 박탈되어 있었으므로 교도소장 부인이 만든 마카로니를 먹어야 했다. 그런데 이 마카로니가 피옴비 감옥을 탈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카사노바는 감옥에 갇힌 지 얼마 되지 않아 직접 쇠 지렛대를 제작해 탈출구를 만들었지만 곧바로 발각된다. 카사노바는 작전을 바꾸어 다른 죄수에게 쇠 지렛대를 보내 탈출구를 만들게 했다. 이때 뜨거운 마카로니가 가득 든 접시를 받치는 성경 속에다 탈출 도구를 감추어 간수에게 주자 간수는 의심하지 않고 그 성경을 옆방의 죄수에게 건넸다. 카사노바의 작전은 성공하여 탈출구를 통해 지붕을 타고 내려올 수 있었고, 1756년 다시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다는 탄식의 다리를 건널 수 있었다. 그는 회상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때 나는 아름다운 운하를 바라보았다. 배는 한 척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보낸 잔인한 밤들이 스쳐 지나갔고, 지난날 내게 호의적이었던 많은 행복한 사건들 덕분에 나의 감정이 나의 자애로운 신에 이르는 감사의 소리가 되었다.
피옴비 감옥에서의 탈출은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해낸 바람둥이의 완벽한 ‘쇼생크 탈출’이나 마찬가지였다. 탈출에 성공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이곳에 가둘 때 나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듯이, 나 역시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이곳을 떠나노라.
이 글을 읽으면 그가 얼마나 탁월한 언변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감옥을 탈출한 카사노바는 곧바로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문화와 예술의 도시인 프랑스 파리로 향한다. 1757년에 파리에 도착한 카사노바는 놀랍게도 옛 친구의 소개로 프랑스 재정 전문가로 활동하며 상류사회의 스타로 대접받았다. 이는 카사노바가 무척 인기가 많았다는 뜻도 되지만, 무엇보다 그가 프랑스 정부에 기여한 바가 컸기 때문이다.
당시 파리 시가 재정 문제로 곤란을 겪자 카사노바는 루이 15세에게 복권을 도입하라고 제안했다. 루이 15세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카사노바는 곧바로 복권 사업을 관장하는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로써 루이 15세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복권 제도를 시행한 군주라는 불멸의 명성을 얻는다.
재정전문가로 활약하며 파리에 복권 제도를 도입하여 프랑스에 큰 이득을 남겨준 카사노바에게도 그에 상응하는 반대급부가 주어졌음은 물론이다. 그 자신도 복권 사업소 다섯 곳을 운영하며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남다른 언변과 용모를 갖춘 삼십 대 바람둥이 카사노바에게 경제적인 여유까지 생기자 많은 여성이 그의 품에 안겼음은 물론이다. 거기에 예기치 않은 행운까지 찾아왔다. 프랑스 정부가 천부적인 사교 능력에, 탈옥 능력까지 갖춘 그를 다국적 스파이로 위촉한 것이다. 한마디로 ‘프랑스 비밀 요원’ 즉 007이 된 것으로 그가 공식적으로 여자들을 편력할 수 있는 무기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생각대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첩보 활동을 하면서도 틈틈이 여성을 편력했는데 거기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게다가 사업에는 재주가 없었는지 그가 투자한 실크 프린팅 사업도 실패하고 말았다. 패션 산업계에서는 카사노바를 염직 산업을 부흥시킨 장본인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인력 관리에 허점을 보인 게 결국 사업에 실패한 원인이 되었다.
결국 수많은 사람에게 돈을 빌렸는데, 이를 갚을 수 없게 되자 유용하면서도 단순한 아이디어를 도출한다. 한마디로 줄행랑치는 것이다. 그는 파리를 떠나 프랑스 남부 지방으로 도피 행각을 이어가면서 이때부터 ‘생갈의 기사’라는 가명을 쓴다. 그러나 그의 도피 생활이 마냥 괴로운 것은 아니었다. 계몽사상의 아버지 볼테르를 만나 ‘계몽주의’에 몰두하면서 우정을 쌓을 정도로 식자로서의 대접도 받았다.
1763년 카사노바는 영국을 방문하지만 프랑스에서와는 달리 찬밥 취급 당했다. 영국은 산업혁명을 통해 새로운 산업사회로 나가던 시기였으므로 그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도박판이 없었다. 더구나 그의 여성 편력도 신통치 않아 영국 창녀에게 속아서 가진 돈을 모두 빼앗기고 빈털터리가 된다.
카사노바가 당대에 남다른 여성 편력을 자랑할 수 있었던 건 여자로부터 늘 호평을 받았기 때문인데, 바로 카사노바가 여자들을 임신시키지 않는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카사노바는 평소에 콘돔을 갖고 다니면서 임신과 성병을 예방했다. 이 때문에 실질적으로 효과 있는 최초의 콘돔 고안자로도 알려진다. 그런 천하의 카사노바도 그만 영국에서 악성 성병을 얻어 그의 명성에 다소 흠집을 내고 마는데, 최초의 콘돔 고안자이지만 자신도 지키지 못했다는 아이러니는 계속 그를 따라다닌다.
영국에서 참패를 당한 카사노바는 곧바로 수많은 도시를 여행하기 시작한다. 베를린에서는 계몽사상을 맹신하는 프리드리히 대왕으로부터 사관학교 교사 자리를 제시받기도 한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제안을 거절한 카사노바는 러시아에서 예카테리나 여왕을 만나고 그녀에게 유럽에서 통용되던 그레고리력의 사용을 권했다. 당시 러시아는 11일이나 차이가 나는 율리우스력을 사용하여 정치, 경제, 외교 등 각 분야에서 많은 불편을 겪고 있었지만 러시아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러시아에서의 생활도 러시아 여성들과의 만남 때문에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그의 탁월한 여성 편력에 화가 난 러시아 남자들이 수없이 결투를 신청해왔고 이번에도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줄행랑 뿐이었다. 러시아에서 탈출한 카사노바는 폴란드, 스페인으로 향한다.
스페인에 도착한 카사노바는 이미 나이를 먹은 중년의 사나이가 되어있었다. 이탈리아에서 탈출하여 세계 각지를 돌아다녔지만 그에게도 고향은 중요했다. 귀향할 마음을 굳힌 카사노바는 고향인 이탈리아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탈옥범 신분인 그가 고국에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이탈리아의 종교 재판소와 화해하는 것이었다. 원래 글재주가 있는 카사노바인지라 스페인에서는 주로 베네치아에 부정적인 내용의 책들을 쓰며 비판에 열을 올렸는데 놀랍게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베네치아 고관들의 눈도장을 얻었다.
결론적으로 그의 시도는 성공하여 종교 재판소와 화해를 하고 다시 베네치아로 귀환하였다. 이탈리아에 돌아와 보니 자신도 모르게 태어난 딸도 있었고,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남자들도 있었다. 베네치아 당국이 카사노바에게 면죄부를 준 이유는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인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세상 경험이 많고 외국을 많이 여행한 데다 프랑스 비밀 요원으로도 활약했으므로 종교 재판소의 비밀 첩보원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카사노바에게 비밀 첩보원 일을 맡긴 것이 귀환의 조건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실제로 카사노바는 약 50건에 달하는 밀고서를 작성했다고 알려진다. 그가 그 불순한 보고서에 서명한 이름은 ‘안젤로 프라톨리나’였다.
베네치아에 돌아온 카사노바는 출판업에 열중했다. 베네치아는 출판의 자유를 보장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 금지된 책들을 비교적 자유롭게 출간할 수 있어 출판 시장은 활황을 누리고 있었다. 카사노바는 프랑스 배우들과 연계하여 주간지 『탈리의 메시지』를 창간하는 등 출판업에 매진했다. 또한 프란체스카 부라키니라라는 가난한 처녀와 함께 평범한 가정을 꾸리게 된다. 물론 그의 정적들과 빚쟁이들이 괴롭히긴 했지만 비교적 평온한 생활을 지켜가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그에게 또다시 불행이 찾아온다.
카사노바가 1883년에 쓴 『사랑도 싫고, 여자도 싫다』는 책의 풍자시가 문제가 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친아버지가 당시의 베네치아 귀족인 미켈레 그리마니라고 거짓 주장을 했다. 그가 미켈레 그리마니의 양아들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양아들이 아니라 친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가 이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배경은 카사노바가 제노바의 외교관 카를로 스피놀라의 비서로 활동하고 있었을 때 자신의 담보증서를 보증한 브로커와 알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켈레 그리마니의 아들인 카를로 그리마니가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자 그는 나름대로 통쾌한 복수를 한 것이다. 카사노바는 자신이 미켈레 그리마니의 진짜 사생아이고 카를로 그리마니는 세바스티안 지우스타니의 사생아라고 주장했다.
이 사건은 전적으로 카사노바의 잘못이다. 자신이 적자이고 카를로 그리마니가 다른 사람의 사생아라는 주장은 그야말로 적반하장이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이 그리마니가의 재산을 상속받아야 한다는 의미가 되므로 간단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카사노바의 신상을 잘 알고 있는 베네치아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곧바로 여론을 악화시켜 그를 지지하던 사람들조차 고개를 돌리게 하였다. 그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또다시 줄행랑뿐이었다. 다시금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고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된다.
카사노바의 일생을 보면 남다른 방랑벽이 있어 잠시도 멈추지 않고 유럽을 돌아다녔음을 알 수 있다. 이유야 어떻든 한 장소에 오래 머무르는 일이 거의 없었다. 곳곳에 염문을 뿌리고 다니며 때로는 사회 여러 계층의 여인들과 비교적 지속적이고 깊은 관계를 맺기도 했는데, 카사노바 역시 진지한 사랑을 나눈 경험을 갖고 있다.
그중 하나가 그의 생애를 아름답게 장식해준 프랑스 여성 앙리에트와의 3개월 동안의 동거다. 다른 하나는 수녀 M. M.과의 사랑이었으며, 로마 여성 루크레치아와의 연애도 있다. 루크레치아와의 사이에서는 딸까지 하나 두었는데 이후에 그 딸도 역시 그의 애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카사노바는 때론 자신도 한 여성과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의 행태에 비춰보았을 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한번은 애인 크리스티나와 결혼을 약속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생각해보더니 결국 그녀에게 대리남편을 구해준다. 이런 그의 행동을 놀라워하던 당시의 남성들은 “카사노바에게는 모든 여성이 감사한다”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카사노바가 남다른 명성을 갖게 된 이유다.
여하튼 그의 고향인 베네치아는 카사노바와 거의 운명을 같이 한다. 그가 사망하고 나서 얼마 뒤, 카사노바를 낳은 환락의 자치 도시 베네치아는 멸망한다. 볼테르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민중들이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정부를 세웠고, 새로 정권을 잡은 나폴레옹의 군대가 유럽을 휩쓸며 베네치아 자치 공화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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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슈테판 츠바이크, 나누리 옮김, 『츠바이크가 본 카사노바, 스탕달, 톨스토이』(필맥, 2005).
- ・ 김준목, 『감각의 순례자 카사노바』(시공사, 2002).
- ・ 「카사노바 - 역사적 변화가 낳은 이단아」, http://historia.tistory.com/2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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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세상을 자유롭게 살다 간 카사노바 – 미스터리와 진실, 인물편, 이종호, 북카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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