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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혁명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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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프랑스에서는 수십 년 동안 이념적 열정과 정치적 쇠퇴 및 사회적 혼란이 이어진 뒤, 1789년에 마침내 혁명이 터졌다.

이념적으로 보면, 정부는 소수권력집단의 한정된 이익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최대 이익을 증진해야 한다는 것이 계몽사상가들의 주장이었다(계몽주의). 이들은 땅을 가진 귀족계급의 세력과 면세특권만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치 권력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이들이 제안한 해결책은 완전한 민주주의에서 좀더 효율적인 군주제에 이르기까지 다양했지만, 종교의 자유와 문화적 자유를 좀더 확대하고 의회제도를 확립하며 법률적 평등을 더 많이 이룩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했다.

프랑스의 여러 집단은 경제적·사회적 변화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귀족들은 왕권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권리를 원했다. 중산층은 그들의 상업적 중요성에 어울리는 정치적 발언권을 얻고자 했고 그들에게 좀더 우호적인 정부를 원했다. 인구증가로 압박을 받고 있던 농민대중은 귀족과 교회의 땅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원했고, 영주에게 소작료와 봉사를 바쳐야 하는 봉건시대의 잔재를 청산하고자 했으며, 세금이 경감되기를 원했다.

루이 16세가 새로운 세금을 논의하기 위해 1789년에 삼부회를 소집하자 이런 다양한 불만은 절정에 이르렀다.

1614년 이후 한번도 열리지 않았던 삼부회가 소집되자, 지난 수십 년 동안 쌓이고 쌓인 모든 억압이 한꺼번에 터져나왔다. 일부 귀족과 성직자들도 개혁 지도자들 편에 가담했다. 개혁자들은 도시 중산층을 대표하는 제3신분이 교회를 대표하는 제1신분과 귀족계급을 대표하는 제2신분의 의원을 합한 수의 2배가 되어야 하며, 삼부회 전체가 하나의 단위로 투표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은 이 요구에 굴복했고 새로운 국민의회는 헌법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789년 여름에는 바스티유 감옥에 대한 상징적 습격이 있었으며 장원제도의 잔재를 청산하라고 요구하며 농촌에서 일련의 봉기가 일어났다. 그리고 만인은 법 아래에서 평등하다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즉 인권선언이 채택되어 종교의 자유와 출판 및 집회의 자유를 선언하는 한편, 재산권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교회가 소유하고 있는 땅이 몰수되어 혁명세력과 로마 가톨릭교회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혁명은 개인이 창의력을 발휘해 자유롭게 기술을 변화시키는 것이 좋다고 믿는 중산층의 믿음을 장려했기 때문에 동업조합은 금지되었다(1791). 1791년에 만들어진 헌법은 군주제를 유지했지만, 재산을 가진 프랑스 성인 남자 중 약 절반이 투표에 참여하여 선출된 강력한 의회가 창설되었다.

프랑스 혁명의 자유주의적 단계가 지난 뒤, 1792~94년에는 좀더 급진적인 시대가 이어졌다.

경제 상황은 더욱 나빠져 새로운 도시 폭동을 유발했다. 로마 가톨릭교도와 그밖의 집단들은 혁명에 반대했으나 혁명세력은 반대 세력을 탄압하면서 혁명의 원칙에 대한 충성을 점점 더 집요하게 강요했다. 이웃나라의 군주들은 프랑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했다. 자코뱅당의 급진적 지도자들은 정부를 인수한 뒤 공화국을 선포하고 왕과 그밖의 많은 지도자들을 처형했다. 정부는 더욱 중앙집권화했고 10진법이 도입되었다.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징병제도가 창설되었다. 새 헌법은 모든 성인 남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한다고 선언했다. 혁명의 급진적 단계를 거치면서 효율적으로 개편된 혁명군대는 점점 더 많은 군사적 성공을 거두어 북해 연안의 저지대와 독일의 일부 지역을 점령했다. 그결과 점령지역에 혁명의 원칙을 전파했으며 혁명은 유럽 전체의 현상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자코뱅당의 지배는 막을 내리고 1795년에 좀더 온건한 집단체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혁명군대는 여러 방면으로 진격을 계속했고, 특히 이탈리아의 일부 지역에서는 점령지를 계속 확대해나갔다.

이와 같은 전쟁이 요구하는 막대한 병력과 물자는 끊임없는 국내의 소요와 더불어 1799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장군을 권좌에 올려놓은 혁명의 마지막 변화를 촉진시켰다.

나폴레옹 시대

나폴레옹의 야망은 프랑스에 확고한 왕조를 세우고 유럽에 프랑스가 지배하는 제국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새로운 귀족정치의 토대를 쌓았다. 그는 거의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나폴레옹 전쟁). 그의 도발에 가장 끈질기게 맞선 나라는 영국이었지만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도 잇따라 대(對) 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 나폴레옹은 노련한 전략가였고, 특히 많은 병력과 기동력이 있는 야전 포병대를 신속하게 배치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그의 지휘로 프랑스군은 북해 연안의 저지대와 서부 독일을 병합했다. 독일의 다른 지역과 이탈리아·스페인·폴란드에는 위성 왕국들이 세워졌다. 나폴레옹의 승승장구는 1810년을 고비로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잠시 동맹을 맺었던 러시아가 등을 돌리자 나폴레옹은 1812년에 러시아 침공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러시아의 추운 겨울 날씨 속에서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1813년에는 다른 열강들이 새로운 대 프랑스 동맹을 결성했다. 동맹군은 1814년에 프랑스를 침공하여 점령했고, 나폴레옹을 엘바 섬으로 추방했다. 그는 1815년에 극적으로 탈출해 파리로 돌아왔지만 몇 달 뒤 워털루에서 참패했다.

나폴레옹 정권은 3가지 주요업적을 남겼다. 첫째, 프랑스 내부의 수많은 혁명적 변화를 뒷받침한 점이다. 나폴레옹은 허울 좋은 꼭두각시 의회만 유지하고 출판과 집회를 엄격하게 규제한 독재자였다. 자유주의의 몇 가지 주요원칙은 무시되었지만, 법 아래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원칙은 대체로 더욱 강화되었다.

강력한 중앙집권 정부는 능력에 따라 관리를 모집했다. 국가 통제 아래 놓인 새로운 교육제도는 교육받을 기회를 폭넓게 제공했고, 종교의 자유는 살아남았다. 국내 상거래의 자유와 과학기술혁신에 대한 장려는 프랑스의 상업을 발전시켰다. 교회 소유의 토지 매각은 그 정당성을 승인받았고, 농업국가 프랑스는 독자성이 강한 자작농의 나라로 변모했다. 둘째, 나폴레옹의 정복으로 프랑스의 혁명 법률은 서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보급되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업조합 및 장원을 가진 귀족계층의 세력은 총칼 앞에 쓰러졌고, 벨기에와 독일 서부 및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구정권이 종말을 맞았다. 셋째, 광범위한 정복은 유럽의 지도를 영구히 바꾸어놓았다. 나폴레옹이 세운 왕국들은 독일과 이탈리아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영토를 통합했고, 군소 국가들의 난립으로 말미암은 혼란상태는 끝내 회복되지 않았다. 이러힌 발전과 나폴레옹의 지배에 대한 반발은 이들 지역만이 아니라 스페인과 폴란드에서도 점점 성장하는 민족주의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이들 지역만큼 새로운 이념과 많이 접촉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국력을 강화해 나폴레옹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중요한 정치개혁을 도입했다.

1814~15년에 승리한 열강들은 오스트리아 빈에 모여 빈 회의를 열고, 유럽을 원상태로 되돌리려고 애썼지만 1789년 이전으로 복원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특정지역에 있는 국가들은 장차 프랑스가 다시 세력을 확장할 경우를 대비한 완충지대로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았다. 프로이센은 서부 독일에 새로운 영토를 얻었다. 러시아는 폴란드의 대부분 지역을 접수했다(18세기말에 분할된 폴란드는 나폴레옹이 침략할 때까지 여러 열강들의 영토로 쪼개져 있었음). 영국은 프랑스와 스페인 및 네덜란드의 식민지 가운데 일부(남아프리카를 포함)를 얻었다.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가가 왕위를 되찾았지만 혁명적 법률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의회는 지극히 한정된 참정권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입헌군주제를 선언했다. 빈 조약은 새로운 독일과 이탈리아를 기대했던 민족주의자들을 실망시켰고, 민주주의자와 자유주의자들의 사기를 꺾어놓았다. 그러나 빈 조약은 적어도 반동적인 것은 아니었고, 프랑스에 관한 한 가혹하지도 않았다.

전체적으로 볼 때 빈 조약은 유럽에 세력균형을 재확립하는 한편, 새로운 현실을 용인함으로써 온건한 보수적 정치 질서를 강조하려고 애썼다. 세력균형을 재확립하려는 노력은 놀라운 성공을 거두어 그후 유럽은 반세기가 넘도록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보수적 정치 질서 확립의 노력은 그렇게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보수주의의 반동

보수주의는 1820년대 중엽에 유럽의 정치문제를 지배했다.

주요국가들의 정부는 선동자들을 적발하기 위해 경찰 앞잡이를 이용했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위신은 프랑스와 그밖의 지역에서 크게 높아졌다. 유럽 보수주의의 지도자는 오스트리아의 총리인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공이었다. 메테르니히는 합스부르크 왕조의 허약함을 깨달았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교회와 군주제에 헌신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민족주의적 감정에 흔들리기 쉬운 게르만족과 헝가리인 및 슬라브족의 결합체였다.

메테르니히는 국내적으로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애써 피했고, 국제적으로는 현상유지를 조장했다. 그는 1820년대초에 국제회의를 주최해 정치적 혼란이 일어난 나라에 개입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는 독일의 여러 나라와 이탈리아에서 보수주의를 강화하는 데 특히 열심이었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지배는 그의 정권에 새로운 위기를 가져왔다.

그러나 혁명운동은 1820년 변두리 지역에서 일어났다.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에서 일어난 봉기는 진압되었다. 스페인에서 일어난 반란도 역시 진압되었지만 완전히 진압하기까지는 몇 년의 세월이 걸렸다(1820년 스페인 혁명). 이것은 그후 1세기가 넘도록 되풀이된 스페인의 정치적 불안을 예고했다. 또한 스페인은 이 혁명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를 거의 다 잃어버렸다.

아메리카 대륙의 스페인 식민지들은 스페인이 나폴레옹에게 점령되어 있을 때 처음 봉기를 일으켰다.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그리스 혁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그리스 독립전쟁). 그리스는 프랑스와 영국 및 러시아의 지원을 얻어 1829년에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다.

자유주의 운동은 1820년대 중엽에 영국과 프랑스 및 북해 연안의 저지대에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의회가 더 강력해지고 개인의 권리가 더욱 폭넓게 보호되기를 원했다. 이들은 또한 유산계급의 참정권을 요구했으며, 기업이 성장하는 데 유리한 상법을 원했다. 벨기에의 자유주의자들은 빈 조약으로 벨기에가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게 되었기 때문에 민족적 불만을 품고 있었다. 자유주의는 1830년에 또 한 차례의 새로운 혁명을 자극했고,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새로운 봉기가 여기에 불을 붙였다(1830년혁명). 프랑스의 반란은 좀더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군주제를 낳았다.

중산층의 참정권이 더욱 확대되고, 출판의 자유가 일시적으로 보호받게 된 것도 이 혁명의 성과였다. 혁명은 독일과 이탈리아의 일부 국가와 벨기에에도 파급되었다. 벨기에는 몇 년 뒤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독립 군주국으로 선포되었다. 영국은 체제전복적인 혁명은 면했지만, 대규모 소요가 일어나 1832년에 선거법을 개정해야 했다(영국선거법 개정안). 이 개정안은 사실상 중산층의 모든 성인 남자에게 참정권을 부여했고, 더 많은 자유주의적 법률 제정의 뼈대를 마련했다.

유럽은 이제 자유주의적인 서부와 보수주의적인 중부 및 동부로 나뉘었다.

러시아는 유럽의 다른 지역을 휩쓰는 정치적 물결에서 대체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러시아에 중대한 사회적·경제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고, 니콜라이 1세가 억압정책을 시행한 것도 그 이유의 일부였다. 1830년 혁명운동의 일환으로 폴란드에서 일어난 민족주의적 반란은 진압되었다. 러시아는 전통적 외교노선을 계속 추구했고, 남부에 영토를 얻기 위해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거듭했다. 1850년 이후에야 러시아 정권은 비로소 고집스러운 보수주의적 입장을 심각하게 재고하기 시작했다.

이런 유형은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성공할 수가 없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정부는 의회의 권한을 확대함으로써 자유주의 쪽으로 차츰 접근했다. 네덜란드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지역들이 자유주의를 향해 또 한번 중요한 걸음을 내디딘 것은 1848년에 잇따라 일어난 혁명의 결과였다. 1848년에 일어난 일련의 혁명은 서유럽을 마지막으로 휩쓴 변혁의 물결이었다.

1848년의 혁명

프랑스의 군주제는 1840년대에 국민을 더욱 억압하는 쪽으로 돌아서서 새로운 자유주의 운동을 자극했다.

장인들도 급속한 경제적 변화로 노동 조건이 달라지고 옛날에 누리던 지위를 잃게 되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846~47년의 불경기가 민중의 동요를 부채질했으며, 일부 사회주의 사상이 장인 지도자들 사이에 퍼졌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직접 소규모 회사를 소유하고 화합과 평등 속에서 회사와 노동을 통제할 수 있는 제도를 요구했다.

좀더 광범위한 참정권과 정치개혁을 요구하는 대규모 선전활동이 벌어지자, 정부는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1848년 2월 경찰을 동원했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오히려 전형적인 거리 폭동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군주제가 폐지되고(프랑스 군주제는 회복되지 않았음), 모든 성인 남자에게 참정권을 부여한 공화제 정권이 임시로 수립되었다.

반란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헝가리, 보헤미아 및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으로 순식간에 퍼졌다.

이런 지역의 봉기에는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의 요소들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지만 봉건적 의무에 대한 농민의 불만과 강력한 민족주의의 물결도 포함되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민족주의는 나라의 통일을 추구했고, 헝가리의 민족주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에서 독립하기를 원했으며, 슬라브족의 민족주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 안에서 자치를 얻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많은 지역에 새로운 정권이 세워졌고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독일의 통일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의회가 열렸다. 대규모 반란은 1849년에 진압되었다.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소수의 민족주의에 반대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혁명가들은 민족주의적 쟁점을 둘러싸고 분열했다. 이러한 분열은 합스부르크 정권이 군대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고 보헤미아와 이탈리아 및 헝가리에서 반란자들을 진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프랑스 파리의 혁명가들도 분열을 일으켰다. 장인(匠人)들은 국가로부터 직업에 대한 보호와 그밖의 이익을 얻고 싶어했지만, 나머지 혁명가들은 정치적 변화만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1848년 6월의 장인 반란은 진압되었고, 공화정권은 우익 쪽으로 꾸준히 접근해 결국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을 대통령으로 뽑기에 이르렀다. 루이 나폴레옹은 곧 제정을 선포하고 나폴레옹 3세라는 칭호를 채택했다.

프로이센 왕은 자유주의적인 통일독일을 이끌기 위한 변화를 거부하고 군대를 동원해 독일의 혁명정부들을 몰아냈다.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급진주의자(쾰른에서 신문을 창간한 사회주의자 카를 마르크스를 포함)와 자유주의자의 분열도 이를 거든 꼴이 되었다.

혁명은 실패했지만 1848년의 봉기는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장원제도는 독일 전역과 합스부르크 왕가의 땅에서 영원히 폐지되어 농민들이 새로운 권리를 얻게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상당한 속임수가 있었지만 새로운 제정에서도 민주주의적 통치가 이루어졌다. 모든 성인 남자에게 참정권을 주는 것이 항구적인 제도로 확립되었다.

프로이센은 다시 보수주의의 손아귀에 들어갔지만, 자유주의적 견해에 대한 유화적 몸짓으로 의회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참정권은 제한되어 있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지방 지주들의 지배를 대신하기 위해 합리적인 관료체제를 수립했다. 메테르니히는 혁명으로 추방되었고, 새로운 세대의 보수주의자들이 등장했다. 이들은 새로운 정치 세력과 타협하고 그들을 활용하려고 애썼다. 마침내 새로운 정치적 조류 가운데 일부가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사회주의는 비록 혁명의 실패로 상처를 입었지만 유럽의 정치적 현안으로 떠올랐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남녀평등권운동이 표면에 등장했다. 1850년부터는 문자 그대로의 혁명을 차츰 어렵게 만드는 과정에서 급속한 정치 발전을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1815~50년에는 러시아를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열강들이 주요한 외교활동을 벌이지 않았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했을 뿐 아니라, 외교를 국내 통치수단으로 이용하려는 욕망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식민지에 대한 지배력을 계속 확대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인도에 대한 직접통치를 점점 강화한 것이다.

프랑스와 영국은 아직도 서로를 경계했지만 힘을 합쳐 러시아가 중동지방에서 이익을 얻는 것을 방해했다. 프랑스는 특히 1829년에 알제리를 침략함으로써 새로운 식민지를 얻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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