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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로가 다마스쿠스에 간 지 3년 만에 그의 활동은 돌연 중단되었다.
바울로는 아라비아 나바테아족의 족장(통치자)과 충돌했다. 족장은 다마스쿠스의 모든 성문에 파수를 세웠으나, 바울로는 광주리 속에 숨어 성벽을 넘어 피신한 후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곳에서 사도 베드로와 예수의 동생 야고보를 만났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만남이었다. 왜냐하면 이 모임에서 바울로는 예루살렘 교회 창건자들과 나란히 사도로 공인받았기 때문이다.
방문기간은 짧았고 바울로는 인근 지역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을 방문하지 못했다. 그것은 바울로가 바리사이파의 보복을 당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는 바울로를 배교자로 낙인찍었다. 2주일 만에 바울로는 실리시아와 시리아로 새로운 선교를 하기 위해 떠났다. 이 선교활동의 기지는 그의 고향 타르수스였지만 이 선교에 대해서도 알려진 것은 없다. 그후 바울로는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로 가서 바르나바의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도왔다. 개종자들 가운데 대다수는 이방인들로서 이로 인해 심각한 위기가 초래되었다.
이 위기에서 바울로는 이방인들의 옹호자로 등장했고 수년간 계속된 논쟁은 바울로에게 큰 자극을 주었으며, 이 논쟁을 통해 그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방인을 옹호한 그의 입장으로 인해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유대교의 한 종파가 아니라 보편적인 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논쟁의 초점은 유대계 그리스도교인들과 이방계 그리스도교인들의 관계였다. 원시 그리스도교는 밀접하게 결합된 친교체였으며, 그 중심은 공동식사와 성만찬(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기리는 감사의 식사)이었다.
그런데 유대교 정결 규정에 매인 유대인들은 율법을 위반할까 두려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꺼려했다. 예수는 마음의 순결이 율법 준수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쳤지만 이때문에 그의 추종자들이 율법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이방인들이 증가하자 교회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섞이게 되었으며, 유대인 출신의 교인들은 그리스도교적 친교를 위해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에 불평을 터뜨렸다. 스테파노의 죽음 이후 예루살렘의 그리스도교도들은 유대교의 반감을 자극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했다.
예루살렘에서 선교활동을 발전시키려면 반드시 율법에 적합하다는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러므로 안티오키아 그리스도교인들의 자유주의적 태도에 대한 소문은 그들에게 극히 해로운 일일 수밖에 없었으며, 바리사이파 출신의 개종자들은 이방인 개종자들도 할례와 율법 준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바울로는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14년 동안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다시 방문했을 때, 그가 내건 목표는 이방인들의 교인 자격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이 점은 〈사도행전〉의 기록과 배치된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로와 바르나바는 47~49년의 대기근 때 의연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한다. 〈사도행전〉은 이방인 문제를 다루기 위해 바울로가 또 1차례 예루살렘을 방문했다고 전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다양한 자료에 근거하여 〈사도행전〉을 기록한 루가는 실제로 1번 이루어진 방문을 2번 이루어졌다고 기록했거나, 이전에 의연금을 전달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람들의 명단에 실수로 바울로의 이름을 포함시킨 것이다.
안티오키아는 줄곧 바울로의 선구적인 활동이 이루어진 기지였다.
〈사도행전〉은 3차에 걸친 여행을 기록하고 있다. 이 여행은 일반적으로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된 선교여행으로 알려져 있다. 제2차 예루살렘 방문은 아마도 제1차 선교여행이 끝나갈 무렵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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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안티오키아의 바울로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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