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경제와 사회
중세가 지나자 유럽 인구는 되풀이해 발생한 전염병과 잦은 기근, 끊임없는 전쟁과 사회적 긴장으로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인구 감소로 말미암아 남아 있는 노동자들은 더 높은 '희소가치'를 지녔기 때문에 도시 임금은 올라가고 농촌의 소작료는 내려갔다. 이와는 반대로 땅값과 자본 비용은 내려갔다. 사람이 줄어들수록 땅과 자본은 상대적으로 더 풍부하고 값이 싸졌기 때문이다. 노동력이 비싸지고 땅과 자본이 싸지자 땅과 자본이 노동을 대신하게 되었다.
자본은 새로운 연장을 개발하는 데 필요한 과학기술을 뒷받침할 수 있었고 덕분에 노동자들은 더욱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중세 말기는 노동절약장치에 대한 많은 자본 투자와 연계되어 과학기술이 크게 발전한 시기였다. 사회 변화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인구가 줄어들자 기본 식료품 가격이 내려갔다. 식료품이 싸지자 농촌과 도시인들은 더 많은 소득을 위해 식품의 질을 개선하고 다양화했다. 그들은 또한 도회지에서 만드는 공산품을 더 많이 사들여 도시 경제에 도움을 줄 수 있었다.
경제사가들은 예로부터 기본 식료품(곡물) 가격이 내려가고 공산품 가격이 지속적으로 안정되는 것을 벌어진 가위의 양날로 간주했다. 이리하여 소득은 농촌에서 도시로 옮겨갔다. 중세의 마지막 가격 변동은 농민보다 도시의 장인들에게 더 유리했고 지주보다는 도시의 상인들에게 더 유리했다. 이 변화는 땅을 가지고 있는 귀족의 지도력을 약화시킨 반면 도시의 상인 및 금융업자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강화했다. 유럽 대륙 내부의 상품 거래가 늘어난 결과 적어도 몇몇 상품을 거래하기 위한 대규모 통합 시장이 형성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유럽의 여러 지역에서 서로 차이를 보이던 밀값은 평준화되었고, 모든 지역의 물가가 같은 방향으로 변동하는 경향을 보였다(곡류). 넓은 지역에서 비슷한 물가 동향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의 통합된 곡물시장이 출현한 것을 나타낸다.
일부 지역은 전문적으로 밀을 생산해 멀리 떨어져 있는 소비자들에게 그 수확물을 팔게 되었다. 특히 발트 해 연안지방은 서유럽에 곡물을 공급하는 본격적인 곡물공급지가 되었다.
16세기에 물가 수준의 변화는 모든 경제분야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에는 예로부터 '가격혁명'이라고 부르는 전반적인 물가 폭등이 일어났다(인플레이션).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화폐 가치의 잦은 하락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아마 새로운 귀금속, 특히 은이 통화 공급에 혼합되어 통화가 팽창했기 때문일 것이다. 1550년부터 '아메리카의 보물'인 은이 스페인에 대량으로 흘러들어왔고, 이것은 다시 유럽의 여러 지역으로 유입되었다. 그와 동시에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할 인구가 늘어나자 화폐가 빠른 속도로 유통되기 시작했다. 화폐론에 따르면, 물가 수준은 통화량과 그 유통 속도에 직접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새로운 자원인 은과 새로 늘어난 인구는 광범위한 물가 폭등을 일으켰다(또는 적어도 그 경향을 강화했음). 16세기의 인구증가와 도시집중은 풍부한 식량공급을 요구했으며 16세기 전반에 걸쳐 밀값은 꾸준히 올라갔다. 식량, 특히 밀값을 치르기 위해 화폐는 다시 도시에서 농촌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올라가는 밀값이 유럽 사회에 미친 영향은 지역에 따라 다양했다.
동유럽의 일부 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중대한 변화는 새로운 대토지 소유 형태인 '구츠헤어샤프트'(영주농장제)의 형성이었다.
영지는 2개의 주요부분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영주직영지로서 영주는 이 땅에서 나는 수확물을 모조리 차지했다. 또 하나는 농민들의 농토로서 이 농민들은 영주직영지를 경작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제공했다. 농민들은 법률적으로는 영지에 묶여 있는 농노였고, 이 영지에서는 주로 시장에 내다 팔 작물을 생산했다.
당시 서유럽의 독특한 대토지 소유권 형태는 소작료를 받는 사유지의 집합인 '그룬트헤어샤프트'(장원영주제)였다. 영주는 직접 땅을 경작할 수도 있었지만 고용한 노동자들을 통해 땅을 경작했다. 16세기에는 봉건제도가 자본주의적 임대차 제도로 바뀌었다. 소작인이 지주에게 치러야 할 노동력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땅에 매겨지는 사용료는 오래 지속되었지만 액수를 인상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지주는 봉건적 토지 보유를 임대차에 따른 토지 보유로 바꾸는 것이 이익이었고 여기에는 자본이 필요했다.
잉글랜드에서는 이전의 장원에서 장기 임대차 계약을 맺고 땅을 보유하는 농민들이 등본 보유권자, 즉 봉건적 의무만을 짊어지는 잠정적 부동산권 보유자를 차츰 대신하게 되었다(영국사). 이런 농민들이 잉글랜드의 자유농민을 이루었고 이들의 출현은 중세 농노제도의 마지막 흔적마저 사라졌음을 나타낸다.
농촌에서는 그밖에도 주목할 만한 2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몰수당한 교회 재산이 토지시장에 나온 것은 자본의 농촌 유입(그리고 자본주의적 형태를 가진 농민 조직의 농촌 확산)을 촉진한 것이 거의 분명하다. 둘째, 양모가격은 상승세를 타고 있었고 동유럽에서 값싼 밀이 들어온 결과 경작지는 계속 목장으로 바뀌었다. 이런 추세는 중세에 이미 시작되었다. 영국에서는 이런 동향을 '인클로저'라고 부른다.
중세의 전형적인 마을 농민들은 울타리를 치지 않은 경작지를 보유했고, 마을 공유지에 정해진 수의 가축을 방목하는 권리도 있었다. 인클로저는 조각난 경작지를 하나로 묶어 울타리를 친 농장으로 만들고, 마을 공유지를 주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의미했다. 가난한 마을 사람은 경작할 수도 없을 만큼 작은 땅밖에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가 받은 몫을 부유한 이웃에게 팔고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6세기에 출현한 이른바 '원시 산업화'(Protoindustrialization)는 원래 농촌의 가내공업을 가리키는 용어였다.
농촌 주민들은 도시동업조합의 반대를 무릅쓰고 많은 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농민들은 1년 내내 농업 노동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농한기에는 양털을 자아 털실을 만드는 따위의 일에 종사했다. 원시 산업화는 사회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도시 주민들에게 궁극적인 산업화에 대한 준비를 시켰다. 16세기에는 산업이 농촌지역까지 확대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와 농촌이 지역경제라는 테두리 안에서 더 많이 통합된 것도 산업화의 주요성과였다.
도시는 여전히 유통의 중심지로서 원료는 도시를 통해 농촌지역에 배급되었다. 게다가 도시 기업가들은 농촌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통합하고 그들이 완성한 제품을 매매했다. 제조과정을 조직하는 이런 방식을 '선대제'(先貸制 putting out system)라고 부른다. 이 체제를 운영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업가였다. 기업가는 원료를 사들여 수공업자나 농민들에게 분배하고, 반제품을 한 기능공한테서 다른 기능공에게 넘기고 완제품을 매매했다. 기업가는 대개 도시에 거주하는 유력한 상인이었다.
교역로가 길어질수록 영세 기능공은 원료 공급지와 시장에서 훨씬 더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16세기에는 국제적인 금융시장이 출현했는데 이 금융시장의 창시자는 독일 남부의 은행들이었다. 이 은행들은 로마 같은 유럽 남부의 대도시와 안트웨르펜 같은 북유럽의 금융 중심지 사이에서 자금 중개역할을 하기에 유리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은행들은 유럽 전역에서 성장하고 있던 여러 증권거래소에서 발행한 환어음을 통해 엄청난 자본을 유통시킬 수 있었다.
정치 상황
포르투갈의 항해가들은 15세기에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했다(탐험의 역사).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의 카리브 해에 있는 전초기지들을 발견했다.
1494년에 이미 스페인은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를 정복하기 시작했다. 마젤란이 서쪽으로 돌아 지구를 일주하는 항해에 나선 1519년에 에르난 코르테스는 멕시코 원정을 시작했다. 16세기 중엽에 이르자 정복자들의 시대는 식민지시대로 바뀌었다. 식민지 건설은 귀금속과 목축 및 농장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귀금속은 인디언 노동력을 이용해 손에 넣었고, 목축 및 농장 경제에는 아프리카에서 수입한 노예들을 이용했다.
해외 팽창의 조직화는 유럽 국가들의 정치적 민족주의를 반영했다.
이런 정치적 발전은 세습군주국의 중앙집권화한 힘이 국내를 통일하고 지방의 특권을 폐지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스페인에서는 아라곤의 후안 2세가 아라곤과 발렌시아 및 카탈루냐를 통일했고, 다시 아들 페르난도를 카스티야의 상속녀인 이사벨과 결혼시킴으로써 카스티야와도 제휴했다. 카를로스 1세(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 시대에는 부르고뉴의 회의식 통치 방식을 도입하여 중앙집권화를 더욱 촉진했고, 그의 아들 펠리페 2세 시대에 와서 스페인은 사실상 독재국가나 다름없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는 백년전쟁(1337년에 시작해 1453년에 끝났다고 보는 것이 관례임)으로 말미암아 그동안 군주의 권력을 견제해온 귀족 세력이 약해졌다(영국사). 잉글랜드의 튜더 왕조는 강력하고 효율적인 정부를 추구했으며 프랑스에서는 루이 11세와 프랑수아 1세가 그런 정부를 추구했다. 이들 두 나라에서의 행정 및 사법 체계의 개정은 회의식 제도를 통해 이루어졌지만, 어느 경우에도 서로 다른 법률체계를 통합하지는 못했다.
새로 등장한 직업관료 계층은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프랑수아 1세 시대에 중앙금고가 창설된 결과, 프랑스 재정은 마침내 질서를 찾았다. 잉글랜드에서는 헨리 7세가 왕실을 실정에 맞게 개편함으로써 이미 국가 재정을 질서 있게 운영하고 있었다. 헨리 8세의 장관인 토머스 크롬웰은 관료주의에 적합한 조세 법원을 창설했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군주들은 교회 행정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잉글랜드 국왕은 의회와 협조해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력을 확립했다. 프랑스에서는 국민의 대의기구인 삼부회가 권한을 잃었고, 의회는 주권을 국왕에게 위임했다. 왕의 칙령을 기록할 권한을 가지고 있던 최고 법원인 고등법원(parliament)은 발루아 왕조의 절대왕권을 조금밖에 제한하지 못했고 그나마도 효과는 없었다.
당시 프랑수아 1세 및 카를 5세와 맞먹는 권력과 명성을 누린 사람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인 쉴레이만 1세(1520~66 재위)였다.
오스만 제국은 정예보병대(근위 보병)와 포병대 및 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어서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군사 강국이었다. 쉴레이만의 군대는 1526년에 헝가리를 점령했고 1529년에는 빈을 위협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보헤미아, 헝가리는 모두 15세기말에 야기에우오 왕가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서로 느슨한 제휴 관계를 맺고 있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다스린 야기에우오 왕가의 마지막 왕이 죽기 3년 전인 1569년에, 이 두 나라는 '루블린 합병'이라는 협정을 통해 각각의 제도를 통합해 연합왕국을 형성했다. 그후로는 폴란드 귀족과 로마 가톨릭이 동방정교를 믿는 리투아니아를 지배했고 모스크바 대공국, 카자크족 및 타타르족과 맞닿아 있는 변경지방을 장악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다른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보헤미아와 독립을 잃은 헝가리를 다시 차지했다. 헝가리의 로요슈 2세가 1526년에 모하치에서 오스만 투르크 군대와 싸우다가 전사하자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모두 차지했다.
그보다 더 동쪽에서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강력한 독재군주국으로 새로이 등장했다.
이반 대제라고 불리는 이반 3세는 콘스탄티노플과 키예프의 전통을 자신이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노브고로트를 점령하고 타타르족의 종주권을 거부했는데, 모스크바 대공국이 세력을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이 세력 팽창은 그의 아들 바실리 3세의 스몰렌스크 점령과 손자 이반 4세(1533~84 재위)의 원정으로 이어졌다.
이반 4세는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을 멸망시키고 폴란드와 검의 형제기사단에게 리보니아를 빼앗아 발트 해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반이 죽은 뒤 모스크바 대공국은 폴란드와 스웨덴 및 카자크 군대에 영토를 유린당하는 혼란기에 빠졌다(혼란시대). 1613년에 로마노프 왕조가 등장한 것은 모스크바 대공국이 점진적인 회복기에 들어선 것을 예고했다.
모스크바 대공국은 이따금 외국에 사절을 파견하고 서양의 기능공들과 현장교육을 위한 튜더 왕조의 대표단을 받아들인 것을 제외하고는 서유럽에 대해 고립정책을 취했다.
종교개혁과 반(反)종교개혁
종교 교단의 부패와 교회재정기구의 권력 남용은 개혁운동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처음에는 교회 내부에서 개혁을 요구했지만 결국에는 기존 교회와 결별하는 분리의 길을 선택했다(개신교). 성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사인 마르틴 루터는 1517년 면죄부 판매에 대해 항의를 제기한 뒤 교황의 권위를 부인하는 입장을 취할 때까지 줄곧 교리논쟁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루터가 면죄부를 공격하자 교황 레오 10세는 그를 파문했다. 보름스 의회는 1521년에 파문을 승인했지만 독일 군주들은 루터를 보호해주었다. 그러나 이무렵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카를 5세는 이미 '프로테스탄트'(항의하는 사람)에 대한 회유를 포기하고 이들을 탄압하기로 결심했다. 1527년 카를 5세의 군대는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약탈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을 버리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를 옹호한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사로잡았다.
신성 로마 제국은 이제 2개의 적대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1530년에 프로테스탄트들은 슈말칼덴에서 방어동맹을 결성했다. 루터주의는 세속 통치자들이 신으로부터 권력을 받았으며 인간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제네바에서 일어난 또다른 형태의 프로테스탄트인 칼뱅주의는 엄격한 도덕규범을 주장하고 신의 은총이 갖는 신비를 예정설로 설명했다.
칼뱅주의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선언했지만 실제로 칼뱅교의 조직은 일종의 신권정치를 낳는 데 이바지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여러 교파로 갈라져 있는 서양의 그리스도교 세계를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 위한 반종교개혁을 전개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의 도전에 대응했다. 반종교개혁운동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창설한 예수회였다.
이들은 트리엔트 공의회 덕분에 일하기가 훨씬 쉬워졌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성직을 겸임하는 따위의 직권 남용을 비난하고, 성직자의 결혼과 성서 사용법 같은 문제에서 전통적 관례를 지지했으며 영성체의 본질 같은 쟁점에 대한 교리를 분명히 했다. 가톨릭 교회는 종교재판소의 도움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물질적 원조를 받아 얼마 전까지 누렸던 보편적 권위를 재확립하려고 애썼다.
30년전쟁
1555년의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은 루터파나 가톨릭 가운데 하나를 골라 백성들에게 어떤 종교를 믿으라고 명령할 수 있는 권리를 모든 세속군주들에게 부여해 이중구조를 가진 법적 보호수단을 창조함으로써, 오랫동안 독일에서 가톨릭교도와 루터파 신자들 사이에 간헐적으로 벌어진 종교전쟁을 끝냈다.
그러나 양쪽은 모두 이 협정을 위반했다. 종교적 갈등이 계속되자 팔츠 선제후(選帝侯) 프리드리히 4세는 '프로테스탄트 연합'을 결성했다.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과 그의 이웃나라 군주들이 1609년 7월 10일에 맺은 '가톨릭 동맹'에는 라인 지방의 교회 지도자들이 곧 가담했고, 스페인과 교황도 이 동맹을 지지했다.
나중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보헤미아 왕 페르디난트 2세는 1617~18년에 보헤미아에 가톨릭교도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섭정위원회를 창설했고, 이 위원회는 곧 가톨릭 교회영지에 있는 도시에 프로테스탄트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자 보헤미아 왕국의 의회는 가톨릭교도인 섭정 2명을 창 밖으로 내던졌는데, 이것이 유명한 프라하 사건 사건이다(프라하 사건). 그후에 구성된 임시정부는 소규모 군대를 편성해 왕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추방하기 시작했다. 1619년 여름에 보헤미아인들은 페르디난트를 왕위에서 몰아내고, 프로테스탄트 연합의 지도자인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는 동안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가톨릭 동맹의 군대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파견한 부대로 전력을 강화한 뒤 반란이 일어난 중심지역을 공격했다. 1620년 11월 8일 프라하 교외에 있는 빌라 산에서 프리드리히의 군대는 참패를 당했다. 이 군주는 자기 백성들을 승리한 페르디난트의 처분에 맡기고 북쪽으로 도망쳤다.
1624년경에 네덜란드와 팔츠에서 북쪽으로 망명한 사람들은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1588~1648 재위)의 지도 아래 프랑스·잉글랜드·사보이·스웨덴·덴마크가 참여하는 동맹을 만들었다.
이 동맹은 프리드리히가 빼앗긴 영토와 칭호를 그에게 되돌려 주려고 애썼다. 1625년 봄에 페르디난트는 프라하의 군사령관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으로 하여금 북쪽으로 진군해 덴마크의 위협에 대처하도록 했다. 바이에른 선제후 막시밀리안의 야전군 사령관 틸리 백작과 발렌슈타인의 연합군은 네덜란드 군대를 여러 번 무찔렀다. 그러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은 1629년에 강화를 요청했다.
그리하여 가톨릭의 기세가 크게 올라갔으며, 바로 이런 시기에 발트 해의 패권을 노리던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1611~32 재위)는 프로테스탄트 편에 서서 원정군을 이끌고 슈트랄준트 근처 해변에 상륙했다.
1631년 9월에 구스타프는 마침내 브라이텐펠트에서 황제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가톨릭 동맹 야전군의 주력 부대가 섬멸당했고, 스웨덴 프로테스탄트들은 1631~32년 겨울에 독일 중부와 보헤미아의 대부분 지역을 침략했으며, 1632년 여름에는 바이에른을 점령했다. 구스타프는 1632년 11월 16일 전사했지만 그의 군대는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뇌르틀링겐 전투(1634. 9. 6)의 패배로 스웨덴의 우세는 무너졌다. 프랑스의 루이 13세(1610~43 재위)와 총리인 리슐리외 추기경(1614~42 재임)은 이 전쟁에서 한동안 스웨덴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목적은 스웨덴이나 그 동맹자와는 전혀 달랐다. 프랑스는 1세기가 넘도록 경쟁해온 스페인을 무찌르고 싶었고, 프랑스가 초기에 독일에서 벌인 전투는 부르봉 왕조의 해결책을 독일에 강요하기보다 페르디난트 황제가 스페인에 지원군을 보내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프랑스는 1636년 3월에야 비로소 페르디난트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프랑스와 스웨덴이 오랫동안 거듭 승리를 거둔 뒤, 황제군은 마침내 결정적인 참패를 맛보았다. 신성 로마 제국 대표단은 베스트팔렌에서 열린 평화 협상에서 많은 것을 양보했다.
각 지방을 다스리는 군주들은 상당히 많은 통치권을 받았고, 모든 독일 군주들에 대한 일반 사면령이 공포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 내부의 칼뱅주의는 신앙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625년부터 종교적 쟁점이 유럽 정치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꾸준히 줄어들었다. 이것은 아마 30년전쟁의 최대 성과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많은 나라의 내부 결속을 방해하고 르네상스 시대에 형성된 외교적 세력 균형을 무너뜨려 유럽의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던 주요요인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문화 일반과 같은 주제의 항목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