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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경제적·사회적 배경
1494년에 프랑스의 샤를 8세는 나폴리를 복속시키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갔다(이탈리아 전쟁).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략으로 유럽 정치에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이때부터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와 독일의 합스부르크 왕조는 서로 앙숙이 되었고 이탈리아 국가들은 본의 아니게 그들의 앞잡이가 되었다. 프랑스의 침략은 이탈리아 정치의 자치권을 파괴한 동시에 이탈리아 국가 체제를 무너뜨렸고 이탈리아는 이제 새로 등장한 유럽 체제로 흡수되었다. 이탈리아 국가 체제보다 더 규모가 큰 유럽 정치체제의 구성원들은 이탈리아인들이 처음 개발한 세력균형 외교정책을 채택했다.
유럽에서는 이제 절대권력을 요구하는 중앙집권화한 군주제가 발달하고 있었다.
15세기말에 프랑스 발루아 왕조의 왕들이 칼레를 제외한 모든 프랑스 영토에서 잉글랜드인들을 쫓아내어 백년전쟁을 끝냈고(1453), 비옥한 부르고뉴 공작령과 브르타뉴 지방을 병합해 프랑스 왕국의 영토를 대서양과 영국 해협에서 피레네 산맥과 라인 강까지 넓혔다. 이 방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그들은 전문적인 국가 기구를 창설하고, 전시에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특권을 왕의 항구적인 특권으로 전환하며, 왕실회의를 삼부회의 감독에서 벗어나게 하고, 수많은 관리를 임명하고, 프랑스 성직자들에 대한 임명권과 과세권을 확립했다.
중앙집권화한 스페인 군주국도 이와 마찬가지로 절대권력을 주장했다. 스페인 제국이 창설된 것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이 2개의 거대한 스페인 왕국을 통합해 하나의 왕조로 만든 14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 스페인인들은 나바라 왕국을 차지하고, 스페인에 남아 있던 이슬람교도의 마지막 거점인 그라나다 왕국을 공격했으며, 종교통일전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또한 콜럼버스를 항해에 내보내 서반구를 발견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스페인 왕은 중혼(重婚)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조와 자신의 운명을 하나로 묶었다. 이로써 스페인은 유럽 정치의 중앙 무대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후 수십 년 동안, 스페인의 무어인 박멸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후손인 카스티야의 하급귀족들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식민지를 건설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의 군대에 참여해 진군을 계속했다. 카를로스 1세는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되어 카를 5세가 되었고, 그리하여 스페인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이라는 2개의 거대한 상속재산을 하나로 통합했다.
페르난도와 이사벨의 외손자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친손자인 카를로스는 부르고뉴 공작이자 오스트리아의 5개 공작령의 지배자이며 나폴리와 시칠리아 및 사르데냐 왕이었고, 밀라노 공작령만이 아니라 아라곤과 카스티야의 왕 및 독일 왕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자리도 요구할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해외 정복은 막대한 보물을 가져다 주었다.
왕은 그 보물 가운데 가장 좋은 몫을 차지했지만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아야 했다. 카를로스는 이탈리아와 부르고뉴에서 프랑스군과 싸우고, 독일에서는 프로테스탄트 군주들과 싸우며, 오스트리아 접경지방에서 투르크족과 싸우고, 지중해의 바르바리 해적들과 싸우느라 세금을 부과하거나 빚을 얻어 모은 자금을 모조리 탕진했기 때문이다. 1555년까지 빚을 다 갚았지만 그 자신의 기력도 완전히 바닥이 났다. 그는 자신이 가진 칭호들을 양도하기 시작하여,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아들 펠리페에게, 독일과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칭호는 동생 페르난도 1세에게 양도했다.
국민에 대한 절대권력을 주장하는 중앙집권화한 군주제의 발달은 헨리 8세 시대의 잉글랜드나 이반 3세 시대의 모스크바 대공국 같은 다른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새로운 군주국은 좀더 일반적인 현상(15세기에 유럽 전역을 거대한 물결처럼 휩쓴 회복)의 한 측면이었다. 이 회복은 자연스러운 발전 주기가 상승세로 돌아선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중세의 급격한 인구 증가는 유럽의 생산 능력을 지나치게 확대했다. 14세기와 15세기초의 불경기는 인구를 격감시킨 기아와 전염병을 통해 이런 현상을 억제시켰으나 이제 발전 주기는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고 있었다.
늘어나는 인구, 급성장하는 도시들, 그리고 야심만만한 정부는 다시 식량과 상품 및 서비스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 요구는 구식과 신식 생산수단으로 충족되었다. 농업에서는 농작물이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환금작물로 바뀌고, 노예 상태의 노동력이 해방되었으며, 자본 투자가 이루어졌다. 그결과 이미 쇠퇴기에 접어든 장원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그러나 동유럽에서는 점점 커지는 서유럽 시장에 공급할 곡물을 재배하기 위해 거대한 농장이 조성되었고 그에 따라 이전에 존재하던 자유농민은 이제 강제로 농노의 처지가 되었다. 제조업, 특히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산업이 급속히 발전했다.
새로운 채광기술과 금속 세공술 덕분에 독일 중부와 헝가리 및 오스트리아의 풍부한 광산을 개발하여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었고, 이것은 다시 대규모 투자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북유럽 인문주의
15세기 후반에 도시가 다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르네상스의 가치관도 널리 퍼졌다.
인문주의로 인해 언어학과 수사법이 발달했다. 이 2가지는 출세를 원하는 평민과 귀족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재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인문교육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대부분 이탈리아로 갔다. 그러나 15세기말에 이르자 런던과 파리 및 안트웨르펜과 아우크스부르크 같은 북유럽 도시가 인문주의 활동의 중심지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인쇄술의 발달은 책을 더 값싸고 풍부하게 해줌으로써 인문주의의 확산을 촉진시켰다.
북유럽에서 전개된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의 기본 개념은 그리스도교도다운 생활이야말로 인문주의 자체의 수사학적·역사적·윤리적 기초를 가르치는 예비교육이라는 것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그리스도교 복음을 신앙의 중심으로 회복하는 것이 보통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더 잘 충족시키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형식에 치우친 신학이 소박한 신앙을 무미건조하게 지적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종교가 성직자를 통해 대행하는 하나의 의식이 되어가고 있는 경향을 개탄했다. 그리스도교 인문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 원칙은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사랑의 계율이었다. 이런 관점을 대변한 대표적인 인물은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문주의자였던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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