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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서술에 비추에 볼 때 예수의 죽음 이후 곧 베드로가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떠오른 것은 결코 예상 밖의 일이 아니었다.
부활 이후 거의 15년 동안 베드로는 사도교회를 이끌었다. 그는 회의를 주재하여 유다(그리스도를 배반한 뒤에 죽음) 대신 마티아를 사도로 임명했으며(사도 1:23~26), 교회가 탄생하게 된 오순절에 맨 먼저 일어나 설교를 했다(사도 1:14~39). 또한 예루살렘의 유대인 종교법정에 서서 사도들을 변호하는 설교를 하고(사도 4:5~22), 교회 안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훈계하는 재판장 역할도 했다(사도 5:1~10). 베드로는 12사도들을 이끌고 "여러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교회를 확장했다(사도 9:32). 그는 먼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갔고(사도 8:4~17), 그 결과 "그들도 성령을 받았다". 사마리아에서 그는 마술사이자 주술적 치유자인 시몬 마구스를 만났다.
그뒤 사론 평지의 리따로 가서(사도 9:32~35) 중풍병자 애네아를 고쳤으며, 지중해연안 도시 요빠로 가서(사도 9:36~43) 다비타(도르가)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쳐주었다.
지중해연안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 카이사레아에 간 베드로는(사도 10:1~11:18)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 고르넬리오를 개종시킴으로써(사도 10:1) 이방인을 교회로 받아들였다.
당시 유대교 규정에 따르면 이방인 개종자는 먼저 할례를 통해 유대인이 되어야 받아들일 수 있다. 베드로는 할례를 요구하지 않은 채 고르넬리오와 그외 다른 이방인들을 받아들였는데, 이들은 회당과 비공식적인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함으로써(사도 10:48) 중대한 변화를 일으켰고, 이것은 유대 그리스도교도들 및 일반 유대인들의 반발을 샀다. '성령'이 성결하게 하심(사도 10:10~15)에 힘입어 베드로가 독자적으로 일으킨 이 사건으로 헤로데는 야고보(요한의 형)의 목을 베고 베드로를 체포하게 한(사도 12:2, 3) 것으로 보인다.
감옥에 있는(AD 44경) 베드로를 주의 천사가 찾아왔고 두손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풀려서 그는 감옥을 빠져나왔다(사도 12:1~8). 그는 즉시 "마르코라고도 불리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사도 12:12). 그리고 자기가 감옥에서 빠져나온 사실을 "야고보와 다른 교우들"에게 알리라고 부탁하고는 "다른 곳으로 떠나갔다"(사도 12:17). 이 시점에서 예루살렘에서 누리던 베드로의 지도권은 끝을 맺게 되었다.
베드로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다른 곳'이라는 말이 같은 지방의 임시피난처를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사도행전〉은 베드로의 후기활동을 다루지 않는다. 〈루가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쓴 저자가 이후의 활동을 다루는 제3의 책을 쓸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책이 씌어지지 않았거나 아니면 씌어졌다 하더라도 후에 상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거기에는 〈클레멘스의 첫번째 편지 First Letter of Clement〉(제4~6권)에 암시된 교회 내부의 시기심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거나, 아니면 책을 완성하기 전에 저자가 죽었을 것이다.
베드로의 후기활동에 대해서는 베드로가 유명했던 당시 두 사도, 즉 야고보와 바울로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데서 잠깐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베드로는 헤로데 왕에게 잡혀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예루살렘을 떠날 때까지 예루살렘 교회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이었다(사도 12:1~17). 예를 들어 바울로는 회심 뒤 3년 만에 베드로와 의논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그와 함께 2주일을 그곳에 머물렀다(갈라 1:18~19). 그러나 많은 〈신약성서〉 학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난 뒤 베드로는 선교활동을 맡았고 '주의 형제' 야고보가 교회의 실제적인 지도권을 가졌다고 본다(이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음). 이렇게 권위가 베드로에서 야고보로 옮겨졌다는 것은 베드로가 안티오키아에서 이방 그리스도교도들과 함께 식사하던 도중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의 뜻을 따라 자리를 물러난 사실(갈라 2:11~14), 이른바 예루살렘 사도회의(사도 15:7)에서 결정된 사항들을 야고보가 최종적으로 '요약'한 사실, 후에 베드로가 마르코라고도 하는 요한의 어머니 집에서 떠날 때 자신의 거처에 대한 설명 또는 '보고'를 주로 야고보에게 남긴 사실(사도 12:17) 등을 통해 추측할 수 있다.
바울로는 회심 3년 뒤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처음 만났다.
이 만남을 기록하는 데서 게파(베드로)라는 이름이 야고보보다 먼저 나온다. 그러나 14년 뒤의 만남을 전하는 이야기에는 야고보가 게파보다 먼저 나온다(갈라 2:9). 또한 바울로는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났던 자신과 베드로가 연루된 사건을 강조한다.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 바울로는 안티오키아에서 유대 그리스도교도와 이방 그리스도교도를 하나의 회중으로 합하는 일에 어느 정도 성공했던 것 같다. 유대 그리스도교도들은 이방인들과 한자리에 앉아 식사하는 것을 그들의 전통에서 아주 벗어난 일로 보았다.
바울로가 없는 동안 베드로는 선교사로서 안티오키아를 방문하여 유대인 그리스도교도와 이방인 교우들과 식사를 했다. 후에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와서 이방인 교우와 함께 식사하는 관습에 반대했다. 베드로는 야고보에게 복종하여 "슬그머니 그 자리에서 물러 났고", 유대 그리스도교도들도 마찬가지로 처신했다. 이로써 이 집단의 통일성은 무너지게 되었다. 바울로는 돌아와서 베드로가 우유부단해서 저지른 일에 대해, 어쩌면 결별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한 것 같은 일에 대해 베드로를 꾸짖었다(갈라 2:11~14).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예루살렘 공의회(49/50)가 소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회의에서 바울로는 "할례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고"(갈라 2:7), 베드로는 "할례받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임받았다"(갈라 2:8).
바울로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1장 12절에서 지나가는 말로 게파(베드로)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것은 고린토 교회의 한 집단이 특별히 베드로에게 헌신했음을 암시한다(어떤 사람들은 이 내용을 근거로 베드로가 고린토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함). 또한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 9장 5절에서는 베드로가 아내와 함께 선교활동을 한 것으로 쓰고 있다.
베드로가 소아시아에서 선교 여행을 했다는 것은 〈베드로의 첫째 편지〉 1장 1절에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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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사도교회에서 베드로의 위치 – 다음백과, Da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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