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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그리스도교의 3대 주요교파 중에서 가장 큰 교파인 로마 가톨릭 교회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로마 주교인 교황이 주재한다.
→ 가톨릭 교회
논란이 그치지 않았던 교황제는 초대 교회 이후 1870년까지, 즉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신앙과 도덕의 문제'에 관한 선언에서 교황의 절대우위성과 무류성을 신앙사항으로 공식 표명할 때까지 오랜 세월에 걸쳐 발전해왔다.
이 선언에 따르면, 교황은 사도들의 대표이자 초대 로마 주교라고 생각되는 사도 베드로의 직계 후계자로서 교회의 사법·입법·행정 전반에 대해 권위를 행사한다.
베드로의 권위는 〈마태오의 복음서〉 16장 18~19절에 인용된 예수의 말을 비롯해 그밖의 성서구절에 근거를 둔 것으로, 거기에 따르면 베드로가 예수를 이어 하늘과 땅의 권세를 쥔 것으로 해석되었다. 교황제의 초기 역사는 이러한 베드로론(論)의 발전사이며, 그 이후의 역사는 그리스도교 사회에 대해 교황의 영적 권위뿐 아니라, 세속적 권위까지도 주장해 나가는 확장의 역사라 할 수 있다(→ 교황의 수위권, 교황무류성).
초기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로 가서 초대 주교가 되었고,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중인 64년경 바티칸 언덕에서 순교하였다.
그러나 로마 주교구는 1세기말에 사도가 세웠다고 주장하는 다른 여러 주교구들 중에서도 특별한 지위를 인정받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로마에 베드로와 바울로의 무덤이 있다는 로마 주교구의 주장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밖에 많은 로마 사람들이 순교했고 정통 신앙을 지켰으며, 로마가 바로 로마 제국의 수도라는 사실도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3세기 중엽 교황 스테파노 1세(254~257 재위)와 카르타고의 주교 성 치프리아노는 스테파노가 보편적 교회에 대해 교리적 권위를 행사하려는 문제를 놓고 크게 충돌했다.
4, 5세기에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주교구의 힘이 강력해지면서 로마 주교구의 권위가 도전을 받았다.
교황 레오 1세의 반대를 무릅쓰고, 451년에 동로마 제국 황제가 소집하고 주도한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 주교는 로마 주교가 서방에서 행사하는 주권과 똑같은 주권을 동방에서 행사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것이 베드로론에 근거를 둔 로마 교회의 주도권 주장에 대해 동방교회가 역사적으로 거부의사를 표명한 최초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는데, 그결과 1054년 두 교회로 분열되었다.
그후 수세기 동안 갈수록 악화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교황들은 종종 황제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자신들의 영적 권한을 팔지 않으면 안되었다.
로마나 비잔틴 황제가 이탈리아를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게 되자, 로마 교황은 새 프랑크 왕국과 다른 게르만족 왕국들에 대해 로마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스테파노 2세(752~757 재위)와 다른 교황들은 샤를마뉴와 그의 가문의 도움으로 로마의 우위성을 확보하고 유력한 보호자를 얻었으며 콘스탄티누스 1세 증여 위조문서(Donation of Constantine forgeries)에 의하여, 이탈리아에서 세속 권력을 획득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부장).
그러나 그들은 희망했던 것과는 달리 보편적 교회에 대해 영적 주권을 자유롭게 행사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샤를마뉴와 그의 후계자들이 교황의 황제 임명권을 무시했고, 오히려 비잔틴과 로마 황제들의 선례에 따라 프랑크 교회와 교황청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통제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9, 10세기에 교황청의 세력약화와 이탈리아의 정치혼란으로 인해 교황청은 사실상 독일 황제들에게 장악되었다. 교황청의 필사적인 개혁의 몸부림은 1049년 부르고뉴와 로렌의 수도원 개혁운동에 영향을 받은 개혁자인 교황 레오 9세를 통해 나타났다.
레오가 시작한 이른바 그레고리오 개혁에서나 교황제 자체의 역사에서나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서임권 논쟁(Investiture Controversy)이었다.
1075년 그레고리오 7세(힐데브란트)는 성직자에게 권위의 상징물을 수여하려고 덤비는 모든 세속 통치자를 파문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한 수여행위는 주교와 지역 성직자의 선출과 활동에 대한 세속 통치자들의 통제권을 뜻했다.
교황의 엄포가 있자 서임권 논쟁은 표면화되었고 그 일로 교황청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그레고리오 7세의 유산을 물려받아 후임 교황들은 그리스도교 사회에 대한 교황의 지도권 문제를 넘어서 교황군주제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하는 가운데 정쟁(政爭)에 휘말리게 되었다. 13세기에 들어서 재판권과 행정권이 교황청에 집중되다 보니 교황청은 갈수록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고, 마침내 성직록(祿)을 비롯한 여러 교회 직무를 '매매'하는 관행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교황청의 부패와 '바빌론 유수'로 비유되는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1309~77) 같은 사태 때문에 주교들은 교회에 대한 통제력을 되찾기 위해 공의회 운동(conciliar movement)을 전개하는 한편, 성례전 및 조직의 개혁을 요청하는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아비뇽 교황청, 공의회 수위설).
르네상스 시대의 교황들은 16세기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제대로 처리하거나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정치적 인맥과 돈줄에 너무 깊이 연루되어 예술을 후원하는 것 이외에 교회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분열의 여파 속에서 교황청은 마침내 트리엔트 공의회(1545)를 소집하여 개혁 요구에 응했는데, 이 공의회에서 소위 반종교개혁(Counter Reformation)을 조직했다.
이 공의회의 신학적·교회적 결정은 대체로 20세기 하반기까지 가톨릭 교회의 형태를 결정했다.
19세기에 교황청은 보수적인 정치세력과 연합했는데, 이로 인해 교회 내부의 자유주의적이고 근대화된 세력이 교회로부터 떨어져나가고, 교황령은 새 이탈리아 왕국에 빼앗기고 말았다. 세속 권력을 잃은 후, 교황청은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교황의 무류성을 주장하고, 교황지상권주의(교황은 교회의 절대 지배자라고 주장하는 사상)를 옹호하면서 점점 영적·도덕적인 권위로 전환하게 되었다.
1962년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교황청은 대체로 자유주의적 사상과 현대 문화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이루어진 신학적·제도적 변화들은 교회에 놀라우리만큼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고,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개혁과 에큐메니컬 대화(ecumenical dialogue)에 문을 열게 했으며, 주교·성직자·평신도들의 참여를 높였다.
그러나 20세기말부터 21세기에 이르러 교황청은 현대인이 겪는 여러가지 도덕·윤리·정치 문제와 관련하여 점점 심각해져가는 논쟁에 직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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