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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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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711. 5. 7(구력 4. 26),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사망 1776. 8. 25, 에든버러
국적 스코틀랜드, 영국

요약 철학을 인간 본성에 대한 귀납적 실험과학으로 보고, 뉴턴의 과학방법과 존 로크의 인식론을 기초로 해서 인식이 생겨날 때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그는 경험을 떠나서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스코틀랜드 국경 나인웰스의 소지주 조지프 흄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에는 양가 전통에 따라 법학을 공부했지만 이내 싫증을 느끼고 다양한 학문의 서적을 탐독했고, <세 편의 도덕·정치학 논고〉·〈인간 이해력에 관한 철학 논고 〉와 같은 저술활동을 시작했다. 애덤 스미스는 〈흄 자서전〉에 추도문을 실으면서 그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완벽한 지혜와 덕의 이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인물'이라고 평했다.

흄(David Hume)

스코틀랜드 출신의 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이며 역사가이다.

ⓒ Allan Ramsay/wikipedia | Public Domain

개요

철학을 인간 본성에 대한 귀납적 실험과학으로 보고, 뉴턴의 과학방법과 존 로크의 인식론을 기초로 해서 인식이 생겨날 때 정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그는 경험을 떠나서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인식론이 후세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도덕가로 자처한 듯하다.

초기생애와 저술활동

스코틀랜드 국경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나인웰스의 소지주 조지프 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고등민사법원장의 딸이었다. 처음에는 양가 전통에 따라 법학을 공부했지만 이내 싫증을 느끼고 다양한 학문의 서적을 탐독하기 시작했다. 한때 독서에 너무 깊이 빠져든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려 몇 년 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1734년 브리스틀의 한 상점에서 수완을 발휘하던 중 생의 전환점을 맞아 프랑스에서 3년간 은둔했다. 그는 이 기간에 주로 옛 앙주 공국(公國)의 라플레셰에서 〈인성론 A Treatise of Human Nature〉을 쓰는 데 몰두했다.

3권으로 된 이 책에서 그는 하나의 완전한 철학체계를 세우려고 했다. 이해력을 다룬 제1권은 인간의 인식과정을 설명하면서 관념의 기원, 시간·공간·인과성 등의 관념, 감각의 진실성 등을 차례로 논하고 있다. 제2권은 정념에 관한 부분으로, 인간의 감정 질서를 상세한 심리 메커니즘을 통해 묘사하고 이성이 정념에 비해 부차적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도덕을 다룬 제3권은 어떤 행동이 유쾌한 결과를 낳는가 아닌가에 따라 나타나는 시인(是認) 또는 부인(否認)의 느낌으로 도덕적 선을 설명했다.

〈인성론〉은 그의 사상을 가장 포괄적으로 표현한 저서였지만 자신은 말년에 이 책을 유치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다른 어떤 저서보다도 특히 제1권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다.

흄은 1737년 영국으로 돌아와 〈인성론〉 출판작업에 착수했다. 야심에 찬 첫번째 저서는 아무 주목도 받지 못해 그를 낙담시켰다. 그러나 2번째 저서 〈도덕·정치학 논고 Essays, Moral and Political〉(1741~42)는 얼마간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을 얻어 에든버러대학교의 도덕철학교수직에 지원했지만 무신론자라는 여론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에든버러를 떠나 방랑생활에 들어갔다. 정신병자 애넌데일 후작의 개인교사로 1년을 보냈으며, 세인트 클레어 장군의 비서가 되어 1748~49년에는 빈과 토리노에서 궁정사절로 활동하기도 했다.

성숙기의 저술활동

이 시기에 번 돈으로 흄은 연구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세 편의 도덕·정치학 논고 Three Essays, Moral and Political〉(1748)·〈인간 이해력에 관한 철학 논고 Philosophical Essays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748)가 그 성과였다. 뒤의 저서는 〈인성론〉 제1권을 개작한 내용에 〈기적에 관하여 On Miracles〉라는 논문을 덧붙인 것이다. 흔히 이 저서는 흄이 1758년 개정판을 낼 때 새로 제목을 붙인 〈인간 이해력 탐구 An Enquir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도덕 원리 탐구 An Enquiry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Morals〉(1751)는 〈인성론〉 제3권을 개작한 것이다. 이 두 저서가 흄의 성숙기 사상을 대표한다.

〈인간 이해력 탐구〉에서 흄은 사실과 경험에 비추어 추리의 성격에 대한 주요문제들을 날카롭게 제기한 뒤 연상원리에 의거해 대답하고 있다. 그는 감각과 내성(內省) 자료인 '인상'과 이 자료들을 혼합·변경하여 얻는 '관념'을 구분하고, 모든 관념은 인상에서 생긴다고 주장했다(인식론 , 개념형성). 아울러 의미를 해석하는 2가지 접근방법을 내놓았다.

하나는 '관념들의 관계'를 대상으로 하는 분석적 방법이며, 다른 하나는 '사실'을 대상으로 하는 경험적 방법이다. 논증적 지식은 오직 관념들 사이의 논리적 관계에 대해서만 성립한다. 반면 사실들은 서로 어떠한 논리적 관계도 없으며 개개의 사실은 그 역(逆)도 생각할 수 있으므로 사실에 관한 논증적 지식이란 성립할 수 없다. 이러한 기본사상을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인과성 이론을 펼쳤다.

흔히 인과성의 관념은 사실들 사이의 필연적 결합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관념은 어떤 인상에서 생긴 것인가? 흄은 감각자료 사이에 어떠한 인과관계도 직접 관찰할 수 없으며, 오직 두 사건이 자주 일정하게 연접(連接)할 뿐이라고 지적한다. 이 연접의 관찰을 통해 마음속에는 한 사건의 인상 또는 관념에서 다른 사건의 관념으로 이행하려는 연상 습관이 자리잡는다. 이 습관에서 느껴지는 강제력이야말로 인과성 관념의 원천이다. 이어 그는 인과추론의 과정을 고찰하면서 믿음(belief)이라는 개념을 문제삼았다(신념). 우리는 원인에서 결과, 또는 결과에서 원인을 추론할 때 단순히 추론되는 대상의 관념을 떠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대상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흄은 이 믿음의 정체가 일종의 생동감 또는 생생함이라고 주장한다. 생생함은 본래 인상에 속한 것이지만 정신의 연상작용에 의해 특정한 관념들에도 속하게 된다. 바로 이 생생함 때문에 우리는 인과추론의 대상을 그저 관념으로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다. 흄은 사건들이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사건들이 과거와 똑같이 미래에도 그렇게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명제가 거짓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는 이 명제들에 대한 믿음이 인간 본성에 뿌리박은, 따라서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자연적 믿음이라고 강조했다. 그가 주장한 요지는 다만 그 믿음들이 경험적 관찰에 의해 직접 얻어진 것도 또 이성에 의해 추론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흄의 회의론이 부정한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확실성이었다.

〈도덕 원리 탐구〉에서 흄은 이전보다 세련된 형태의 도덕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도덕성이란 관련 당사자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모든 사람이 시인하는 어떤 성질을 일컫는다. 그에 따르면, 도덕적 시인은 사실에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인식'이 아니라 '느낌'에 근거해 있다. 그리고 어떤 성질이 도덕적 가치를 갖는 이유는 그 성질의 소유자나 타인에게 주는 유용성 또는 유쾌함 때문이다. 흄은 도덕적 정서의 대부분이 타인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공감은 인간 본성에 기초한 사회생활과 개인의 행복의 근본원리라고 주장했다(이타주의). 전통적으로 흄을 도덕 냉소자라고 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도덕을 회의한 것이 아니라 도덕에 대한 과장된 이론들을 회의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저서를 출판한 뒤 흄은 에든버러에서 여러 해(1751~63)를 보냈다. 이때 훗날 절친한 친구가 된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의 후임으로 글래스고대학의 논리학교수직이 거론되었으나 무신론자라는 소문이 나도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러나 1752년 에든버러 변호사 도서관장직에 임명되어 마음껏 독서할 수 있었다.

〈정치론 Political Discourses〉(1752)에 뒤이어 카이사르 침략기부터 1688년까지를 서술한 〈영국사 The History of England〉(6권, 1754~62)가 이 시기에 출판되었다. 이 두 책의 출판으로 그의 이름은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63년 흄은 파리 주재 영국대사 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파리에서 그는 어디를 가나 폭넓은 지식, 예리한 사고, 유려한 필체 등으로 명성을 얻었다. 흄은 몇 년 뒤 귀국할 때 당시 프랑스에서 박해받던 장 자크 루소를 데리고 와 한 마을에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던 이 천재는 흄의 행동을 음모라고 판단, 비밀리에 프랑스로 되돌아간 뒤 자신이 배신당한 이야기를 퍼뜨리고 다녔다. 기분이 몹시 상한 흄은 사실을 밝히기 위해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들을 자신의 설명을 덧붙여 공개했다(〈흄과 루소 사이에 벌어진 논란의 간략한 진상 A Concise and Genuine Account of the Dispute Between Mr. Hume and Mr. Rousseau〉 1766).

1769년 공직과 잉글랜드에서의 생활에 싫증을 느껴 늘 마음에 그리던 에든버러에 돌아와 정착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연회와 토론회에서 여러 친구들과 즐겁게 어울렸으며, 또 이미 출판된 저서들을 다듬고 고치며 남은 생을 보냈다. 1762~73년에 〈영국사〉 개정판이 여러 차례 나왔고, 전집에 해당하는 〈논문집 Essays and Treatises〉은 1753~72년에 8판이 나왔다. 이밖에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 Dialogues Concerning Natural Religion〉를 썼으나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출판을 유보했다.

이 책은 죽고 난 뒤 1779년에 출판되었다. 매우 초연한 태도로 쓴 〈흄 자서전 The Life of David Hume, Esquire, Written by Himself〉(1777)은 완성 날짜가 1776년 4월 18일로 되어 있다. 오랜 병고 끝에 그는 1776년 8월 25일 에든버러 집에서 죽었다. 유저(遺著) 관리자였던 애덤 스미스는 〈흄 자서전〉에 추도문을 실으면서 그를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완벽한 지혜와 덕의 이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인물'이라고 평했다. 흄의 저명한 친구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그중에는 목사도 여럿 있었다. 마지막 병상에 누운 흄을 방문한 바 있는 보스웰은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 Private Papers〉에서 그 철학자가 자신이 왜 영혼불멸을 믿지 않는가를 쾌활하게 설명하던 장면을 회고하고 있다.

흄의 영향

흄이 18세기의 주요사상가였다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업적을 역사적으로 평가하더라도 그렇다. 그 이유는 흄의 4가지 면모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첫째, 문필가로서의 면모이다. 개성과 겉치레를 멀리하는 흄의 문체는 이미 생전에 평판이 높았다. 또 무거운 몇몇 주제를 제외하면 그의 필치는 매우 경쾌하다. 서술의 냉정함·균형감각·유려함·명쾌함 등은 그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징들이다. 둘째, 역사가로서의 면모이다. 〈영국사〉는 그가 죽고 난 뒤 1894년까지 최소한 50판을 거듭했다. 지금은 비록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당시에는 이전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혁신적 저서였다. 내용은 더욱 방대해졌고 서술 시각은 더욱 공정해졌다. 게다가 인물과 사건이 극적인 단계를 거쳐 종국의 사태에 이르는 과정이 인과구조 속에 잘 짜여 있다. 〈영국사〉는 그후 일반독자를 위한 역사 서술의 한 전형을 마련했다. 셋째, 경제학자로서의 면모이다. 그가 12세 연하의 애덤 스미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두 사람은 대체로 비슷한 원리에 입각해 있었으며 역사에서 증거를 빌어와 논변을 펴는 솜씨도 똑같이 뛰어났다. 스미스의 몇몇 주장, 예컨대 '부는 화폐가 아니라 상품으로 이루어진다', '화폐유통량은 시장에 나온 재화량과 관계가 있다', '이자율 하락은 화폐과잉이 아니라 경기활황의 징후이다' 등을 보면, 18세기 '고전 경제학자들'이 계승한 흄의 탁월한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통화량 , 1차산품거래). 마지막으로 철학자로서의 면모이다. 유럽에서는 그를 전형적인 영국 고전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본다. 독일에서는 특히 칸트의 비판철학이 흄에 대한 대응으로 성립했기 때문에 흄을 중요한 인물로 본다. 영국에서는 그의 적극적 영향이 19세기에 활동한 벤담공리주의와 존 스튜어트 에게서 확인된다. 흄은 원인과 결과의 필연적 연결을 의심함으로써 근대세계에 고대 회의론을 되살린 최초의 인물이었다. 비록 자신은 뉴턴을 존경했지만 흄의 인과성 비판은 근대 과학의 철학적 토대를 약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0세기 들어 특히 분석철학자들 사이에서는 회의론보다 그의 자연주의가 더 많은 주목을 받았다. 흄의 자연주의는 철학적 정당화가 오직 자연세계의 규칙성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 분석철학자들은 그 믿음이 흄 자신과 그가 서 있는 회의적 전통이 제기한 여러 문제를 해결해줄 전망을 열어 보인 것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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