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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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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수많은 행동주의 조직이 대규모 유럽 회의를 열었다. 그러자 유럽의 각국 정부들도 여기에 호응해 1949년 5월 각료위원회와 자문회의로 이루어진 유럽 회의를 창설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자고 제창한 사람은 프랑스의 장 모네였다. 모네는 서독을 포함한 서유럽의 석탄 및 강철 생산을 공동으로 관리하자고 제안했다. 루르 지방을 관리하는 국제기구는 유독 서독에만 심한 통제를 강요하고 있었는데, 이것을 좀더 가볍고 공평한 규제로 바꾸어 공통된 규칙에 따라 공동으로 석탄과 강철을 생산하고 이용하자는 것이 모네의 제안이었다. 이것은 1950년에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이 기초한 슈만 계획의 요체였다. 처음에는 6개국밖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슈만 계획은 유럽 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창설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국제기구는 1952년에 활동을 시작했다.

모네와 슈만은 이것이 유럽 연방으로 가는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모네는 다시 유럽 방위공동체를 제안했다. 이것이 끝내 실패로 끝나자, 그는 다시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이 제안은 1958년에 유럽 경제공동체(EEC)와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비슷한 조직인 유럽 원자력공동체(Euratom)로 결실을 맺었다. 이 세 기구는 1967년에 통합되어 유럽 공동체(EC)가 되었다.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각료회의와 정책을 제안하는 위원회 및 유럽 의회와 법원을 갖춘 유럽 공동체는 경제 및 사회 문제에만 제한된 초기 단계의 연방헌법을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서독, 이탈리아, 베넬룩스 3국을 창설 회원국으로 한 유럽 공동체는 그후 새로운 회원국을 받아들였지만 동유럽 국가에 회원 가입 자격을 줄 것인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았다. 유럽 공동체의 기본적 관세동맹은 1992년말까지 유럽을 하나의 '단일시장'으로 만들어 비관세 장벽을 제거하는 것인데, 1983년 1월부터 상당부분의 물품에 대하여 비관세가 이미 실시되었다.

유럽 공동체는 여기에 가입하지 않은 유럽 국가들이 따로 창설한 유럽 자유무역연합 회원국들(오스트리아·노르웨이·스위스·스웨덴·리히텐슈타인·핀란드·아이슬란드, 이 중 오스트리아·핀란드·스웨덴은 1995년 탈퇴)과 제휴 협정을 맺었다. 유럽 공동체는 나아가 경제 및 화폐통합을 모색했다. 1995년 12월 15일 스페인의 마드리드에서 각국 정상회의를 열어 단일통화의 이름을 '유로'(Euro)로 결정하고, 1998년초에 통화동맹 가입 희망국들의 가입자격을 심사한 후 1999년 1월 1일 유럽 11개국이 참여한 유로를 출범시켰다. 유로는 명목화폐 기능을 수행하다가 2002년 3월부터 각국의 화폐를 대체하게 되었다.

한편 경제 분야뿐만 아니라 정치·외교 분야에서도 통합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1993년 효력을 발휘한 마스트리히트 조약과 1999년 발효한 암스테르담 조약은 유럽 공동체에게 정치와 외교 분야에서 공동체 정책을 실시할 권한을 주었다. 특히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경제 분야 통합에 주력한 유럽 공동체를 토대로 유럽 연합(European Union/EU)이 출범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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