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다음백과

유럽 산업국가의 등장

다른 표기 언어

정치적 유형

1850~70년의 20년 동안은 유럽 정치의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에는 반동적 추진력이 표면화되었다. 프로이센에는 보수당이 등장해 더이상의 변화에 반대하는 노선을 고수하고자 했다. 많은 정부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새로운 협정을 맺고, 정치적 공격에 맞서도록 교회를 부추겼다. 그러나 많은 보수적 지도자들은 혁명에 대한 승리를 기존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개혁을 일으킬 수 있는 기회로 생각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실리주의적 경향도 이들을 도와주었다.

대다수의 자유주의자들은 혁명이 아니라 타협이 개혁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다.

영국 하원의 보수당 지도자인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1867년에 대다수의 도시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새로운 선거법 개정안을 지지했다.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1850년대에는 권위주의 체제를 고집했지만, 그후에는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유지하면서 기간산업의 발전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쇠퇴한 장원제도를 대체하기 위해 주로 독일식 효율적 관료체제를 촉진했으며, 1860년대에는 민족주의 운동과 화해하려고 애썼다.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

영국의 정치가, 작가

ⓒ wikipedia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867년의 '대타협'(Ausgleich)에서 헝가리는 상당한 자치권을 인정받았고, 투표권은 제한되어 있었지만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에 각각 의회가 따로 창설되었다. 그결과 슬라브 민족주의자들을 격분시켰지만, 이것은 제국의 권력이 약해지는 것을 미리 막기 위해 합스부르크 왕가가 과거의 정책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조짐이었다.

그러나 역동적 보수주의의 주요중심지는 이탈리아와 독일이었다. 이탈리아의 피에몬테에서는 1850년대초에 카밀로 디 카보우르 총리가 자유주의자들을 회유해 이탈리아의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려고 애썼다(리소르지멘토). 그는 일련의 외교적 술책을 이용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에 맞섰으며, 1858~59년의 전쟁으로 오스트리아를 롬바르디아에서 몰아냈다.

이어서 이탈리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민족주의 봉기가 일어났다. 카보우르는 이런 봉기들을 하나로 규합해 피에몬테 왕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이탈리아 국가를 세울 수 있었다. 이 새로운 왕국에는 의회가 있었고, 의회에서는 자유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가 합세해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력을 맹렬히 규탄했다.

프로이센 총리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이탈리아의 선례에서 영감을 얻어 정치개혁운동과 민족주의 강화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프로이센의 정치가, 독일 제국의 건설자, 초대 총리

ⓒ Bundesarchiv/wikipedia | CC BY-SA 3.0

그의 목적은 프로이센의 깃발 아래 독일을 통일하고 정치적 불안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몇 차례 거듭된 전쟁을 통해 덴마크를 무찔렀고, 독일어 사용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다. 이어서 그는 프로이센의 주요경쟁국인 오스트리아에도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프로이센이 지배하는 북독일연방이 결성되었다.

1870~71년에 벌어진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마지막 전쟁도 역시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 승리로 프로이센은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전리품으로 얻었고, 남부 독일의 여러 국가는 프로이센 통치자를 황제로 하는 하나의 독일제국을 건설하기로 동의했다. 이 새로운 국가에는 의회가 있었는데, 하원은 모든 성인 남자에게 투표권을 주는 보통선거제도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프로이센이 지배하는 상원은 계급선거제도를 채택해 상류층에 가장 많은 권력을 보장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Franco-Prussian War)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당시 모습들을 표현한 그림.

ⓒ wikipedia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언론과 출판의 자유는 확대되었고 종교의 자유도 유대인에게까지 확대되었지만, 정부에 반대하는 정치 집단에 대해서는 정부가 주기적으로 개입했다.

프랑스에서는 1870년대에 프로이센과는 약간 다른 형태의 타협정치가 등장했다. 나폴레옹 3세의 제국은 프로이센에 패배한 결과 무너졌다. 급진적 봉기인 파리코뮌이 1871년에 실패로 끝난 뒤 다양한 정치세력이 권력 투쟁을 전개했다. 이 싸움에서 결국 보수주의적 공화파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들은 선거 결과 의회에서 다수파가 되어 제3공화국을 선포했다. 제3공화국은 분명 자유주의 정권이었으며, 장관 교체가 잦은 가운데 의회가 행정부의 각 부문을 지배했다. 언론과 출판 및 결사의 자유는 광범위하게 보장되었고 정부는 교회의 권력을 공격했다. 그와 동시에 유력한 자유주의자들은 중대한 사회 변화를 피하기로 약속했다. 제3공화국의 등장으로 서유럽의 헌법 체계는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대체로 확정되었다. 모든 주요국가들(스페인은 제외)은 의회와 다당제를 갖게 되었고, 대부분의 국가는 모든 성인 남자에게 투표권을 부여했다.

유럽의 정치권에서 가장 두드러진 혁신은 사회주의자 정당이 출현한 것이었다. 사회주의자 정당은 주로 노동자 계급의 지지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시골 주민과 중산층에서도 지지를 받았다. 1860, 1870년대에 창설된 사회주의 정당은 대부분 마르크스한테서 영감을 얻었다. 이들은 혁명을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사회주의 활동의 목적은 국가를 장악해 프롤레타리아 지배를 확립하고 인민을 착취하는 자본가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대부분의 사회주의 정당이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약화시키고 정치적 과정을 통해 활동했다.

1880년대 독일 사회주의 정당은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 법률을 무릅쓰고 자유주의 운동을 벌여 노동자 계급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독일 사회민주당). 1913년에 이르자 독일 사회당은 단일 집단으로는 독일에서 가장 큰 정치 세력이 되어 있었다. 오스트리아와 스칸디나비아 및 북해 연안의 저지대에서도 사회주의 정당은 비슷한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들은 약간 뒤늦게 정당을 결성했지만 여기서도 역시 사회주의는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

복잡한 외교관계

1870, 1880년대에 유럽은 비교적 조용했다.

비스마르크는 공언하기를, 새로운 독일의 관심사는 유럽을 현상유지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그의 가장 명백한 적(敵)은 최근에 그에게 패배한 프랑스였다. 그는 프랑스의 원한을 무력화하기 위해 그물처럼 얽힌 외교망을 구성했다. 그는 합스부르크 정권을 회유했고, 그결과 독일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두 황제는 협정을 맺었다. 1882년에 그는 이탈리아를 이 협정에 끌어들여 어느 한 나라가 공격을 받을 경우 서로 원조한다는 상호방위협정을 바탕으로 한 3국동맹을 완성했다.

비스마르크는 또한 러시아와도 별도의 협정을 맺었다.

유럽을 안정시키려는 비스마르크의 계획은 중대한 도전에 부딪혔다.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발칸 반도에서 반란이 일어나,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불안정하여 폭발 직전의 화약고 같은 이 지역으로 관심이 쏠렸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의 실제 지배력은 꾸준히 약해지고 있었고, 민족주의적 열정이 수많은 민족 집단의 기운을 북돋워주고 있었다.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는 반란을 일으켜 19세기초에 부분적으로 독립을 쟁취했고, 그리스는 완전한 국가의 지위를 얻었다. 1870년대에는 여러 지역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세르비아와 또다른 약소국가인 몬테네그로는 오스만 제국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러시아는 슬라브족 '동포'를 보호하고 새로운 영토를 얻기 위해 이 전쟁에 가담했다. 이들이 손쉽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넓은 영토를 가진 새로운 불가리아 국가가 선포되었으며, 러시아는 흑해 연안에 새로운 영토를 얻었다.

이 시점에서 발칸 지역의 안정에 관심을 갖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영국이 개입했다. 평화를 갈망하는 비스마르크는 만족스러운 타협에 도달하기 위해 베를린 회의를 소집했다. 회의 결과 불가리아의 영토는 약간 줄어들었고, 세르비아·몬테네그로·루마니아는 완전히 독립을 얻었으며,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족의 영토인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관리하게 되었다. 영국은 키프로스 섬을 얻었고, 프랑스는 튀니지를 접수하라는 부추김을 받았다.

베를린 회의(Congress of Berlin)

1878년, 유럽의 열강들이 베를린에서 개최했던 국제회의

ⓒ wikipedia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식민지 쟁탈전

베를린 회의와 민족주의적 열망이 낳은 가장 명백한 결과는 식민지 쟁탈전이었다(식민주의). 아시아 지역은 1880~1900년에 대부분 분할되었고, 영국은 미얀마를 지배했다.

유럽 열강들은 중국의 허약함을 이용해 항구도시와 그 주변지역에 대한 조차권(租借權)을 얻었고, 1899~1900년 서양의 침탈에 항거해 일어난 중국 의화단(義和團) 사건을 쉽게 진압했다. 독일은 오스만 제국에서 새로운 고문 역할과 투자권을 얻었다. 영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세력을 나누어가졌다. 아프리카 분할은 훨씬 더 복잡했다. 포르투갈은 앙골라와 모잠비크에 대한 지배권을 확대했다. 벨기에는 콩고를 점령했고, 독일은 아프리카 남부에 새로운 식민지를 얻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서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영토를 얻었으며, 영국은 동아프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프랑스의 모로코 점령과 이탈리아의 트리폴리 정복으로 아프리카 분할은 마무리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외교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를 권좌에서 몰아내자, 이 정치가가 이룩한 복잡한 동맹 체계도 1890년대에 차례로 해체되었다.

독일러시아와 맺었던 동맹을 갱신하지 않았고 독일을 두려워한 러시아와 프랑스는 1890년대에 동맹을 맺었다. 1904년에 영국도 독일의 세력을 경계해 프랑스와 화친협약을 맺었다. 1907년에 러시아는 이 협약에 가담했다.

이리하여 유럽은 두 동맹체계로 분할되었다. 남슬라브 민족주의에 타격을 주려고 안달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08년에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했다. 이 조치는 러시아와 세르비아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1912년에 러시아는 발칸 반도의 몇몇 나라가 마케도니아를 얻기 위해 발칸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을 다시 공격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이 제1차 발칸 전쟁에서는 발칸 국가들이 이겼지만, 이들은 1913년에 제2차 발칸 전쟁을 일으켜 동맹국끼리 서로 싸웠다.

동맹국 가운데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직접 도전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발칸 지역은 더욱 큰 괴로움을 겪었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의 위협을 분쇄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는 세르비아를 버리기를 거부했고, 프랑스는 러시아와 맺은 동맹을 준수했다. 영국이 주도한 최후협상은 실패로 끝났다.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공격한 뒤, 러시아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러시아의 굼뜬 움직임을 이용해 서부 전선에서 전격적인 기습공격을 단행했다. 독일은 곧바로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한 뒤 곧장 프랑스 북부지역으로 쳐들어갔다. 영국은 벨기에 수호조약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 8월 4일 싸움에 가담했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출처

다음백과
다음백과 | cp명Daum 전체항목 도서 소개

다양한 분야의 전문 필진으로 구성. 시의성 이슈에 대한 쉽고 정확한 지식정보를 전달합니다.

TOP으로 이동


[Daum백과] 유럽 산업국가의 등장다음백과, Daum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