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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

마르코 폴로는 정말 중국에 갔을까?

문화 인물 미스터리

학자들이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마르코 폴로를 포함한 폴로 일행이 원나라로 들어가는 여행 경로이다.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폴로 가족은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통과하여 카라코람 산맥을 거쳐 카슈가르(원나라의 서쪽 관문)에 도착했다. 가연성 기름을 산출하는 바쿠 지역의 유전을 통과하면서 몽골 유목민들을 만났고 모술을 지나쳤다. 노아의 방주가 있다는 아라라트 산에 대해서 곁가지로 이야기하면서 1년간 앓아누웠으며, 유명한 카슈미르 지방을 통과했다. 원나라의 영토에 들어가서는 쿠빌라이가 그들이 도착한다는 것을 알고 호위병을 보내주어 마지막 40여 일 동안 황제의 빈객으로 여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 마르코 폴로의 설명이다.

크리스티안 후프는 꼼꼼하게 마르코 폴로의 여정을 확인했다. 그런데 카슈가르를 지나 중국으로 들어가려면 당연히 둔황을 거쳐야 하는데, 마르코 폴로가 이 지역을 거론하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했다. 당시 둔황은 서역 북도와 남도의 분기점으로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지였다. 마르코 폴로가 직접 둔황을 방문했다면 이처럼 중요한 지역을 빠뜨렸을 리 없다는 지적이다.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인 카슈가르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여행기를 쓰면서 가장 중요한 지점 특히 무역의 요충지를 제외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크리스티안 후프의 지적에 대한 반론도 있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 제1편 제40장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막을 횡단하는 30일간의 여행이 끝나면 쿠빌라이 황제에게 지배되는 사치우(Sachiu, 혹은 Sachau)라는 도시에 도착한다. 이 지방을 탕구트(Tangut)라고 한다. 주민은 우상숭배자들이며 그밖에 이곳에는 터어코만 부족도 있고 소수이지만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도와 마호메트교도들도 있다. 우상숭배자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국어를 쓰고 있다. 그 탕구트 시는 동북쪽과 동쪽 사이에 있고 주민은 상인이 아니고 농부로 밀을 많이 생산하고 있다. 이곳에는 많은 수도원과 사원이 있는데 모두 여러 가지 우상을 안치하고 있다. 주민들은 이런 우상들을 깊이 존경하는 나머지 희생을 바치며 아들을 낳으면 그 우상 중 한 우상에게 보호를 빈다.

정운용 박사는 사치우 또는 사차우가 사주(沙州)로 지금의 둔황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탕구트는 감숙 지방의 당고특(唐古特)을 뜻하는데 이는 『당서』에서 말하는 당항(黨項)이 와전된 것으로 이곳에는 당시 선비족이 살고 있었으며 우상숭배자란 라마교도들을 의미한다며, 크리스티안 후프가 둔황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설명에 이의를 제기했다. 또한 터어코만 부족이란 ‘Turk’에서 유래한 말로 ‘Turkoman’이란 유목민들이 자기들을 부를 때 쓰는 고유명사이며 그들은 티베트어를 쓴다고 말했다. 더불어 이 지방에서 지금도 실시되고 있는 장례법(화장)에 대해서도 적었음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크리스티안 후프는 밍사 산(鳴沙山)의 동쪽 끝 절벽에서 남북으로 약 1,600미터에 걸쳐 여러 층으로 뚫린 492개(현 중국의 공식적인 발표)에 달하는 굴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특히 당나라 때 만들어진 제158굴(중국에서의 분류), 즉 72개의 자그마한 석상들 사이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16미터 길이의 와불(臥佛)에 대한 기록도 없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마이크 에드워즈는 마르코 폴로가 둔황의 석굴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은 아예 보지 못했던지, 아니면 낯선 종교 예술의 장관에 그만 압도되었기 때문일 거라고 적었다.

중국 간쑤 성 서쪽에 있는 둔황 석굴

수많은 동굴에 갖가지 벽화와 조각이 넘치는 세계적인 불교 유산이다. 둔황 석굴이 있는 둔황은 오아시스 도시이자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잇는 실크로드의 관문으로 동서가 교역하고 문화를 교류하는 거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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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을 혼동케 하는 것은 마르코 폴로가 다음 여행지로 ‘하미 수박’으로 유명한 ‘하미’라는 도시를 언급하는데, 이 도시는 원나라로 들어가는 도중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역 북도에 있는 도시로 훨씬 북쪽에 있다는 사실이다.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에 들어가면서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의아한 이유는 이곳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짧은 길로 가는 것이 정상인데 이 여정은 누가 보아도 비상식적이다. 정운용 박사도 이 지리적 모순에 대해 마르코 폴로의 아버지와 삼촌이 중국으로 1차 여행할 때 통과한 경험담을 듣고 적은 것이라고 설명할 정도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도 마르코 폴로를 두둔하는 설명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마르코 폴로 일행이 무역 상인들을 위한 무역 안내서를 쓰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에서 루스티첼로가 각색한 부분을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그다지 모순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설명이다. 『동방견문록』이 거리와 가격, 음식, 무역물품에 대해 많은 부분을 할애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다소 중요하지 않은 다른 지역은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무역에서 가장 중요한 둔황 같은 지역을 제외했다는 점은 석연치 않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사용된 언어에 대한 지적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가 터키어 · 페르시아어를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막상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청 · 장년기를 중국에서 살았음에도 중국어를 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고 단언한다. 반면에 니콜로와 마페오는 중국어를 잘 숙지하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학자들이 마르코 폴로가 중국어를 몰랐다고 추정하는 이유는 『동방견문록』에서는 60여 군데의 지명이 언급되는데 단 세 곳만이 중국어 지명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이징을 가리키는 ‘칸발리크(Khanbalik)’도 ‘왕이 있는 도시’라는 터키어에서 나온 이름이다. 마르코 폴로가 정말로 자신이 거론한 도시들을 여행했다면 그 지역의 사람들을 많이 만났을 것이며, 적어도 지명 정도는 정확하게 거론했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마르코 폴로가 자신 이전에 몽골을 여행한 터키인이나 페르시아인의 여행기를 차용하여 마치 자신이 직접 여행한 것처럼 꾸몄음이 틀림없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다.

‘마르코 폴로 다리’로 널리 알려진 베이징 근교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 대해서서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홍예문이 24개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칸발리크 시를 떠나 10마일쯤 가면 풀리산간 강이 있는데 이 강은 큰 바다로 몰이 흘러들어가는 강으로 물건을 가득 실은 배가 많다. 이 강에는 아마도 세계에 비할 바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아주 인상적인 돌다리(노구교)가 있다. 그 길이는 300보, 넓이가 800보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기사 10인이 달려도 불편하지 않다. 교묘하게 세운 교각 스물다섯 개 위에 대리석 아치 스물네 개가 서 있다. 다리 양편에는 끝에서 끝까지 대리석의 석판과 석주를 교묘하게 배열한 아름다운 난간이 있다.

마르코 폴로는 루거우차오에 홍예문이 스물네 개 있다고 적었지만, 실제로 루거우차오에는 아치가 열한 개밖에 없다. 학자들은 아치 열한 개를 스물네 개로 적은 것으로 보아 이 다리도 보지 않았을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베이징 교외에 있는 루거우차오는 마르코 폴로가 서양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소개하면서 유명해져 ‘마르코 폴로 다리’라고도 한다. 한편 이 다리는 1937년에 일어난 중일전쟁의 시발점(노구교 사건)이 된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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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고 하면서도 정작 중국인의 가장 기본적인 풍습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점도 의심을 받는다. 우선 중국 차와 찻집에 관한 이야기가 전혀 없다. 이미 한 왕조 때부터 중국인들은 차를 마셨다. 8세기부터 차는 북중국에서 중요한 관심사였고 마르코 폴로의 시대에는 중국 전체에서 즐기는 일상음료였다. 그런데 마르코 폴로가 상세하게 묘사한 항저우(송나라의 수도)는 지금도 녹차로 유명한 도시인데 이런 풍물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다.

남송 시대의 수도였던 항저우

쑤저우와 함께 중국에서도 아름다운 고장으로 손꼽히며 운하와 호수가 많다. 10세기 이후에는 외국 선박도 출입이 잦아져 원나라 때는 마르코 폴로, 이븐 바투타 등이 방문해 ‘킨자이(Khinzai)’, ‘칸자이(Khanzai)’ 등의 이름으로 유럽에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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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에 대한 설명도 전혀 없다. 현재도 서양인들은 동양인들이 젓가락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생각하는데, 13세기 유럽인으로서 신기하게 여기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뿐이 아니다. 당시의 유럽인들이 가장 이상하게 여겼을 중국 여자들의 전족에 대한 설명도 없다. 여자들의 발을 고의적으로 작게 만드는 전족은 유럽인들에게 그야말로 비정상적인 풍습으로 보이는 것이 정상이다. 결국 마르코 폴로는 중국인들의 기초적인 풍습을 알지 못했다는 뜻으로 이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여행하지 않았음이 틀림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마르코 폴로의 무기 개발 이야기도 신빙성이 가지 않는다. 당시 몽골 대군 은 양양성을 포위하고 공격에 나섰지만 강렬한 저항에 부딪혀 공략이 답보 상태였다. 이때 마르코 폴로가 큰 돌을 발사할 수 있는 엄청난 위력의 무기를 개발했고, 몽골군은 폴로의 설계도를 받아들여 양양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신무기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마르코 폴로가 아니라 한 회교도이다. 이 포를 ‘회회포(回回砲)’로 명명한 이유다. 게다가 몽골군이 양양성을 공격했던 시기는 1273년 1월과 2월 사이인데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도착했다는 시기는 1275년이다. 그가 중국에 오기 훨씬 이전에 벌어졌던 전쟁에 대해 자신의 공로처럼 이야기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마르코 폴로와 아버지, 숙부의 여행길

점선은 아버지와 숙부가 중국으로 떠났던 길이고, 실선은 마르코 폴로가 함께 중국으로 갔다가 이후 혼자 중국 일대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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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중국학자인 헤르베르트 프랑케는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의심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동방견문록』의 여러 부분이 마르코 폴로가 경험하지 않은 내용을 전한 것이라고 단언했다. 또한 마르코 폴로가 말하는 내용 중 대부분이 페르시아 원전에서 유래했다고 지적했다.

마르코 폴로는 당대의 강국인 원나라의 궁에서 황제인 쿠빌라이를 직접 만났고 17년 동안 황제의 신하로 지방관 벼슬을 했다고 적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문자 체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책에 원나라에서 고위직급인 지방관으로 봉직했다고 자랑스럽게 적었다.

양주(楊洲)는 관할 하에 읍이 스물네 개 있는 대도시인데 이 도시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들로 상업과 수공업으로 생활하고 있다. 무기와 군 장비를 많이 만들기 때문에 이 지방에는 많은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 양주는 황제가 임명한 귀족 12인 중의 한 사람이 황제의 명을 받아 머물며 지방행정을 맡아보고 있는데 마르코 폴로도 그중 한 사람이다. 황제의 특명으로 3년간 이 도시의 행정관으로 일한 바 있다.
중국(원나라)에서 지방관으로 일했다는 마르코 폴로의 모습을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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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대로 행정관(총관)으로 일했다면 적어도 그에게 주어진 서류를 검토하거나 결제했음이 틀림없다. 그런데 그가 가장 자랑스러워해야 할 지방관의 역할에 대해 아무런 이야기도 없다. 이것은 그가 지방관으로 근무한 적이 없었다는 설에 힘을 실어준다.

게다가 당시 마르코 폴로의 나이는 스물넷에 불과하고 중국에 온 지 겨우 2년 만이다. 더구나 원나라는 타민족을 관직에 임명할 때 관직을 매우 세분해서 차등을 두고 엄격히 관리했다. 당시 양주는 매우 비중 있는 도시이므로 총관은 상당한 고위 요직에 속했는데 이런 그에게 이처럼 중대한 요직을 맡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물론 일부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가 중국인 통치자들의 명단에 들어가 있지 않은 사실을 근거로 그의 직책이 매우 낮았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봉직 기간이 3년이나 됨에도 다른 도시보다도 짧게 기록한 점을 볼 때 그가 매우 비인격적인 생활을 했거나 그 당시의 일을 거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두둔한다.

이 설명에도 문제는 있다. 마르코 폴로가 금패를 갖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원나라의 금패는 보통 사람이 소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조선 시대에도 마패에 그려져 있는 말의 숫자에 따라 어느 곳에서든 말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원나라 제국의 금패는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위세를 가진 물건이다. 금패를 가진 사람의 공식적인 활동이 전혀 없다는 점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마르코 폴로가 중국 행정을 전혀 몰랐다는 지적은 사실로 보인다. 자신이 결재했을 문서가 중국어로 되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그가 중국에서 관리로 활동했다는 이야기는 과장된 설명이라는 것이다.

쿠빌라이칸이 마르코 폴로에게 보물을 주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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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에 대해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는 중국학자 프랜시스 우드는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의 궁전은커녕 중국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고 확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마르코 폴로가 그때 중국에 있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는 가족의 해외무역 거점과 크림 반도, 콘스탄티노플과 베네치아 사이를 다니며 무역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정도 범위를 넘어서서 여행했다고는 믿지 않지요. 여행 중에 그는 몽골의 역사를 알려주는 페르시아 원전을 쉽게 접했을 것이며 무수한 정보가 들어 있는 상인들의 많은 필사본을 보았음이 틀림없습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을 방문조차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지적을 보면 과연 현재 세상에 알려진 내용 중 몇 퍼센트가 진실한 것인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일부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나 루스티첼로가 도용했을지도 모르는 아랍인이나 페르시아인들의 원전도 언젠가 발견될지 모른다고 추정한다.

그럼에도 학자들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의 가치를 높게 평가한다. 마르코 폴로의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반한 콜럼버스는 황금 건물이 있다는 지팡구(황금 건물은 한국의 기둥과 단청 등을 의미한다는 것이 정설)를 찾아 나섰고 결국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신천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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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마르코 폴로, 정운용 옮김, 『동방견문록』(을유문화사, 1974).
  • ・ 시앙스신, 임지영 옮김, 『세계 역사 속의 49가지 미스터리』(집사재, 2009).
  • ・ 마이크 에드워즈, 「마르코 폴로의 대여정」, 『내셔널지오그래픽』, 2001년 5월호.
  • ・ 한스 크리스티안 후프, 이민수 옮김, 『역사의 비밀 2』(오늘의책, 2004).

이종호 집필자 소개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페르피냥 대학교에서 공학박사 학위(Dr. Ing.)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Dr. d..펼쳐보기

출처

미스터리와 진실, 인물편
미스터리와 진실, 인물편 | 저자이종호 | cp명북카라반 도서 소개

람세스에서 메릴린 먼로까지 역사 인물에 얽힌 세계 미스터리의 진실과 거짓을 밝힌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정보에 입각하여 동서양을 넘나들며 신과 인류가 남기고 간 수많은..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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